24시간 활동지원 중단에 의해 건강이 악화되어 17일 결국 사망에 이른 척수장애인 권오진 씨(47세). 그의 추모제가 인천시립승화원에서 열렸다. 사진은 그의 젊은 시절.
인천에 거주하던 척수장애인 권오진 씨(남, 47세)가 지난 17일 오후 3시 45분경 요양병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직접적인 사인은 패혈증. 말하자면, ‘병사’인 것이다. 그러나 그의 삶을 바라보는 우리 눈의 렌즈를 좀 확대해 본다면 쉽게 ‘병사’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복지의 누락이 ‘강요한’ 죽음이었다.
권 씨는 20대 중반이던 96년 뺑소니 교통사고로 경추 4~7번이 손상되어 목 아래 전신이 마비된 장애인이 되었다. 국립재활원에서 3개월간 재활훈련을 받고 한 동안은 집에서 생활했지만, 2002년 결국 장애인시설인 가평 꽃동네에 입소하게 됐다. 시설 밖을 나오게 된 것은 10년이 지나서인 2011년. 시설에서 함께 나온 동료 오명진 씨와 체험홈에 입주했고, 2014년부터는 임대아파트를 얻어 혼자 생활하게 되었다.
시설에서 나온 직후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그가 활동지원사의 도움을 받아 쓴 ‘탈시설 소감문’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 “가면 갈수록 직원들의 불친절함과 인권 침해가 점점 심해졌다. (...) 수사님이나 팀장한테 그런 것에 대해 시정요구도 많이 했었지만 전혀 시정되지 않았다. (...) 그곳에 있는 동안 너무나도 안 좋은 것을 많이 봐 왔고, 어디 가서 하소연 할 데도 없고 그래서 나는 퇴소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그에게 시설에 있는 동안 보류되었던 새로운 꿈이 생겼다. “시설마다 있는 장애인들에게 찾아가서 자립생활에 대한 이야기와 새 삶을 개척해 나갈 수 있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다. 앞으로는 장애인들을 도와주는 큰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겠다. 그것이 내 꿈이다.”
권오진 씨가 탈시설 직후 쓴 '탈시설 소감문'.
그에게 그 꿈이 점차 가까이 다가오는 듯 했다. 임대아파트에 들어가게 된 해 9월부터, 그를 포함해 총 3명의 중증장애인이 인천시로부터 24시간 활동지원을 받게 된 것이다. 비록 시범사업이었지만, 그와 장애인 동료들이 투쟁을 통해 얻어낸 소중한 성과였다. 손가락 외에는 움직일 수 없는 중증장애인이었던 그에게 24시간 활동지원은 곧 생명이었다.
욕창과 소변줄, 생과 사의 갈림길
그러나 그의 생명은 1년 반 만에 갈림길 위에 섰다. 인천시가 2016년 2월부터 24시간 활동지원서비스를 중단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당시 박근혜 정부가 지자체 복지사업 중 유사·중복사업을 통폐합하겠다고 내놓은 ‘사회보장 정비방안’에 따라 전국 1496개 복지사업이 철퇴를 맞을 위기에 놓였고, 인천시의 24시간 활동지원이 그 대상이 된 것이다. 사회보장기본법에 따라 인천시는 복지부와 제도 유지에 대해 협의를 벌였으나 복지부의 입장이 바뀌지 않아 결국 이를 폐지해 버렸다.
생의 위협은 욕창과 소변줄을 향해 다가왔다. 올해 4월까지 주말에 권오진 씨 활동지원을 했던 김훈 활동지원사는 이렇게 말했다.
“소변줄이 기계적으로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차고 그러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주기적으로 소변을 빼주지 않으면 역류할 수 있어서 매우 위험해요. 그래서 일부러 물을 안 먹는 경우도 있었어요. 활동지원사 퇴근하고 갑자기 소변이 많이 나올 수 있으니까. 무엇보다 침대에 누우면 손 밖에 못 움직이니까 욕창이 여러 군데에 생길 수 있죠.”
인천시가 그에 대한 대안으로 내놓은 것은 긴급상황에 호출할 수 있는 응급알림e와 야간순회서비스 뿐이었다. 한 밤중에 순회인력이 방문하니 잠을 편히 잘 수 없고 생활리듬도 깨졌다. 이마저도 올해부터는 대상자가 늘었다면서 일요일 밤부터 월요일 아침까지 방문서비스가 제공되지 않았다. 결국 그 시간에는 활동지원 바우처를 끌어다 써야했고, 낮 2시간, 밤 2시간 활동지원서비스가 공백이 생겼다. 매일 시간과의 전쟁을 벌여야 했다.
인천시가 24시간 활동지원 중단을 선언했을 때, 그는 함께 이 서비스를 받고 있던 유명자 씨와 함께 1인 시위에 나서기도 했다. 피켓 문구에는 그의 절박한 호소가 담겨 있었다. “불이 나면 누가 119에 전화해 줄거야?” 이 문구는 엄살이 아니었다. 예전에 집에서 전기 합선으로 불똥이 튄 적이 있었는데, 당시에는 활동지원사가 있어서 빠르게 대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비스가 중단된 후로는, 혼자 있을 땐 피가 마르는 공포 속에 놓여야만 했다.
결국 올해 들어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었다. 욕창이 번지고 살이 빠졌다. 5월 5일 호흡곤란이 와 병원에 입원했고, 몇 주 후 요양병원으로 옮겼지만 결국 패혈증이 심해져 사망에 이르렀다.
권오진 씨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고 있는 인천장애인차별철폐연대 회원들.
한 활동가가 권오진 씨에게 '부치지 못한 편지'를 낭독하고 있다.
‘사회보장 정비방안’에 쓸려 나간 중증장애인의 삶
또 다른 활동지원사 유민상 씨는 그를 향한 안타까운 마음에 함께 발을 동동 굴려야 했던 시간들을 떠올렸다. “사람이 매번 아프다고 하는데 그냥 갈 수 있나요? 보통 우리가 하루 8시간 일하는데, 오한이나 발열이 오면 바우처 결재 안하고 1-2시간 그냥 더 같이 있다가 퇴근하기도 하고 그랬죠.” 그러나 ‘사회보장 정비방안’에 쓸려나간 그의 삶은 활동지원사 혼자 발버둥 친다고 다시 채워질 수는 없었다.
기초생활수급비에 교통공사에서 매월 지급되는 보상금을 합해봐야 100만원이 안 됐다. 그런 열악한 상황에 놓인 그의 삶에 대한 지원을 정부는 ‘유사·중복’이라는 딱지를 붙여 누락해 버렸다.
사고를 당하기 전 그는 고향인 양주에서 친구들과 건물 천장 공사 일 등을 했다고 한다. 양주에 마련됐던 그의 빈소에도 친구들로 가득했다. 탈시설 이후 인천에 살면서도 동창들 모임에는 빠지지 않으려 했다. 활동지원사에게 운전을 부탁하고, 그의 탈시설을 지원해 준 민들레장애인자립생활센터의 차를 빌려, 양주에 오간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그의 동생 권혜진 씨는 “어렸을 때 오빠가 항상 친구들 사이에서 대장 노릇을 했어요.”라고 말했다. 문상민 민들레장애인자립생활센터 사무국장도 그의 호탕한 성격을 떠올렸다. “장애인복지 확대를 요구하는 집회에 갈 때에도 항상 그런 말을 하더라구요. ‘우리 (고향) 친구들 다 불러서 (복지부를) 확 엎어버릴까?’” 시설에만 있었다면 다시 찾을 수 없었을 그만의 성격, 다른 누구의 것과도 ‘유사·중복’일 수 없는 그만의 친구들, 그만의 삶을 찾은 것이었다.
“인천시 1년 예산이 8조 원이라고 한다. 그런데 고작 3명 24시간 활동보조하는 1억2000만 원이 아까워 3명의 목숨을 내버리는 인천시가 야속하다.” 지난 2016년 1월 28일, 인천시의 24시간 활동지원 중단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에서 권 씨가 한 발언이다.
그리고 권 씨의 육신이 한 줌 흙으로 남아 이 세상을 떠나는 19일 오전, 인천장애인차별철폐연대 회원들이 인천시립승화원에 모여 그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그리고 박길연 인천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는 눈물을 꾹 참아내며 권 씨의 말에 다짐하듯 화답했다.
“그동안 오진이 꿈이 뭔지 몰랐습니다. 자립생활하고 싶은 모든 장애인에게 길을 열어주고 싶다고, 당당하게 그걸 적어놓았더라구요. 오진이가 못 다한 꿈 우리가 이제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박길연 인천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
지난 2016년 1월 25일, 인천시의 24시간 활동지원서비스 중단에 항의하며 1인 시위를 하고 있는 권오진 씨(왼쪽)와 유명자 씨(오른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