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 나의 길] “차별이 도전하는 삶 만들어 장애인도 모든 영역 참여해야
장애인 권익 앞장선 박은수 변호사 / 1980년 사시에 합격했지만 / 장애 이유로 법관임용 탈락 / 사회 저명 인사들 도움 받아 / 1983년 대구지법 판사 임용 / 장애인 체육 발전 기여 인정 / 평창패럴림픽 선수촌장 맡아 / 장애인고용공단 이사장때 / 대기업과 고용증진 협약도 / 18대 민주 비례대표로 선출 / 판단 저하 지적장애인 위해 / 성년후견인제 도입 이끌어 / 노인문제 해결에도 팔걷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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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수 변호사는 “고령화사회가 진행될수록 성년후견제도가 필요하다”며 “이 법을 만든 장본인으로서 고령자와 지적장애인이 건강한 사회생활을 하는 데 도움을 주는 성년후견제도가 튼튼하게 뿌리내리도록 앞장서서 나가겠다”고 말했다. 남정탁 기자 |
“학창시절 아침마다 ‘오늘도 무사히 지나가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대문 밖만 나가면 내 의지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버스도 차장이 장애인이라고 태워주지 않으면 학교에 못 갔으니까요. 그래서 날마다 기도를 한 것이죠.”
지난달 26일 서울 강남구 법무법인 율촌 회의실에서 2018평창동계패럴림픽 평창선수촌장을 지낸 박은수(62) 율촌 고문변호사를 만났다. 박 변호사는 차별과 배제가 일상화한 어릴 적 기억을 되살리는 것은 죽기보다 더 힘들다고 운을 뗐다. 올림픽 선수촌장은 메달리스트 출신이 맡는 것이 관례다. 박 변호사는 패럴림픽 메달리스트는 아니지만 서울시장애인체육회 부회장을 맡고 있는 데다 장애인 체육발전에 기여한 점을 인정받아 선수촌장에 임명됐다.
박 변호사는 1980년 사법시험에 합격했지만 장애인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로 법관임용에서 탈락했다. 대법원의 부당한 처사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현실을 인정하면 도서관에서 같이 공부한 후배 장애인들에게 죄를 짓는 것 같아서 같이 합격한 3명의 장애인과 함께 힘을 합쳐 대응했다. 그는 소설가 박완서, 시인 박재삼 등 저명인사들이 ‘사회적 약자인 장애인 편에 서야 할 법원이 가해자가 돼 차별하면 되느냐’는 신문 기고를 통해 사회적 공감대를 얻어내면서 1983년 대구지방법원 판사로 임명됐다.
“만약 그 당시 평탄하게 판사에 임용됐다면 오늘의 저는 없었을 겁니다. 무난하게 판사생활을 마치고 변호사 활동을 하고 있겠지요. 장애인의 차별을 없애는 데 도움을 준 많은 분에게 고마움을 느낍니다.”
박 변호사는 생후 10개월 때 소아마비를 앓으면서 장애인이 됐다. 당시 사회적 분위기는 장애인 자식을 두면 숨기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사회지도층이거나 부유층일수록 장애 자식을 집에서 키우기보다는 장애인시설로 보냈다. 박 변호사는 집에서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형제들과 같이 성장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부모님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장애인들은 가족으로부터 먼저 배제당하는 설움을 겪어야 하는 현실과 비교하면 행복했다. 어려움을 딛고 당당하게 사회생활을 할 원동력은 부모님의 사랑이었다.
그는 초등학교 졸업 때 반에서 1등을 할 정도로 성적이 뛰어났지만 대구 최고 명문중학교 입학 꿈은 접어야 했다. 체력장에서 만점을 받지 못하면 일반 과목에서 아무리 잘해도 떨어지는 것은 당연했다. 그래서 그는 차선을 택했다. 그는 지금도 초등학교 6학년 때 체력장 점수를 받기 위해 100m 달리기를 하던 날을 잊지 못한다. 평생에 제일 많이 울었던 날로 기억한다. 체력장 점수를 만점 받는 것도 아니고 기본 점수를 받기 위해 불편한 몸으로 100m를 뛴 날이었다. 같이 시험을 본 친구들이 모두 쳐다본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나온다. 사회가 장애인 구제라는 인식이 없었을 때지만 감수성이 예민한 어린 학생이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큰 충격이었다.
대학에 진학할 때 부모님은 장학금을 받으면서 집에서 다닐 대학 입학을 권유했지만 그는 서울대를 선택했다. 고등학교 때 동아리 선배들이 ‘넌 서울대에 꼭 입학해 큰일을 하라’는 격려가 큰 힘이 됐다. 대학에 입학해서도 고난의 연속이었다. 법대 교과서가 두껍고 무거워 책을 사면 칼로 오려내 그날 배울 부분만 갖고 다녔다. 도시락을 싸 다니는 것도 힘들어 소보로빵 하나로 하루를 견디며 생활했다. 판사임용이 결정되자 그는 서울생활이 너무 힘들어 대구지방법원 근무를 희망했다.
중학교 입학 체력장 때문에 설움을 겪은 박 변호사는 장애인체육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 당시 판사들 사이에서 최고의 스포츠는 테니스였다. 외국책을 찾아보니까 휠체어 테니스라는 종목이 있었다. 휠체어를 타는 장애인들이 테니스를 즐기고 있었다. 투바운드에 공을 넘기는 룰만 바꾸면 충분히 테니스를 할 수 있었다. 그는 곧바로 테니스 선수용 휠체어를 샀다. 동호회를 만들고 외부 코치진으로부터 테니스 강습을 받았다. 레슨을 받은 후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국내에는 휠체어 테니스 대회가 없어 일본 후쿠오카 국제 휠체어 오픈에 참여해 복식 부문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처음 출전한 대회에서 우승은 그도 생각지 못한 결과였다.
그는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휠체어 테니스 대회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지역 언론사 간부 등과 함께 호주오픈을 구경하러 갔다. 휠체어 테니스 대회에 대한 비중이 일반대회와 동등하게 개최되고 인기도 높다는 것을 보고는 1997년 대구오픈 휠체어 테니스 대회를 만들었다. 올해 22회째 대회가 개최될 정도로 자리를 잡았다. 그는 또 전국 최초로 대구시에 실업팀인 휠체어 농구단을 창단하는 데 힘을 보탰다.
장애인체육 못지않게 그는 장애인의 일자리 마련에 공을 들였다. 그는 2004년 한국장애인고용공단 이사장에 취임하면서 대기업에 장애인을 취업시키겠다고 약속했다. 국내 최고의 기업에서조차 장애인을 고용하지 않는 현실을 극복하려고 힘썼다. 그는 장애인 작업장은 장애인 일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장애인운동의 기본정신은 모든 생활영역에서 완전하게 참여하는 것이라고 봤다. 비장애인의 생활리듬대로 장애인도 살 권리가 있다고 판단했다. 대학을 졸업한 장애인이 장애인 작업장에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 사무실에서 비장애인과 같이 일할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장애인 일자리 만들기에 나선 이유다. 주변에서는 모두 무모하다고 했지만 뚝심을 갖고 추진했다. 국내 대기업 경영자들과 고용증진협약을 맺어 장애인고용을 추진했다. 입사시험에 합격했지만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불합격 처리해서는 안 된다는 약속을 받았다. 그 결과 대부분 대기업에서 장애인 고용률이 괄목할 정도로 올라갔다.
그는 전국 교대에서 장애인 학생의 입학을 불허한다는 불합리한 규정을 개선했다. 교대는 초등학교 교사는 체육이 포함된 전 과목을 가르쳐야 해 장애인 입학은 곤란하다는 이유를 들었다. 당시 장애인 고용률인 2%룰을 적용해 260여명의 교사를 채용해 일선학교에 발령냈다. 또 기억에 남는 하나가 있다. 제2연평해전에서 다리를 다친 장교가 전역이 아닌 지속해서 근무를 할 수 있도록 했다. 전투에서 다치면 보훈대상자로 예우는 받을 수 있지만 군복을 벗어야 했다. 현재는 복무 중 부상해도 계속해서 군 복무할 수 있는 제도가 마련됐다.
대구에서 변호사 활동을 하면서 장애인 권익증진을 위해 일한 경력이 소문나면서 그는 한국장애인단체총연맹 정책위원장을 맡아 일했다. 마침 2002년 대선을 앞둔 시점이어서 그는 장애인차별금지법 제정과 재정적으로 열악한 장애인 단체에 사무실 제공을 공약으로 채택해 달라고 노무현 후보와 이회장 후보 측에 똑같이 건의했다. 이 후보 측은 거절하고 노 후보 측은 공약으로 받아들였다. 그 길로 장애인단체총연맹은 노 후보 지지를 선언했다.
한국장애인고용공단 이사장직을 그만둔 그는 신문에 난 민주당의 비례대표 공모 광고를 보고 지원해 제18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다. 딱 4년만 활동하고 그만둘 생각이라서 보좌진 8명을 모두 장애인 정책 전문가로 뽑았다. 이때 그는 지적장애인을 위한 성년후견인제를 만들었다. 특별법이 아닌 민법개정을 통해 성년후견인제를 도입했다. 민법에 성년후견제가 포함되면서 로스쿨 학생들이 관심을 갖고 공부하는 주요 법조항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로스쿨 교수 중 후견인제를 전공으로 하는 교수가 생겨난 것에 큰 보람을 갖고 있다.
그는 장애인 인권 못지않게 노인의 권익증진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장애인과 노인문제는 해결점이 같아서 노인문제가 해결되면 자연스럽게 장애인 문제도 풀린다고 봤다. 노인 문제는 장기적으로 국민 모두의 문제이기 때문에 더 관심을 갖는다. 장애인은 노인문제를 먼저 경험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이 90세가 넘으면 대부분 휠체어를 탄다. 대부분의 사람이 장애를 경험하는 시대다. 그래서 그는 노인과 장애인의 건강증진을 위해 주거지 주변에 수영장 건립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관절이 망가진 노인들이 운동하지 않는다면 급속도로 체력이 약해지며 이것은 바로 국가부담으로 직결된다. 그는 노인과 장애인의 건강을 지키려면 수영장만 한 시설이 없다는 국내외 연구논문이 증거라고 했다.
그가 고문변호사로 있는 율촌은 로펌 최초로 2014년 한국장애인고용공단으로부터 장애인고용 우수사업장으로 선정될 만큼 장애인고용을 실천하고 있다. 그는 양극화가 심화할수록 가진 자가 공익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율촌은 소속 전문가들이 지식과 경험을 사회에 환원해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만드는 공익사단법인인 온율을 설립했다. 그는 온율의 성년후견지원센터장을 맡고 있다. 판단능력이 떨어지는 발달장애인과 치매 환자들의 권리를 지켜주는 성년후견제 활동을 적극적으로 펴고 있다.
박연직 선임기자
repo21@segye.com●박은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