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주의, 광기와 단절하다
푸코는 광기에 대한 근대적 인식이 형성된 것이 17세기 중반이라고 말한다. 그때부터 광기는 이성의 부재, 혹은 ‘비이성’으로 인식되었다. 오늘날에는 ‘비이성적’이라고 형용사로만 쓰지만 고전주의 시대에는 ‘비이성’이 명사로서 실체적 의미를 갖고 있었다. 광기가 이성에 의해 비이성으로 규정되고 침묵 속에 대상화된 것은 고전주의 시대부터이다. 그리고 그것은 17세기 절대군주의 ‘수용’ 정책과 깊이 관련 있다. 르네상스 시대까지 광기는 ‘다른 세상’과 통하는 종교적 현상의 하나이거나, 우리의 이성이 언제든 도달할 수 있는 진실의 극단적 형태라는 생각이 있었다. 그리고 광인은 ‘광인들의 배’를 타고 멀리 사라졌다가 불쑥 항구나 강의 지류를 따라 마을에 나타나곤 했다. 17세기 중반 무렵 광기와 연관된 그런 전통은 끊어졌다.
브란트의 목판화, <바보들의 배> 1494년.
고전주의를 대표하는 철학자 데카르트는 이성과 광기의 연관성을 완전히 부정했다. ‘나는 착각하는 자일 수 있고, 꿈꾸는 자일 수도 있다. 그 속에서도 나는 진실에 이를 이성의 형식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광인이라는 가정 속에서는 그게 불가능하다.’ 광기에는 진실에 이를 어떤 이성의 형식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다. 가령, 이런 것이다. 2016년 5월 17일 강남역 10번 출구 인근 공용화장실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피의자 김모 씨(34)는 경찰조사에서 알지도 못하는 여성을 살해한 이유에 대해 “여성들에게 무시를 당해 참을 수 없었다.”고 진술했다. 여성에 대한 혐오 감정이 살해 동기였던 것이다. 그러나 5월 18일 경찰은 “김씨가 2008년부터 조현병·공황장애 등으로 4차례 걸쳐 입원한 기록이 있다.”며 “알려진 대로 ‘여성혐오 살인’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발표했다. 그는 미친 자이고 미친 자의 말은 들을 필요가 없다는 듯이. 광기 안에는 일말의 진실도 없다는 것, 광인의 말은 진실과 무관하다는 것이 데카르트가 이룬 광기와의 인식론적 단절이다.
고전주의, 광기를 수용하다
이런 인식론적 단절 속에서 광인은 사회 안에서 사회와 단절된 ‘구빈원’에 수용되었다. 1656년 루이 14세가 파리에 ‘hopital general(종합병원)’을 설립하라는 칙령을 내린 것이 연대기상의 이정표가 될 것이다. 이 ‘종합병원’은 오늘날의 의료기관도 아니고 중세시대 수도원이 운영하던 자선기관도 아니다. 17세기 들어오면서 가난은 더 이상 굴욕과 영광의 변증법적 관계 속에서 파악되지 않았다. 루터와 칼뱅 이래 ‘징벌’의 표지를 지니게 된 빈곤은 이제 절대군주의 통치 질서에 저해되는 부도덕과 비이성의 표지로 인식되었다. 그에 따라 빈민은 자선이 아니라 처벌의 차원에서, 도움의 손길이 아니라 경찰의 몽둥이에 이끌려 구빈원(hopital general)에 수용되었다.
군주의 칙령이 내려진 지 불과 수년 만에 파리 인구의 1퍼센트에 달하는 6천명이 파리 구빈원에 수감되었다. 도시 안팎을 배외하던 광인들도 다른 부랑인들과 함께 구빈원에 수용되었다. 부랑인에 단속의 초점이 맞춰졌지만 ‘비이성적’이라는 특성이 수용의 근거와 범위를 결정했다. 그래서 거지, 가난한 불구자, 무의탁 노인뿐 아니라 고집 센 실업자, 성병환자, 온갖 유형의 방탕아, 가장이나 왕권의 공식 명령을 기피하는 자들, 낭비벽이 있는 가장, 규제를 어기고 멋대로 놀아난 성직자, 자유사상가들이 광인과 함께 구빈원에 강제 수용되었다.
영국의 ‘워크하우스(workhouse)’처럼 프랑스의 구빈원에서도 강제노동이 있었다. 오늘날 장애인 시설에 딸려 있는 보호작업장이나 음성적으로 이뤄지는 노역처럼 17세기 구빈원의 수용자들도 집을 짓고 옷감을 짜고 다양한 물건을 제조했다. 이 물건들은 시장에 저가로 공급되었고, 수익은 시설 운영에 보태졌다. 그러나 구빈원의 노동은 시장 가치보다 징벌과 도덕의 가치를 지녔다. 구빈원의 수용자들을 한데 묶을 공통범주는 부르주아적 생산에 참여할 수 없는 ‘쓸모없음’인데 수용은 이런 무능력에 대한 징벌적, 도덕적 조치였다.
고전주의 시대 광인을 구빈원에 수용한 것은 절대군주의 통치(police) 이성이었다.1) 그것은 빈곤과 구제에 대한 새로운 감수성, 실업과 무위도식에 대한 새로운 반응 형태로, 도덕적 의무가 법률과 일치하는 삶의 공간에 대한 꿈을 하나의 복합적 단위 안에 조직해 내는 것이었다.2) 이런 강제 수용소에 의학적 사명이라곤 없었다. 그곳에 치료의 기능이 있다면 그것은 노동윤리를 비롯한 이성적 질서의 신체적, 정신적 각인이었다. 그것도 적극적인 훈육이 아니라 사회로부터 추방시킴으로써 본보기의 효과를 노린 교화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고전주의 시대의 수용정책은 광기에 대한 현대적, 의학적 경험에 두 가지 의미 있는 흔적을 남겼다. 첫째는 오랫동안 자신의 입과 언어로 담론의 지평을 횡행하던 광기에 재갈이 물려졌다는 점이다. 이로써 광기는 침묵을 강요당하고 오로지 이성의 인식 대상으로 식민화 되었다. 그렇게 된 것은 광기가 절대군주의 통치이성에 의해 강제수용 되었기 때문이다. 둘째, 광인은 ‘비이성’이라는 광범위한 분류 기준 속에서 비행자들, 방탕아들, 성병환자들, 사상범들과 광인 사이에 모호한 혈족 관계가 형성되었다. 심리적 죄3)나 법률적 범죄, 사회적 비행과 광기 사이에 모종의 혈연관계가 형성된 것이다. 이런 혈연관계는 19세기 정신의학에 의해 정교해지며 오늘날 정신질환자 탈원화는 범죄를 증가시킨다고 소리치는 정신과 의사들의 주장 속에 남아 있다.
구빈원의 모습을 담은 그림.
고전주의 의학의 광기분석과 치료술
고전주의 시대에도 광기에 대한 의학이 있고 치료술도 있었다. 거리의 광인을 수용소에 쓸어 담던 ‘비이성’이라는 개념은 광기를 분류하는 의학의 인식 틀로도 쓰였다. 고전주의 시대 광기는 크게 정신착란(démence) 유형, 조광증(manie)과 우울증(mélancolie) 유형, 히스테리(hystérie)와 심기증(hypochondrie) 유형으로 분류되었다. 정신착란은 실증적이고 구체적인 관찰보다는 일반적인 견지에서 무질서, 사유의 붕괴, 오류, 환각, 비이성, 비진실로 정의되었다. 고전주의 생리학은 정신착란의 발병 원인을 뇌에서 찾았다. 대뇌물질이 너무 많아서 조직이 덜 단단하거나 질이 떨어져서 정신의 날카로움에 적합하지 않게 된다거나, 대뇌가 둥근 형태를 갖추지 못해서 비정상적인 침하나 팽창이 일어나면 동물 정기(animal spirit)가 불규칙한 방향으로 돌려지고, 순탄한 경로를 통해 사물들의 진실한 이미지를 전달할 수 없게 되어 정신착란이 생긴다는 식이다.4)
『뇌의 해부학』으로 신경과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토마스 윌리스(1621-1675)는 광기의 모든 증후가 나타날 가능성으로 ‘스투피디타스(stupiditas)’, 즉 이성의 기능이 침해됨으로 인한 ‘지능과 판단력의 결함’을 제시했다. 정신지체, 혹은 발달장애를 정신질환과 구분하지 않을 뿐 아니라 모든 정신이상의 잠재적 근원으로 본 점이 흥미롭다. 그는 대뇌가 너무 축축하거나 너무 차가워서, 혹은 대뇌의 과립이 너무 거칠고 땅의 무거운 영향에 침유되어 있을 때 ‘스투피디타스’가 발생한다고 했다.5)
정신착란의 인접 유형으로 광란(frénésie)이 있다. 정신착란은 무열성 질환인 데 반해 ‘광란’은 “몸의 지나친 열기, 머리의 고통스러운 발열, 몸짓과 발언의 격렬함, 전신의 일반성 흥분”6)으로 특징지어진다. 정신착란에서 파생된 두 번째 범주는 ‘어리석음’(stupidité)으로 ‘백치’(idiotie) ‘치우’(imbécillité), ‘우둔’(niaiserie)이 여기 속한다. 오늘날에는 정신질환과 분리된 ‘발달장애’ 범주가 고전주의 시대에는 정신착란 범주 안에 있었다. 18세기 말에 와서 정신착란과 백치를 구별하려는 시도가 생겼다. 근대 정신의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피넬은 저능과 정신착란의 차이를 ‘정체’와 ‘움직임’의 차이로 보았다. 백치는 지성의 모든 기능과 심적 감정이 무기력해서 정신이 일종의 혼미 상태에 정체된 것으로 이해된다. 반대로 정신착란은 정신의 핵심기능이 극단적인 수다스러움 속에서 움직이는 상태로 정의된다.
우울증과 흑담즙 체질의 연관성은 그야말로 고전적인 명제다. 흑담즙은 차가움으로 인해 정기의 양을 감소시키고, 건조함으로 인해 강하고 끈질긴 상상작용을 계속하게 만들며, 검은 색깔로 인해 정기를 탁하게 하고 정기의 정묘함을 없애므로 우울증을 일으킨다는 논리다.7) 조광증과 우울증의 원인은 동물정기의 움직임과 신경섬유의 운동 이미지로 설명된다. “조광증은 극도에 이른 신경섬유의 긴장으로, 조광증 환자는 줄이 과도하게 팽팽해진 결과로 아무리 멀리 떨어지고 아무리 약한 자극에도 진동하는 일종의 현악기이다.”8) 조광증 환자의 대뇌는 메마르고 딱딱하며 쉽게 부서지는 상태였다는 해부 보고도 있고, 여름에 결혼했다가 아내와의 지나친 방사로 체액이 심하게 손실되어 맥관과 신경섬유가 말라버림으로써 조광증이 일어났다는 임상보고도 있다.
윌리스는 조광증과 우울증을 연관성 속에서 파악한 것으로 유명하다. 우울증 환자는 온통 깊은 생각에 빠져 있어서 상상력의 활동이 굼뜨고 정지되는 반면, 조광증 환자는 환상과 상상력이 맹렬한 흐름에 휩싸인다. 윌리스는 동물정기의 역학으로 두 증상의 교대 현상을 설명했다. “우울증 체질은 약화되면 광분으로 변하는 일이 일어나고, 거꾸로 광분은 힘을 잃고 가라앉아 소강상태로 접어들 때 흑담즙성 체질로 바뀐다.”9)는 식으로 동물정기의 역학에 입각하여 두 증상의 교대 관계를 추론한 것이다. 이런 점이 경험적 관찰에 의한 임상의학적 분류와 다른 고전주의적 사고의 연역적 특징이다.
마지막 유형으로 히스테리(hystérie)와 심기증(hypochondrie)이 있다. 심기증은 동물정기가 약해지고 활력을 상실함으로써 신경이 쇠약해진 상태나 그런 상태에 대한 환각적인 염려로 특징지어진다. 히스테리는 동물정기가 과열됨으로 인해 불규칙적이고 탈자연적인 움직임, 즉 경련이 발생하는 병이다. 이 둘을 동물정기의 병적인 상태, 즉 육체의 병으로 보는 견해도 있고 환각이나 상상력의 폭발을 강조하며 정신병에 포함하는 견해도 있다. 이 둘은 신경섬유의 과도한 섬세함, 인체의 과민성으로 인해 쉽게 감동하는 마음, 불안한 심정,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과도한 교감성 등 오늘날의 신경증 문제를 제기한다.
고전주의적 광기 분석에서 특징적인 것은 영혼과 육체 사이에 ‘표상’의 동일성을 전제로 한다는 점이다. 즉 영혼의 상태에 대한 표상(혼란함, 날카로움, 둔중감, 과민함)과 뇌의 물질적 상태(성김, 과밀함, 물렁함, 가벼움), 동물정기의 운동 상태(빠름, 느림), 신경섬유의 역학적 상태(팽팽함, 느슨함, 과민함)에 대한 표상 사이에 동형성을 상정하는 것이다. 이런 고전주의 생리학이 발전하여 근대의 뇌 과학, 신경생리학으로 이어졌다고 봐서는 안 된다. 둘 사이에는 연속성이 아니라 에피스테메 상의 깊은 단절이 있다. 정신과 육체 사이의 표상적 동형성이라는 고전주의 에피스테메가 붕괴될 때만 정신과 독립된 뇌의 물리적, 화학적 작동 메커니즘이 규명될 수 있고, 그것과 정신현상 간의 (동형성이 아니라) 인과관계도 탐색할 수 있다.
육체와 영혼 간의 표상적 동일성은 고전주의 치료술을 관통하는 원리로 쓰였다. 육체적 치료법과 심리적 치료행위는 구별되지 않았다. 예컨대 고미제의 복용이 처방될 때 이것은 육체만큼이나 영혼을 닦아내고자 하는 것이며, 우울증 환자에게 경작의 단순한 생활이 처방되거나 환자의 정신착란을 연극으로 연출할 때 이것은 심리적 효과뿐 아니라 신경의 움직임과 체액의 농도를 바꾸기 위한 것이다. 그런 심신 동형론, 혹은 심신상응론에 입각하여 의사들은 광인의 정신과 근육을 신선하게 하기 위해 샤워나 목욕을 시켰고, 광기를 유발하는 오염된 혈액을 정화하기 위해 피를 내거나 깨끗한 피를 주사했으며, 상상력의 오류를 개선하기 위해 머리에 충격을 가하거나 환자를 빠르게 회전시켰다.
구빈원에 광인만 남고 새로운 통치자가 오다
18세기 후반 절대군주의 통치이념이 구현된 구빈원은 대중들로부터 부패의 온상으로 지목되었다. 구빈원은 ‘부패’에 의한 열병의 진원지로서 악덕에 물든 수용자들의 호송수레와 그들을 묶은 쇠사슬에서 흘러나온 전염병균이 도시를 더럽히고, 감금시설의 탁한 공기가 주거지역을 오염시킨다는 공포가 확산되었다. 그와 함께 절대군주의 자의적 감금에 대한 정치적 고발이 쏟아졌다. 죄 없는 광인과 범죄자를 뒤섞는 것에 대한 비난과 함께, 언제든 사회로 돌아올 수 있는 죄수들을 끔찍한 미치광이들과 뒤섞어 두는 것에 대한 비난이 구빈원을 포위했다. 모든 사람들이 수용소의 폐지를 원했다.
구빈원에 수용된 광인의 수는 프랑스 대혁명과 함께 급격히 감소했다. 그것은 구빈원에서 광인들이 해방되어서가 아니라 18세기 중반부터 광인만을 위한 시설이 증가했기 때문이다. 구빈원에서 해방된 것은 광인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이었다. 빈민의 수용이 퇴락한 이유는 빈곤이 더 이상 비이성, 게으름과 방탕의 기호로 인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빈곤은 도덕적 타락이 아니라 불가피한 자연 현상으로, 국가권력의 통제가 아니라 시장에서 자연스럽게 조절되어야 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가난과 함께 병자를 보살피는 일은 가족의 권역에 속하는 사적 문제가 됐다. 반면에, 광기는 여전히 공적인 문제로 남았다. 미치광이로부터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은 한 뼘도 움직이지 않았다. 비이성의 다른 모든 형태가 점차 풀려나면서 수용시설은 유일하게 광기의 행선지가 되었다. 그에 따라 광기와 수용소는 오히려 필연적인 관계로 묶이게 되었다.
프랑스에서는 피넬Pinel, 영국에서는 튜크Tuke가 수용소 개혁을 대표했다. 정신의학사에서 이들은 광인에게 채워진 족쇄를 풀어준 휴머니즘의 상징이자 실증 의학의 눈으로 광인을 보기 시작한 정신의학의 아버지이다. 그러나 피넬과 튜크를 비롯해 당시 의사들은 강제수용이라는 구시대의 관행과 절연하지 않았다. 광인의 발에 채워진 사슬은 구속복으로 대체되었을 뿐이며, 물리적 사슬 주변에 새로운 정신적 사슬이 구성되었다. 그 정신적 사슬은 수용소를 항시적인 감시와 판단의 공간으로 변모시켰다. 수용된 이들의 행동은 24시간 감시당해야 했으며 그들의 주장은 무시되고 그들의 망상은 반박당해야 했다. 그들의 실수는 야유를 받았고 정상적이지 않은 일체의 행동에는 즉각적인 처벌이 가해졌다. 의사에게는 치료적 개입보다 윤리적 통제의 책임이 주어졌다.
18세기 말부터 의사의 진단서는 광인의 수용에 거의 필수적인 것이 되었다. 감호시설이 의료 공간으로 정비됨에 따라 시설에서 의사는 절대 권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의사가 광기를 장악한다 해도 그것은 광기를 알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광기를 제압하기 때문이다. “의사는 처음부터 아버지 겸 재판관, 가족 겸 규범임에 따라서만 수용소 세계에 절대적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다.”10)
정신병원 수용과 규율 치료
광인만 남은 구빈원을 접수한 의사는 수용의 통치이성에 의학적 의미를 부여했다. 수용은 정신질환자의 치유를 위해 필요한 조치라고 얘기되었다. 이것은 18세기 중반부터 감옥, 학교, 병영, 공장을 중심으로 확립된 규율(discipline) 체계와 관련 있다. 정신병원은 건축학적 배치로 인해 치료 효과가 발생하도록 설계해야 했다. 병동과 정원의 배치, 입원실과 복도의 배치, 개개인이 공간 안에 배분되는 방식, 사람들이 왕래하는 방식, 보거나 보이는 방식 등이 그 자체로 치료적 가치를 갖는다. “병원은 판옵티콘적 기계이기 때문에 판옵티콘적 기구로서 치유를 가져다주는 것이어야 했다.”11)
19세기의 대표적 정신의학자인 에스키롤에 따르면 몇 개의 병동을 나누어 짓되 병동들의 세 면은 서로 마주보게, 네 번째 면은 정원 쪽으로 열려 있도록 배치해야 한다. 이렇게 배치한 병동은 가능한 단층으로 지어야 한다. 왜냐하면 의사가 환자나 수위, 간수 모르게 들어가 병동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12) 광인은 단순히 도망 가지 못하도록 감시받는 게 아니라, 자신이 의사에게 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끔, 그래서 자신이 의사에게 정신병자로 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게끔 감시받아야 한다. 그래야 광인은 주관성의 덫에서 벗어나 정신병자로서 ‘병식’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구빈원이 정신병원으로 개칭되면서 이전에 이뤄지던 각종 징벌장치들에 치유적 의미가 부여되었다. 정신병원의 통치자인 의사는 강제 노동에 교정적, 치료적 의미를 부여했다. 부도덕한 부랑에 대한 징벌이던 수용소 노동이 정신병원의 ‘작업요법’이 되었다. 노동을 통해 시간 엄수를 배우고 작업 규칙을 배우고 분업과 협력 등의 인간관계를 배운다는 것이다. 또한, 노동에 따른 대가를 적게나마 줌으로써 돈에 대한 욕구를 일으켜 현실세계로 유인했다.
또한 ‘도덕요법’이라는 이름으로 세부적인 규칙과 처벌에도 치료적 의미가 부여되었다. 자기 자신의 무질서한 충동에 빠져 있지 않고 현실 세계의 규칙을 알게 되는 것 자체가 치료라는 것이다. 가령, 음식을 아주 적게 주거나 용변을 못 보게 손을 묶어 놓음으로써 생리적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것도 치료의 일환이다. 음식을 얻기 위해, 돈을 얻기 위해, 심지어는 용변을 보기 위해서도 규칙에 복종해야 함을 알게 함으로써 광기의 ‘쾌락원칙’을 포기하고 이성의 ‘현실원칙’을 습득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정신질환자를 수용시설에 ‘격리’ 시켜야 하는 것은 환자 내면에 자유에 대한 열망을, 이제까지는 알지 못했던 새로운 욕구를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라는 논리가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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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미셀 푸코, 이규현 역, 『광기의 역사』, 나남출판, 2003, 141쪽.
2) 절대군주의 구빈원, 나치의 아우슈비츠, 스탈린의 굴락, 그리고 박정희, 전두환 군사독재자의 국토개척단에서 삼청교육대, 형제복지원이 보여주듯 강제수용소는 절대권력의 이상적 통치 공간이다.
3)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은 최초의 반정신의학이라 할 수 있지만, 정신질환의 원인을 ‘무의식적 죄의식’으로 환원시키고 환자의 죄를 고백 받는 분석가(의사)에게 사제와 같은 절대 권력을 부여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4) 『광기의 역사』, 419쪽.
5) 『광기의 역사』, 419쪽.
6) 『광기의 역사』, 425쪽.
7) 『광기의 역사』, 434쪽.
8) 『광기의 역사』, 442쪽. 조현병(調絃病)이란 명칭도 정신을 현악기에 비유한 것이다. 조현이란 ‘현악기의 줄을 조율한다’는 뜻으로, 뇌의 신경망을 조절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2011 신경정신의학 용어집’에 공식적으로 이름을 올린 조현병은 ‘정신분열증’의 새 이름이다. 정신분열증(schizophrenia)은 블로이러Bleuler가 만든 개념으로, 마음(phrenia)과 분열(schizo)의 합성어이다. 이것이 실제 증상을 잘 표현하지도 않고, 환자에게 안 좋은 인상을 심어준다고 2007년 정신분열병 동호회 회원 3천여 명이 정신분열병학회로 ‘정신분열병 병명 개정을 위한 서명서’를 보냈다. 이후 동양인으로는 처음으로 국제정신분열병학회 이사로 선임된 권준수 서울대 교수가 2011년 아시아정신분열병학회에서 이 병의 명칭을 조현병으로 변경한다는 내용을 해외 학자들에게 공식적으로 천명했다. 이 개명의 유일한 장점은 설명을 듣기 전에는 아무도 ‘조현병’이란 단어에서 그 뜻을 유추할 수 없다는 점이다. 확실히 낙인효과는 없다. 그래서 어떤 증상이든 다 갖다 붙일 수 있다.
9) 『광기의 역사』, 448쪽.
10) 『광기의 역사』, 770쪽.
11) 미셀 푸코, 오트르망 역, 『정신의학의 권력』, 난장, 2014, 153쪽.
12) 『정신의학의 권력』, 1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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