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 지식과 실천의 불일치
19세기 정신병원은 ‘규율’이라는 통치이성과 ‘치료’라는 의료 이성이 행복하게(?) 통합된 공간이었다. 정신병원은 각종 정신질환자들을 ‘수집’하여 그들의 정신 ‘질환’을 가까이서 관찰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정신의학은 임상의학적, 질병분류학적 담론으로 광기를 일련의 정신질환으로 정의하고, 분류하고, 묘사했다. 그렇지만 정신의학은 고전주의 광기분석과는 다른 분류 기준을 제시하지도 못했고 새로운 질병을 발견하지도 못했다. 19세기 질병분류학에서 정신질환은 크게 정신병과 신경증으로 구분된다. 정신병은 다시 분열증과 편집증으로 나눠지거나 정신분열증으로 통합된다. 신경증은 강박신경증, 히스테리, 공포증과 같은 기능성(정신) 신경증만 가리키거나 우울증, 신경쇠약 같은 기질성 신경증을 포함하기도 한다. 환각과 망상이 나타나느냐에 따라 심기증과 조증이 독자적인 정신병으로 분류되기도 하고 신경쇠약과 우울증에 통합되기도 한다. 그리고 도덕적 광기나 성적 일탈이 ‘도착증(perversion)’이라는 개념으로 응축되어 오늘날의 충동조절, 품행장애로 이어진다.
이런 임상학적 질병분류는 특정한 행동양상이나 심리현상을 정신 질환으로 명명하고 설명하는 그 ‘담론’ 역량으로 말미암아 정신의학과 정신과 의사에게 엄청난 권력을 주었다. ‘그것은 X 라고 불리는 정신질환으로, 이러저러한 증상으로 특징지어진다.’ 라는 의학 담론은 마치 정신의학과 정신과 의사가 질병의 실체에 관해 알고 있고 지금 그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믿음을 양산했다. 또한 병리해부학의 지식은 광기의 기질적 상관물에 대한 물음, 광기와 신경학적 변형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며 정신의학에 물질적 보증을 주었다. ‘뇌의 전두엽에 이상이 있어서, 어떤 신경전달 물질의 과소, 과다 분비로 인해...’ 라는 식의 설명이 주는 담론효과는 어마어마하다. 정신의학을 과학처럼 보이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지식은 치료적 실천에 쓰이지 않았다.
19세기에 통용되던 대로의 정신의학적 실천은 거대한 정신의학적 질병분류학 혹은 병리해부학적 연구에서 축적되던 지식 혹은 유사지식을 실제로는 결코 활용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정신요양원에서 배분, 즉 환자들을 분류하고 그들을 정신요양원 안에서 분배하며 그들에게 하나의 체제를 부여하고 그들에게 임무를 부여하며 그들이 치유됐는지 아니면 병을 앓고 있는지, 치유가능한지 불가능한지를 언표하는 그 방식은 결코 이 두 가지 담론을 고려에 넣고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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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병원의 환자들은 임상적 분류기준에 따라 분류되지 않았다. 조광증과 만성 우울증 사이의 구분, 조광증과 편집증 사이의 구분, 조광증과 치매 계열 전체의 구분에 관한 임상분류학적 논의는 정신병원의 실제 조직화에 활용되지 않았다. 정신병원 안에서 환자를 구분하는 기준은 진단명이 아니라 치유 가능한 자와 치유 불가능한 자, 얌전한 환자와 동요하는 환자, 순종적인 환자와 말을 듣지 않는 환자, 노동이 가능한 환자와 노동이 불가능한 환자, 벌을 받는 환자와 벌을 받지 않는 환자, 부단히 감시해야 하는 환자와 때때로 감시해야 하거나 혹은 감시할 필요가 없는 환자 등 규율체제의 기준이다.
고전주의 시대 심신 동형론에 따른 생리학적 치료에도 규율의 의미가 부여되었다. 샤워는 더 이상 심신에 신선함을 주는 게 아니라 심리적 효과를 겨냥한 처벌로 활용되었다. 그래서 환자가 열에 들떠 있을 때가 아니라 잘못을 저질렀을 때 샤워 요법을 시행토록 했다. 환자들 머리 위에 냉수를 쏟아 부으면서 자신의 믿음이 망상일 뿐임을 고백하도록 강요한 것이다. 18세기에 회전기계가 발명되었는데 고전주의 생리학에서 회전은 망상에 고정된 정신을 흔들어 자연적 순환을 회복시킨다는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19세기의 회전기계는 처벌의 의미가 강했다. 망상이 나타날 때마다 회개를 강요하며 환자를 실신할 만큼 회전기계에 매달아 돌렸다.
아편팅크나 에트르 등 약물을 이용한 치료도 마찬가지다. 물론 정신과 의사는 불안 때문에 동요하는 상태를 진정 시키기 위해, 혹은 진단을 위해 필요한 의료적 처방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신병원의 규율 체제를 환자의 신체 내부에 직접 주입하는 것이다. 그것은 정신병원의 규율체제가 명령하는 정숙을 보장하는 것이고 그 ‘정숙’을 환자의 신체 내부에 주입하는 것이다. 푸코는 오늘날의 신경안정제 투약도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현행의 신경안정제 사용 역시 이런 유형에 속합니다. 즉 정신요양원의 실천에서 의학적 이론이 가능한 의료적 조치로서 규정했던 것이 매우 신속하게 규율체계의 요소로 전환됐다는 것입니다.2)
물론, 이것은 광기와 매우 근접해 있었던 푸코 자신의 주관적 입장이다. 그럼, 푸코의 반-정신의학을 비판하는 『정신의학의 역사』는 현대 정신의학을 어떻게 묘사할까? 이 책의 저자는 광기에 대한 푸코의 입장을 비판한다고 하면서 정작 『광기의 역사』는 제대로 읽지 않은 듯 푸코의 견해를 왜곡한다. 가령, “푸코는 정신의학이 국가권력에 의해 발명된 것이라고 주장한다.”3)거나 “푸코는 정신질환이란 18세기에 사회적 문화적으로 발명된 것이라고 주장했다.”4)는 진술은 푸코의 『광기의 역사』를 꼼꼼히 읽은 사람이라면 할 수 없는 왜곡이다.
저자는 푸코가 정신질환을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근대 국가권력이 발명한 ‘허구적’ 구성물로 보았다면서 푸코의 정신의학 비판을 맑스의 이데올로기 비판으로 오해한다. 이런 오해는 푸코의 『고전주의 시대 광기의 역사』(1961)가 1965년 『광기와 문명』이라는 제목으로 맑시즘 전통이 강한 영국에서 축약 번역되어 반정신의학의 이론서로 활용된 역사적 상황 때문에 빚어진 듯하다. 하지만 푸코는 한평생 ‘경제체제가 권력 형태를 결정한다,’ ‘지식은 지배 계급의 이데올로기적 구성물이다.’는 맑시즘의 권력이론을 교정하기 위해 노력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오해 덕분에 『정신의학의 역사』는 푸코가 미처 다루지 않은 2차 대전 이후 정신의학의 역사를 좌충우돌 기술하면서 푸코의 입장을 뒷받침할 만한 사례를 맘껏 제시한다.
정신병원의 참상과 약물의 구원
1903년부터 1933년 사이에 미국의 정신질환자 수용시설 환자 수는 14만 3000명에서 36만 6000명으로 두 배 증가했다. 환자 대부분은 수용인원이 1000명 이상인 대형 시설에 수용되어 있었다. 악명 높은 조지아의 밀리지빌 병원은 환자가 8000명이 넘었다. 거기서 의사가 해 줄 수 있는 건 별로 없었다. 도덕요법으로 치유되어 집에 돌아간 사례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 도덕요법은 아무런 교정 효과도 없이 가학증적 쾌락만 증진시켰다. 수면제를 계속 투여하여 계속 잠을 제우는 지속수면 요법, 인슐린을 혈관에 주사하여 혼수상태에 빠지게 하는 인슐린 쇼크로 요법, 전기충격 요법, 뇌의 전두엽 일부를 제거하는 수술 등은 성과보다 정신병원의 악명만 드높였다.
이런 와중에 뜻밖의 성과를 낸 것이 약물치료 분야였다. 오래전부터 해왔던 약물요법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킨 것은 정신병원이 아니라 제약회사의 실험실이었다. 바이엘과 같은 대형 제약회사에서 만든 진정제가 대량으로 쏟아져 나왔다. 이런 식으로 제품화 되어 나온 첫 번째 진정제는 클로랄 하이드레이트였다. 클로랄은 약효와 용량이 비례했고 주사할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이전의 약물보다 선호되었다. 하지만 냄새가 지독했고 먹고 난 후 구취가 끔찍하다는 부작용이 있다. 1937년 항히스타민제들이 발견된 이후 정신병 환자들에게 사용되었지만 효과는 거의 없었다. 그러다 1951년 롱플랑 제약회사가 만든 페노티아진 계열의 항히스타민제 4560RP(롱플랑의 약어)가 조증 환자를 무관심하게 만든다는 게 알려졌다. 제약회사는 나중에 이 약에 ‘클로로프로마진’(Chlorpromazine)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클로로프로마진은 현재까지도 가장 널리 쓰이는 항정신병약물 중 하나로, 우리나라에는 1959년에 도입되었다. 이 약물의 색깔이 빨간 색이기에 흔히 ‘빨간 약’, 혹은 ‘씨피’(CP)로 불린다. 입이 마르고 어지럽고 몸 움직임이 둔해지며 변비, 배뇨곤란이 생기는 부작용이 있다. 19657년에 개발된 신경안정제 할로페리돌(일명, ‘할돌’)은 클로르프로마진과 함께 가장 널리 사용되는 약물이다. 이 약물은 정신분열증세뿐 아니라 조증환자에게도 흔히 사용된다. 리튬도 정신분열증과 조증 증세를 완화시키는 효과가 있어 오늘날에도 많이 쓴다.
약물학을 뒷받침하는 것이 신경생리학, 신경화학이다. 1921년 그라츠 대학의 약리학 교수인 오토 뢰비는 1926년 ‘아세틸콜린’이라는 화학물질이 신경세포 간 자극전달을 중재한다는 걸 알아냈다. 정신과 의사들은 정신분열증이 완화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환자에게 아세틸콜린을 투약했다. 항정신성 약물이 발견되면서 그것의 작용 기전을 연구하는 노력들이 있어왔다. 그런 신경화학 연구도 정신의학계가 아니라 제약회사가 주도했다. 도파민과 세로토닌은 정신 약물학 무용담의 주인공들이다. 룬트대학의 약리학자 아르빗 칼슨과 동료들은 도파민이 신경전달물질임을 확인했고, 쥐 실험을 통해 클로르프로마진과 다른 항정신증 약물이 도파민과 연관됨을 알아냈다.
최근 ‘사이코패스’ 담론 때문에 유명해진 세로토닌은 원래 우울증과 관련해서 발견된 신경전달물질이다. 1950년대 중반 미국국립정신건강연구소는 세로토닌(5-hydroxytryptamine)의 불균형이 일부 정신질환과 연루된다는 걸 발견했다. 1960년 영국 과학자들은 이미프라민을 복용한 우울증 환자의 혈액 내 세로토닌 수치가 급격히 감소했다고 보고했다. 이때부터 세로토닌의 체내 수치를 떨어뜨리는 항우울제 약물 개발이 이뤄졌다. 삼환계 항우울제가 신경세포 간 연접부로 분비된 세로토닌이 신경세포로 재흡수되는 과정을 차단한다는 원리다. 재흡수되는 양이 적을수록 연접부 내의 세로토닌은 증가하고 우울증에 대항하는 기능도 증가하는 것이다. 1974년 제약회사 ‘릴리’는 부작용이 심한 삼환계와는 다른 종류의 항우울제 성분인 ‘플루옥세틴’을 만들었다. 상품명 ‘프로작’이 탄생한 것이다. 프로작은 복용 초기부터 작용하고 치료 용량과 치사 용량의 간극이 커서 안전성 확보도 쉬웠다. 1987년 미국식약청은 프로작의 사용을 승인했다. 프로작은 우울증뿐 아니라 공황장애, 기면증 등 ‘정서장애’ 일반에 작용하는 약으로 널리 알려졌다. 1994년에 프로작은 ‘잔탁’ 다음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약이 되었다.
에드워드 쇼터, <정신의학의 역사>
약물치료의 이율배반
대형 제약회사에 의한 약물 개발과 신경화학은 정신의학의 무너진 명예를 회복시켰다. 신경전달물질의 작용 기전에 대한 설명력 덕분에 정신의학은 ‘과학’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고, 약물의 효과 덕분에 정신과 의사는 ‘치료’ 능력을 확인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약물의 치료능력과 그에 대한 대중의 믿음이 커질수록 아이러니하게 정신병원과 정신과 의사의 역할은 모호해졌다.
수많은 정신과 환자들을 지역사회로 복귀시키게 된, 소위 탈기관화라 불리는 이 사건의 계기가 된 것은 1954년 미국식약청이 클로로프로마진을 항정신증 약물로 허가한 것이었다. 난폭한 환자를 약물로 안정시키고 정신병 증상을 치료할 수 있게 되자, 이론적으로만 본다면, 환자는 정신병이 소진되기를 기다리며 정상적 사회에서 어렵지 않게 살아가, 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 미국의 경우 주립병원과 시립병원의 환자 수가 역사상 가장 많았던 1955년의 55만 9000명에서부터 감소하기 시작하여 1970년에는 33만 8000명으로, 1988년에는 1만 7000명으로 줄어들어, 30년 동안 전체의 80%가 퇴원했다.5)
약물치료의 효과가 커질수록, 그리고 정신의학과 정신과 의사에 대한 대중들의 신뢰가 커질수록 정신병원 장기입원과 정신과 의사의 개입 비중은 줄어들었다. 정신과 의사의 역할은 단지 발병 초기에 통제된 환경에서 약물 치료를 하고, 환자 스스로 약물을 통해 증상을 관리할 수 있게 지도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약물의 대중화는 정신 질환에 대한 대중의 역치를 낮추었다. 과거에는 그냥 넘어가던 행동양상이나 심리상태가 약 먹어야 하는 질환으로 인식될수록 정신과 의사에게는 이롭다. 정신과 의사들은 질병 역치를 낮춤으로써 경쟁관계에 있는 심리학자와 사회사업가들로부터 환자를 끌어오고자 했다. 그래서 톰소여처럼 사내아이들의 한 특성이었던 것이 ‘과잉행동을 가진 주의력결핍장애’(ADHD)로 질병화 되었다. 그렇게 되면 치료 권한은 오직 의사에게만 주어지고, 치료는 우리나라에서 ‘공부 잘하는 약’으로 불린 ‘리탈린’(메틸페니데이트)이라는 유사 암페타민 특성의 약을 처방하는 것이다. 1995년에 미국에서는 리탈린의 처방 건수가 연간 600만 건에 달했으며 250만 명의 미국 어린이들이 이 약을 복용했다.6)
아이들이 공포물을 보고 무서워하는 것은 언제나 있던 일이다. 그러나 전쟁후유증과 관련된 ‘외상성 스트레스 장애’(PTSD) 라는 진단명이 도입되자 <베트맨> 같은 영화를 보고 무서워하는 아이들에게까지 PTSD 진단이 내려졌다. 정신과 의사들은 약물이 잘 듣는 질환으로 진단하려는 경향이 있다. ‘프로작’ 같은 항우울제가 우울증 진단을 증폭시켰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7)
DSM, 정신질환 카탈로그
성격장애진단은 ‘정신의학의 제국 건설을 위한 거푸집’ 구실을 했다. 정신의학은 ‘도착증’이라는 개념을 필두로 ‘충동장애’ ‘행동장애’라는 개념으로 일상생활의 비행들을 질병화 했다. 정신과에서 일단 성격장애라고 진단되면 이후 사태는 정해진 궤도를 따라 진행된다. 정신병원에 수감되거나, 충동이든 뭐든 조용히 억제시키는 약이 처방된다. 여기에 ‘경계선’(borderline)적 □□’, ‘○○스펙트럼’ 같은 새로운 진단명이 생기면서 정신질환은 유행성 전염병처럼 확산되었다.8)
우리나라 정신과 의사들이 정신질환을 진단하는 교본은 1952년 미국 정신의학협회가 처음 만든 <정신질환을 위한 진단과 통계 요람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of Mental Disorder>(DSM)이다. 이 진단 요람이 질병을 포착하는 방법은 “환자가 우울한가? 그렇다면 환자는 (a)우울한 기분 (b)(식욕감퇴, 죄책감 등등을 포함하는) 다음 8개의 증상 중 적어도 5개 이상을 가지고 있을 것. (c)병원에 오기 전에 적어도 1개월 이상 증상이 있어야 우울증으로 진단이 가능하다.”는 식이다. 즉 증상의 내적 구조나 진행과정에 대한 엄밀한 규명 없이 단순 나열된 증상 다발, 즉 ‘증후군’(syndrome)으로 질병을 포착하는 것이다. 이런 방식은 질병의 가지 수를 대대적으로 늘렸다. DSM이 개정될 때마다 질병의 수는 대폭 늘어났다. DSM-III는 265개의 각기 다른 병명을 열거했는데, 이는 DSM-II의 180개에서 3분의 1 넘게 증가한 것이다. DSM-III-R은 292개, 1994년의 DSM-IV는 297개의 병명을 열거하고 있다. 이 자연계에 과연 297가지 정신과 질환이 실재하고 있는 것일까?9)
정신역동에 따라 증상의 구조를 밝히려는 근대 임상의학의 정신은 실종됐다. 대신 DSM은 18세기 백과전서파의 인문정신에 따라 정신질환의 카탈로그를 만들었다. 그래서 다른 문화권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병명도 많고10) 이전에는 질병이었던 것이 질병이 아니게 되고(히스테리, 동성애), 베트남전 참전 군인들의 노력에 의해 ‘PTSD’가 등록되거나 페미니스트들의 요구에 의해 ‘자기패배성 인격장애’(self-defeating personality disorder)의 등록이 취소되는 등 이해 집단들의 주장에 영향을 받기도 했다. 이것은 정신의학이 과학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인간학적 성격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DSM의 질병분류학은 과학(natural science)이 아니라 인간학(human science)이다. 이렇게 분류된 질병마다 각기 다른 약물이 처방되는 것도 아니고, 그에 따라 약물 배합 방식이 결정되는 것도 아니다. 한때 도파민은 정신분열증에, 세로토닌은 우울증에(최근에는 사이코패스에) 일대 일로 대응한다는 주장도 있었지만 깨진지 오래다. 인간의 뇌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어떤 약을 얼마만큼 썼더니 어떤 증상이 억제되더라는 것은 순전히 경험적인 지식으로, 그야말로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비가시적인 질병의 실체를 더듬는 임상의학적 시선처럼) 장님 코끼리 만지는 식이다.
정신의학의 솔직함을 위하여
정신의학의 인간학 백과사전, DSM
정신과 의사들이 ‘그로테스크’ 하게 보이지 않으려면 솔직함이 필요하다. 그들의 책꽂이 꽂혀 있는 양장본 DSM-V는 정신질환 카탈로그이고 그 속에 있는 300여 가지 정신질환에 대한 지식은 ‘인간학’ 지식이라는 사실에 솔직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자기가 처방하는 약물이 어떤 질병에 어떤 기전으로 작용하는지의 지식은 과학이 아니라 경험의 축적에 의한 것이라는 데 솔직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제발 정신질환의 원인은 △△신경전달 물질이 과소분비 되어서라는 식의 환원론적 담론으로 대중을 기만하지 말자. 술 먹고 정신이 혼미할 때 그 혼미함의 원인을 술 먹은 데서 찾지 뇌의 도파민에서 찾지 않는 것처럼, 뇌의 신경학적 상태는 최종 원인이 아니라 다른 원인의 ‘결과’이기도 하다. 정신질환 양성증상을 약물로 억제시키는 것은 원인 ‘치료’가 아니라 대증요법이나 ‘관리’일 뿐이라는 사실에 솔직해지자.
춤을 춤으로써 마약할 때와 동일한 신경생리학적 상태를 얻을 수 있듯이 ‘할돌’이나 ‘프로작’이 아니라 이를테면 춤추는 것과 같은 어떤 새로운 활동을 하거나, 인간관계를 바꾸거나, 생활 환경을 바꿈으로써도 우리의 뇌는 신경학적으로 개선된 상태를 얻을 수 있다. 물론, 약물 복용이 훨씬 간단하고 효과도 빠르지만, 그만큼 생리학적 부작용도 많고 사회적 활동력이 저해되는 부작용도 크다. 약은 거들뿐, 회복에 이르는 길에는 무수한 개인적 활동요인, 사회적 환경 요인, 문화적 변화 요인들이 있다.
무엇보다 약물치료밖에 해줄 게 없다면 정신병원 입원은 최소화되는 게 맞다. ‘나가면 갈 데가 없다.’거나 ‘나가면 범죄자 된다.’는 말은 제발 안 했으면 좋겠다. 그건 ‘의사’로서, DSM과 약리학 교과서에 근거해서 할 말은 아니지 않은가? 치료도 하고 사회복지도 하고 사회 안전도 지킨다는 얼토당토않은 책임감은 제발 갖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 책임감만큼 권력이, 그 권력만큼 경제적 보상이 뒤따른다는 걸 안다. 하지만 현대 정신의학의 지적 역량과 인간학적 특성에 비해 그 책임감과 권력은 터무니없이 크며, 거기 매달리는 의사의 모습은 너무 그로테스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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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정신의학의 권력』, 196쪽.
2) 『정신의학의 권력』, 262쪽.
3) 에드워드 쇼터, 최보문 역, 『정신의학의 역사』, 바다, 2009, 25쪽.
4) 『정신의학의 역사』, 446쪽.
5) 에드워드 쇼터, 최보문 역, 『정신의학의 역사』, 바다, 2009, 454~455쪽.
6) 『정신의학의 역사』, 474쪽.
7) 『정신의학의 역사』, 476쪽.
8) 『정신의학의 역사』, 479쪽.
9) 『정신의학의 역사』, 494쪽.
10) 『정신의학의 역사』, 495쪽. “신경성 식욕장애와 같은 질병은 세계 일부 지역에서는 알려져 있지도 않은 병이다. 만일에 DSM-III 초안이 인도에서 만들어졌다면 악마 빙의가 큰 부분을 차지했으리라고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 경계선적 성격이나 자기애적 성격은 아이오와 주나 이동주택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또 분명히 말하건대, 모로코 북부 도시 탕헤르나 루마니아 수도 부쿠레슈티에서는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