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에 떠오른 자식을 인천 길병원에 데려다 놨는데, 공권력이 병원 문을 다 때려 부수고 쳐들어와서 덕인이 시체를 탈취해갔습니다. 그러고는 아버지 어머니가 살아있는데 즈그들 마음대로 내 자식을 국과수로 가져가서 갈가리 찢어가지고, 내 아들 뱃속에 내장도 다 빼내어버리고 고깃덩어리 마냥으로 사방으로 찢어서 부모 앞에 내던졌어요. 그들 자식들도 갈가리 찢어서 솥에다 넣고 삶아 먹는데도 내가 분이 안 풀립니다. (...) 내가 우리 아들 한을 풀어야 저 세상에 가겠습니다. 문재인 대통령님께서 우리 아들 한을 좀 풀어주시오. 내가 어떻게 눈을 감을 거이나.”
목소리가 점점 격앙되어가던 김정자 씨(75)는 결국 선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그동안 꾹꾹 참아왔던 설움을 터뜨리며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아들을 잃은 지 벌써 23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아들은 여전히 23년 전 상의가 벗겨지고 두 손이 묶인 채 바다에서 떠오른 그 모습 그대로, 어머니의 가슴에 박혀 있었다. 김 씨는 다시금 억울함을 호소하고자 23일, 상처투성이 가슴을 안고 청와대 앞에 섰다.
故이덕인 열사의 어머니 김정자 씨가 아들의 사연을 말하다 붇받쳐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주저앉고 말았다.
1967년 전남 신안군에서 태어난 김 씨의 아들 故이덕인 열사는 어린 시절 탈골로 인해 장애를 갖게 되었다. 먹고 살기 위해 95년 6월부터 인천 아암도 해변에서 노점상을 시작했다. 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자행되는 인천시의 단속정책으로 장사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같은 해 3월, 서울 서초구청 노점단속에 항의하던 장애인 노점상 최정환이 분신 사망한 사건이 있을 정도로 당시 정권의 노점 탄압은 극에 달해 있었다. 정권의 칼날은 결국 아암도 해변에까지 뻗쳐 왔다.
인천시는 2억 2천만원을 쏟아부어 용역회사 ‘무창’을 동원, 용역깡패 200여 명과 경찰병력 6개 중대 830여 명으로 아암도 노점단속을 단행했다. 마침내 11월 24일, 공권력과 철거용역 등 1500여 명이 아암도의 노점상을 철거하기 위해 난입하자, 30여 명의 노점상, 장애인은 망루에 올라 고공농성을 시작했다. 그러나 공권력은 혹한의 추위에도 불구하고 소방차를 동원해 물대포를 쏘며 진압을 시도했다. 망루 농성자 중에는 당뇨병 환자도 있었지만, 의약품은 물론 일체의 식수와 음식물을 차단당했다.
농성에 참여했던 이덕인 열사는 25일 외부와의 연락을 취하기 위해 망루 탈출을 시도한다. 그러나 그는 3일 후인 28일, 처참한 모습을 하고 바다 위 시신으로 발견됐다.
아암도 해변에 시신으로 떠오른 故이덕인 열사. ⓒ장애해방열사 단
공권력의 잔혹한 모습은 그의 사망 직후 더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유족 측이 시신 부검을 하루 늦출 것을 요청했음에도, 경찰은 29일 새벽 4시 45분경 공권력 1500명을 투입, 콘크리트벽과 유리창을 뚫고 영안실에 난입해 고인의 시신을 탈취한다. 이 과정에서 대학생 40여 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게다가 경찰은 고인의 친형인 이덕창 씨에게도 폭행을 가해 강제로 부검에 입회시켰다. 시신을 국립과학수사연구소로 가져간 경찰은 1시간 50분 만에 시신의 장기와 뇌, 그리고 상처 부위 등을 도려내고 유가족에게 돌려주었다.
유족은 그의 억울한 죽음을 호소하고자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이에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경찰의 행위가 위법한 공권력 행사였으며, 명예회복과 보상, 재발방지 대책이 필요하다고 결론 내렸다. 그러나 2008년 민주화운동명예회복보상심의위원회는 그의 사망이 민주화운동과 관련한 사망으로 볼 수 없다고 못 박았다. 그 후 이들 위원회가 소멸되어 이덕인 열사의 명예회복을 위한 길이 완전히 막혀버렸다.
민주노점상전국연합 등 8개 단체는 23일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이덕인 열사 의문사 진실규명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 당시 과거사 진상규명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그러나 이를 위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기본법’(아래 과거사법) 개정안은 국회에서 1년 넘게 잠자고 있다.
한국전쟁전후민간인피학살자유족회 등 단체들은 지난 5월 3일 광화문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삭발식을 감행하며, 과거사법 개정안의 조속한 통과를 촉구했다. 이 자리에 이덕인 열사의 아버지 이기주 씨(83)도 함께했다. 그러나 국회는 여전히 정쟁에 빠진 채 과거사법은 안중에도 없다. 결국 유족은 답답한 마음을 안고 청와대로 향했다. 23일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열린 ‘이덕인 열사 의문사 진실규명 및 명예회복 촉구’ 기자회견에는 민주노점상전국연합,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등 8개 단체가 함께했다.
장남수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아래 유가협) 회장은 “이덕인 열사는 옷이 벗겨지고 두 손이 묶인 채 바다에 떠올랐다. 자기 혼자 그런 상태로 바다에 들어갈 수 있겠나”라며 “이건 분명한 공권력에 의한 살인”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공권력은 이를 은폐하고자 그의 시신을 갈가리 찢어놓았다. 관련자들을 반드시 처벌하고 민사소송까지 가서 응분의 보상을 받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덕인 열사가 가난한 장애인 노동자였기에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 더 늦어지고 있다는 분노의 목소리도 나왔다. 인천에서 노동자로 근무하던 중 86년 6월 대공수사과 형사들에게 끌려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신호수 열사의 아버지 신정학 씨는 “의문사 사건 중 학생이었던 사람들은 같이 운동한 동지들이 증언해주는 게 있으니까 (충분한 진상규명은 안 되어도) 명예회복은 어느 정도 됐다. 그러나 노동자라는 사람들은 한 사람도 밝혀진 게 없고 명예회복도 안 됐다”면서 “이덕인은 먹고 살기 위해 장사하다가 공권력에 의해 타살당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그의 억울함을 빨리 풀어주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창훈 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연대회의 집행위원장은 “지난해 2월 강북구청 노점상 박단순 님이 구청 단속반원에 의해 어이없는 죽음을 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지금도 노점상들은 권력의 눈치를 보며 힘겨운 삶을 살고 있다”면서 “이덕인 열사 죽음의 진실을 밝히는 것은 더 이상 이러한 비인간적인 행태가 계속되지 않도록 하는 일이기도 하다. 문재인 정부는 촛불정권 답게 진실규명 요구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한편, 기자회견 이후 유족과 참가자들은 청와대 민원실에 이덕인 열사 진실규명을 촉구하는 진정서를 접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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