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청소년개척단 작업광경 (1962년) ⓒ국가기록원
이 사진을 보라. 등에 지게를 진 사람들이 허리를 숙인 채 일렬로 이동하고 있다. 대개는 흰 모자를 쓰고 있어서 얼굴은 가려졌고 신발은 고무신 아니면 맨발인 듯 보인다. 꽤 규모가 큰 공사를 진행하고 있는 것 같은데, 사람만 보일 뿐 공사 장비 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
국가기록원 홈페이지에서 검색만 하면 바로 볼 수 있는 이 사진은 1962년 대한청소년개척단(일명 서산개척단) 작업광경이다. 사진사는 대체 이 사진을 통해 무엇을 전달하고 싶었던 것일까? 사진 속 사람 중 고개를 들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당장이라도 땅 아래로 푹 꺼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인다. 사진사는 사람들 한 명 한 명보다 대열의 규모를 드러내는 데 관심이 있어 보인다. 카메라 앵글 안에서 사람들은 그저 공사의 규모를 보여주기 위한, 회색의 정물에 지나지 않았다.
노무현 정부 당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는 서산개척단 사건에 대해 한 차례 조사한 바 있다. 자신의 친형이 개척단에 끌려가 사망했다는 진정 내용을 접수하고 조사를 시작했는데, 당시 수집된 관련자들의 증언은 다음과 같다. “부산 자갈치시장 하숙집에서 친구 6명과 잠을 자다가 해병대와 순경에 의해 수용됐다”, “부산에서 넝마주이 생활을 하다가 사복 입은 군인들에 의해 강제적으로 개척단에 수용됐다”, “경찰에 의해 서울시립아동보호소에 있다가 자신의 의사와 관련 없이 강제적으로 개척단에 수용됐다”. 하지만 위원회는 진정된 사망사건에 대해서는 증거 부족을 이유로 2010년 6월 ‘진실규명불능’ 결정을 내리고 말았다.
그 이후로 8년, 아니 사건이 벌어진 날로부터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들의 목소리는 저 흑백 사진 안에 갇혀 있었다. 5.16쿠데타 직후 조직된 서산개척단에 강제동원 된 사람 수만 1700여 명이다. 부랑아·깡패 등을 수용해 자활정착을 도모한다고 했으나 실상은 간척사업에 강제로 동원하는 것이었고, 여성들도 납치해 와 남성 단원과 강제결혼을 시켰다. 개척단이 해체된 후에도 단원 중 일부는 염전을 개간하면 농토를 나눠준다는 말을 믿고 서산에 계속 살았지만, 정부는 모르쇠로 일관하며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 기막힌 진실이 한편의 다큐멘터리 영화에 담겨 나왔다. 24일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서산개척단>(감독 이조훈)이다.
영화 <서산개척단> 포스터.
이 영화가 반가운 것은 단지 서산개척단이라는 국가폭력을 폭로했기 때문이 아니다. 폭로는 이미 지난해 <오마이뉴스>의 연속보도, 올해 SBS <그것이 알고 싶다> 보도를 통해 이뤄졌다. 이 영화가 돋보이는 점은 국가폭력의 폭로보다 이를 전달하는 방식에 있다. 영화는 피해자를 제3자적 거리에서 묘사하기를 그만두고 그들이 영상의 무대 위에서 직접 말하게 만든다. 이는 매우 중요한 변화다.
근래 들어 형제복지원, 선감학원 등 군사독재 시기 존재했던 각종 부랑인 시설에 대한 폭로가 각종 시사보도 프로그램에서 많이 보도되고 있다. 그런데 이들 보도는 주로 ‘후리가리’라 불리는 경찰의 자의적 부랑인 일제단속의 폭력성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다 보면 자연히 “나는 부랑인이 아니었다”는 피해자 증언에 힘을 실을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이것이 ‘양날의 칼’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 부랑인이었거나 연고자가 없는 사람, 또는 소위 ‘건달’ 생활을 한 사람의 경우, 경찰의 단속 자체는 불가피했다는 논리를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논리 위에서라면, 이들은 어떤 식으로든 원거주지를 박탈당하고 시설생활을 해야만 하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결국 피해자는 집단적 시설생활 속에서 그나마 좀 더 인간다운 생활 정도만을 요구할 수 있는, 지극히 수동적인 존재로 그려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영화 <서산개척단>은 ‘악마 같은 가해자’ 대 ‘순수한 피해자’라는 익숙한 서사 구도를 택하지 않았다. 영화는 피해자 정영철 씨가 단원들 사이에서 이뤄지던 위계에 의한 폭력을 증언하며 했던 발언, “니도 깡패였고 나도 깡패였는데” 같은 말을 어떤 윤색도 가하지 않고 그대로 전한다. 증언자 중에는 스스로 자신이 개척단 내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했다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그는 중간관리자였다. 그처럼 영화에 등장한 몇몇은 피해자이면서 또 얼마간은 가해자이기도 했다. 그런데 영화는 결국 그의 눈물까지 담아낸다.
당시 개척단 내에서 자행된 폭력을 재연하는 방식도 색다른 지점이다. 시사보도 프로그램의 특성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이겠으나, 보통 <그것이 알고 싶다>, <추적 60분> 등에서는 재연배우들을 써서 당시 폭력을 재연하는데, 다소 작위적이기도 하고 부자연스러운 측면도 적지 않아 관객의 충분한 감정이입을 방해하고는 한다. 그것은 배우들의 연기가 미숙해서라기보다는 진행자가 선생님처럼 끊임없이 설명하는 ‘전지적 작가 시점’ 탓이 크다.
그러나 영화는 나레이션 없이 나아가면서, 대신 피해자가 과거의 기억과 직면하는 과정에 관객을 끌어들인다. 지난해 대학로 무대에 오른 연극 <언덕을 오르는 마삼식을 누가 죽였나>(이 연극은 서산 출신의 국문과 대학생이 자기 고장의 일을 바탕으로 극본을 쓴 것이라 한다)를 피해자들이 직접 관람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영화는 무대의 모습과 피해자들의 떨리는 눈빛을 교차해 보여준다. 과거 증거 자료를 찾는 것도 피해자들의 손에 맡긴다. 국가기록원 충남기록관에 보관된 옛 기록들을 피해자 손으로 직접 넘기는 장면을 바라보며, 관객은 ‘전지적 시점의 제3자’가 아닌 피해자와 동등한 시점에서 사건을 보게 된다. 냉소적인 관객의 눈이 만들어내기 쉬운 ‘객관주의’의 장벽도 이 시점의 동등함을 통해 일정 정도 무너진다.
그간 이런 주제를 다룬 언론의 보도들은 주로 ‘폭로’에만 신경을 썼다. 그래서 ‘충격’, ‘공포’, ‘경악’ 같은 단어들이 제목을 윤색하고는 한다. 그러나 지구 반대편 가난한 나라의 폭격으로 무너진 마을의 영상을 아무리 많이 보더라도 어느 시점에는 둔감해지는 게 오늘날 사람들의 심리다. 이미지가 충격적일수록 그에 따른 역치도 늘어나는 법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국가폭력의 증언이 담고 있는 가해자의 악마성에 비례해 사람들의 공감이 고조되는 것도 아니다.
피해자를 그저 노예화된 회색의 인간으로 묘사하는 것은 국가가 직접 남긴 일렬종대의 저 자료사진의 시선과 다를 바 없다. 가해자의 악마성을 직시하고 피해자의 가련함을 동정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동료-시민’으로서 그들의 역동적 삶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우리와 그들 사이의 심리적 거리를 좁히는 일이다.
영화 <서산개척단> 예고편 중 한 장면.
그런 점에서 영화 <서산개척단>에는 피해자들의 명과 암을 동시에 드러내는 것을 피하지 않는 담대함이 있다. 물론 영화는 박정희, 김종필 등 당시 권력자들이 이 사건을 어떻게 기획했고 자신의 권력 확장을 위해 활용했는지도 빠짐없이 전달하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개척단에 오기 전, 어떤 이는 피난 열차에서 떨어져 가족을 잃은 고아였고, 또 다른 이는 동네 건달이었다. 당연하게도 이 사실들이 그들의 고통을 반박할 수는 없다. 또한 그들은 군사독재에 의해 수탈당한 ‘무고한 양민’에 머무르지 않고, 개척단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며 저항했던 ‘시민 됨’의 삶을 살았다. (스포일러가 되지 않기 위해 여기서 설명을 그치지만) 그들의 저항은 우리가 기억하는 그 어떤 민주화운동에 견주어도 그 의미가 작지 않다고 확신한다.
영화는 과거의 개척단원들이 청와대 앞에 모여 진상규명을 청원하는 모습으로 마무리된다. 영화는 그렇게 마무리되지만, 피해자와 우리 ‘동료-시민’들에게 그것은 또 다른 시작이어야 한다. 단지 국가가 사과하고 배상할 것을 요구하는 것을 넘어, 50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들의 육체와 정신에 아로새겨진 상처를 우리 사회가 함께 보듬어 달래는 ‘시작의 선언’이어야 한다. 이 영화와 함께 많은 시민들이 선언에 동참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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