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안 염전 노예 사건' 이후에도 장애인 학대 사건이 끊임없이 드러나고 있다. 학대 피해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지원 체계 마련에 대한 요구가 커짐에 따라, 장애인복지법에서도 '학대 피해 장애인 쉼터'를 규정하고, 쉼터 시범사업을 진행하는 등 피해자 지원 체계 마련이 시작 단계에 접어들었다.
오랜 시간 학대 피해 장애인을 지원해온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아래 연구소)는 학대 피해 장애인이 다시 가해자에게로 돌아가거나, 학대 상황에서 벗어난 이후에도 '행복한' 삶을 살지 못하는 상황을 접하며, 학대 피해 장애인 지원 체계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 그 고민의 결과로, 연구소는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지원을 받아 3년간 학대 피해 장애인 지원 사업을 했다. 복지부에서 진행한 '장애인 쉼터 시범사업'과는 별개로 진행되어온 이 사업은 올해를 끝으로 막을 내린다.
연구소는 23일 오후 사회복지공동모금회 강당에서 '사람중심의 학대 피해장애인 지원방안 및 쉼터운영방안 토론회'를 열고, 3년간 학대 피해 장애인 지원 사업을 하며 쌓아온 경험과 이에 기반을 둔 과제를 공유했다.
김강원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실장.
- 학대 피해 장애인 지원,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특례법이 필요하다
연구소는 학대 피해 장애인 지원 사업을 통해 '장애인 학대'에 대한 이론적 기반 마련에서부터 '위기거주 홈'을 통한 지역사회 내 다양한 자원 연계 및 자립 지원을 진행했다. 서울, 경기, 전남, 경북 4개 지역에 만들어진 학대 피해장애인지원센터는 장애인 학대 사건이 발생하면 피해자를 긴급 분리하여 긴급 생계비를 지원하고, 의료지원과 법률지원, 심리지원 등을 한다. 이후 피해자에 대한 자립지원계획을 수립하고, 피해자는 위기거주 홈으로 입주하게 된다. 위기거주 홈에서는 짧게는 6개월, 길게는 1년 동안 머물며 지역사회 자립생활을 위한 지원을 받는다.
김강원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실장은 이번 사업을 통해 '장애인 학대'에 대한 이론적 기반을 마련하고, 경찰청과 협조해 학대 피해 지원 인력을 양성하고 있으며, 사업지역 내에 학대 대응을 위한 네트워크 구축 등의 성과가 있었다고 소개했다. 김 실장은 "이러한 사업 성과가 이후 학대 피해 장애인 지원 체계에 잘 녹아들어 갈 수 있어야 할 것"이라고 전했다.
사업의 또 다른 의의는 앞으로 사회적으로 마련해야 할 과제가 분명해졌다는 것이다. 김 실장은 학대 피해 장애인 지원의 실효성을 거두기 위해 '피해자 통합지원센터' 설립, 거주시설과 차별화된 피해자 쉼터 마련, 자립지원 필요 등과 더불어 '특별법 제정'을 과제로 제안했다.
김 실장은 "현재 장애인 학대에 관한 모든 규정은 '장애인복지법'에서 규정하고 있다"라며 "그러나 복지에 관한 기본법에서 범죄에 대한 처벌과 피해자 지원에 관한 상세한 내용을 담는 것은 법체계상 적절하지 않다"라고 지적했다. 이에 김 실장은 "성폭력과 가정폭력은 가해자 처벌과 피해자 지원이 별도 특례법으로 제정되어 있고, 아동학대 처벌 특례법도 마련되어 있다"라고 설명하며 "학대 피해 장애인의 실효적 지원을 위해 특별법 제정이 필요하다"라고 강조했다.
강남수 경기남부지방경찰청 경위는 다양한 장애인 피해 사건을 지원해오며 특히 학대 피해 장애인에 대한 법적 공백을 느껴왔다고 밝혔다. 강 경위는 "성폭력이나 아동학대 사건의 경우 진술조력인, 진술녹화 속기록, 국선변호인 선임, 신뢰관계인 동석 등 지원이 법에 규정되어 있지만, '염전 노예 사건' 같은 학대 피해 장애인의 경우 이러한 법 규정이 없는 상황"이라면서 "이 때문에 진술조력인이나 속기사, 또는 변호사 지원을 피해자가 자부담하거나 수사관들이 수사비용으로 충당하기도 한다"라고 전했다.
그뿐만 아니라, 장애인 학대 사건에서는 응급조치와 임시조치(가해자 접근금지), 주소지 비공개 등 가해자로부터 피해자를 분리할 수 있는 제도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 강 경위는 "의사소통이 어렵고, 피해 진술이 쉽게 오염될 수 있는 지적장애인의 경우, 응급조치와 임시조치 제도가 절실히 필요하다"라며 "하지만 현재 학대 피해 장애인 지원을 규정하고 있는 장애인복지법에 이러한 내용을 담기에는 한계가 있다"면서 법적 제도 보완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강남수 경위(왼쪽)와 황상연 실장(오른쪽)
- 피해자 지원 넘어 지역사회에서 당사자가 살아갈 수 있는 ‘생태계’ 만들어야
위기거주 홈은 학대 피해 장애인이 실제로 거주하며 지역사회 내 자립을 준비하는 공간이다. 황상연 위기거주 홈 실장은 "오랫동안 고된 노동과 폭력, 인권유린에 노출되었던 피해자들이 지역사회에서 자신의 삶을 구축해나가려면 한정된 기간 일방적으로 프로그램을 제공받는 것으로는 부족하다"라고 설명했다.
황 실장은 "실무 지원하며 느낀 것은, 피해자가 위기거주 홈에서 자립생활에 필요한 많은 연습과 경험을 축적했더라도 익숙하던 위기거주 홈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주거공간을 마련하고, 단독생활을 시작하면 또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는 것이었다"라며 "자신의 개성과 취향에 따라 일상이 만들어지기까지 위기거주 홈은 피해자들이 언제든 방문할 수 있는 '사랑방' 같은 곳으로 남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라고 밝혔다.
이번 사업에서 연구소는 자치단체, 경찰, 권익옹호기관, 복지관, 장애인자립생활센터, 장애인고용공단 등이 함께 참여한 '장애인학대대응공동위원회'를 꾸려 운영했다. 특히 위기거주 홈과 영등포장애인복지관, 그리고 이음장애인자립생활센터는 지역사회에 피해자의 '자리'를 만드는 데 주력했다.
황 실장은 "피해자에 대한 지원뿐만 아니라, 지역사회에서 피해 당사자가 살아갈 수 있는 '생태계'를 잘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피해자들이 학대 상황에서 벗어나 자립해 살아가야 하는 지역사회에도 여전히 장애인 혐오가 존재한다"라며 "지역사회 곳곳에 장애인 편의시설을 비롯하여 접근권을 증대하는 것부터, 장애인을 이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회의 인식을 바꿔나가는 것까지, '생태계'를 만들어나가는 지원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라고 전했다.
이규식 이음센터 소장 역시 "위기거주 홈에서 거주할 수 있는 기간이 6개월 정도로 짧고, 이후 연계가 약속된 주택이 없는 것이 문제"라고 꼬집었다. 이 소장은 "6개월은 학대 피해 장애인이 지역사회에 적응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라며 "6개월 동안 겨우 지원받을 수 있는 서비스를 확인하고 이제 막 연계되어 지역사회에서 생활하려고 하는데, 위기거주 홈에서 나오게 되면 그 사람은 어디로 가야 하나"라고 되물었다. 그는 "쉼터 거주 기간이 끝난 후 해당 구에 있는 자립생활주택으로 들어가 생활할 수 있다면 지역사회 적응 및 정착이 더욱 쉽고 안정감 있게 진행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