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차별철폐의 날’을 하루 앞둔 지난 4월 19일, ‘2018년 420장애인차별철폐공동투쟁단’ 소속 77명의 지체·뇌병변장애인들이 광화문사거리에서 효자로 입구까지 문재인 대통령 면담을 요구하며 오체투지를 했다. 이 거리를 내비게이션에 검색하면 250미터, 도보 4분이라고 뜨나, 장애인들은 이 거리를 2시간 30분 동안 기었다. 장애인의 속도는 이 세계의 속도와 너무도 달랐다. 자신의 장애를 적나라하게 내보이며 기어가는 행위가 어떻게 ‘구걸하는 행위’가 아닌 치열하게 싸우는 행위가 될 수 있었던 걸까. 오체투지를 기획하고 참여한 이들을 만나 이날의 현장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 순서
[서문] 2018년 4월 19일 오체투지, 그날을 말하다
① 문애린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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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9일, 문애린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 활동가가 경찰의 저지선을 뚫으며 기어가기 투쟁을 하고 있다. ⓒ최인기
2006년도에도 기고, 2012년 8월 농성 들어가기 전에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 알려내기 위해 420(장애인차별철폐의 날) 때 종각역에서도 잠깐 기었죠. 그땐 대대적으로 사람들을 조직했던 건 아니에요. 그때 이후로 6년 만에 다시 긴 거죠.
사실 기는 투쟁이 보는 사람도 힘들고, 준비하는 사람도 힘든 거잖아요. 더구나 기어가는 몸을 보여줘야 하는 당사자는 복잡한 마음이 들죠. 이런 말이 있잖아요. “우린 장애를 가진 몸 밖에 없다.” 숱한 집회와 농성을 하면서도 결국 장애인들이 기어간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봤을 땐 최후의 절망, 절규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고, 어떤 면에선 자신의 의지를 한 번 더 다지는 것이기도 하고, 장애인들이 이곳 대한민국에서 살아있다, 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고.
중증장애인 몸이 바르지가 않잖아요. 심한 장애로 근육 뒤틀림이 심해서, 다들 앉아있는 모습이 삐뚤삐뚤하기도 하고, 어떤 분들은 누워있기도 하고. (사회는) 이런 분들 보면 불편한 감정이 있는데 이 때문에 (장애인을) 온전히 바라보지 못하는 거지. 그동안 장애인은 불편한 사람으로 인식되어 왔기에 내가 도와주지 못하면 불편하고 외면하고 싶은 거죠.
솔직히 내 신체의 일부와 같은 휠체어나 보장구를 두고 바닥에 내려온다는 것이 저 같은 경우는 되게 (침묵) 챙피해요.(웃음) 나의 보여주기 싫은 모습들을 보여주는 거잖아요. 내가 어떤 모습으로 기어가는지, 기어갈 수 없으면 온몸으로 굴러가는데 이렇게 해서라도 내 나름대로는 움직이는 거잖아요. 비장애인은 걸음으로 움직이는 거라면 장애인은 기어가거나 굴러가거나,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활동보조인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움직이는 거거든요. 그런데 이걸 비장애인처럼 걸음을 반듯하게 걸어서 활동하는 것과 같이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보는 사람은) 불편한 감정이 드는 게 아닐까. 사실 저조차도 나의 이런 기어가는 모습이 비장애인들 걸어가는 것과 같은 거라고 생각하기가 쉽지 않죠.
이번에 기어간다고 했을 때 전 반대했어요. 그런데 제가 서울장차연(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 활동가고 조직해야 하잖아요. 공식적으로 반대하진 않았는데 혼자서 고민은 많았어요. 그런데 제가 고민하는 순간, 사람들 조직하기가 되게 어렵겠더라구요. 우리가 왜 이 투쟁을 해야 하는지, 왜 굳이 기어가야 하는지 이야기해야 하는데 저 자신이 먼저 동의하지 않는다면 상대방 동의도 얻을 수 없는 거잖아요.
전장연(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에 장애인 활동가가 그렇게 많지도 않고, 더구나 오체투지 할 수 있는 활동가들이 많이 없어요. 그 안에서 장애인 활동가들이 해야 할 역할이 있다고 생각해요. 장애인 동료들이 바닥에 내려오면 같이 바닥에 내려오고, 단식하면 같이 단식하고. 같이 한다는 연대감을 쌓아가는 게 되게 중요하거든요. 그렇지 않으면 아무도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아요. ‘중앙에선 누가 기어?’라고 묻는데 길 사람 없다고 하면, 같이 단식할 사람 없다고 하면, 아무리 내가 여기에 동의한다고 하더라도 누가 하겠어요. 그런 차원에서 박경석 대표(전장연 상임공동대표)도 같이 내려왔다고 생각해요. 나도 장애인 당사자고, 나도 한다. 저도 똑같은 마음에서 내려온 거거든요. 앞으로 더 많이, 더 힘든 투쟁들을 만들어 가야 하고, 그러면 반드시 장애인 당사자들을 조직해야 하는데 내가 먼저 보여줘야 줘. 저는 그게 최소한 전장연에서 활동하는 장애인 활동가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보는 게 힘들다고 해서 우리가 투쟁을 안 할 순 없잖아요.
- 기어가는 순간 펼쳐졌던 몸의 다양성
무릎보호대랑 장갑 꼈는데 무릎보호대가 온전히 고정되는 게 아니에요. 기다 보면 내려가기도 하고 올라가기도 하고, 몸의 쓸림이 있어요. 긴다고 해도 두 무릎으로 기는 게 아니라, 어떤 분들은 엉덩이로 앉아서 한 손으로 쭉쭉 옮기고 어떤 분들은 (엎드려서) 팔꿈치 힘으로만 움직이기도 하고. 온몸에 무릎보호대 한다고 해도 온몸에 상처가 다 나기 마련이거든요. 쓸리고 멍들고 까지고. 이런 것들 때문에 힘들고 체력이 점점 떨어지더라구요.
(휠체어에서) 내려온 순간 시선의 위치가 바뀌어요. 위에는 시민들, 활동가, 경찰이 서 있는데 위를 쳐다볼 수 없는 거예요. 내 시선은 오로지 기어가는 바닥과 주위에 기어가는 사람들, 안 볼래야 안 볼 수가 없거든요. 그래서 전 옆에서 나와 같이 열심히 기어가는 사람들의 얼굴들을 하나하나 본 거 같아요. 그 얼굴들 봤을 때 (긴 침묵과 깊은 한숨) 되게 많이 복잡미묘했어요. 화나기도 하고, 속상하기도 하고, 힘들기도 하고. (침묵) 그만했으면 싶기도 하고. 복잡미묘했어요.
이 사람 움직일 때 행동할 때 표정이 어떤지, 몸의 각도가 어떤지 그런 걸 좀더 자세히 볼 수 있었어요. 그래서 뭐랄까, 음… (긴 침묵) 그냥 뭐, 이 사람들이 좀더 내 눈에 들어오는구나. 내 눈에 들어오는구나… 아, 저 사람은 이런 모습도 있구나, 저렇게 하는구나. 힘들어하는 모습도 들어오고. 숨이 헉헉거리는 소리도 들려오고. 또 한편으로는 재밌다.(웃음) 처음에는 사람들이 쌩쌩하잖아요. 그런데 중간쯤에 힘들어서 헉헉거려요. 그러면서 옆에 있는 동료에게 말 걸고, 어떤 사람이 등을 기대면 자신도 힘든데도 불구하고 등을 빌려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 하나 그만두지 않는 것을 볼 때 그래, (우리) 잘하고 있구나. 그런 뿌듯함.
인천에서 온 명호랑 은아씨가 특히 기억나요. 이분들은 거의 활동보조인에 의해서 옮겨 다녔는데도 불구하고 끝까지 우리와 함께 하는 모습이 되게 즐거웠어요. 이 사람들한테는 그렇게 하는 게 기는 방식인 거잖아요. 그렇죠. 사람은 다 다른데. 어떻게 똑같은 모습으로 길 수 있겠어요. 이런 장애인의 다양성, 다양한 삶을 가지고 여기서 살고 있다. 그런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시민분들한테. 사회는 장애인을 동일하게 보거든요. 그런데 같은 신체장애일지라도 몸의 다양성이 다르고, 같은 정신·발달장애여도 특성이 다 다르잖아요. 특성에 따라 필요한 것도 다른데 사람들은 동일한 시선에서 똑같은 것만 주려고 하고 하니깐, 그 똑같은 것도 잘 안 주려고 하지만. 우리도 너희와 같다. 너희도 똑같은 사람 없지 않으냐. 당신들의 신체구조가 다양하듯 장애인들도 다 다양하다, 이런 거.
오체투지를 하다가 잠시 쉬는 문애린 활동가 ⓒ최인기
- 요구안 때문에만 기었던 건 아냐… “봐라, 여기 장애인이 있다”
2006년에 처음 기어갈 때는, 진짜 챙피했어요. 나의 이런 모습을 진짜 보여주기 싫었어요. 처음에 한강대교 기었을 때는 주위고 뭐고 아무것도 안 보였어요.(웃음) 아휴, 힘들다, 힘들어. 경찰들이 언제 잡아가지? 내가 왜 굳이 이런 챙피함을 무릎쓰고 기어야 할까. 우리가 이렇게 긴다고 활동보조제도가 만들어질까. 또 한편으로는 그때 제가 성북(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활동할 땐데 이원교 소장님이나 동민이 형(우동민 열사)도 있었거든요. 음…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이 든 내가 부끄럽기도 했어요. 저 사람들은 저렇게 묵묵히 하는데 나는 왜 이런 생각이 들까. 그래서 그때 죽자고 한 거 같아요. 이를 악물고.
두세 번째엔 챙피하다기 보다는 왜 다시 이렇게 바닥으로 내려와야 되나. 우리가 그동안 싸워왔던 것들이 정말 들리지 않는 걸까? 어느 만큼 더 힘을 내야 되나. 그 거리가 짧은 거리잖아요. 전동휠체어 타면 얼마 안 되는 거린데 세시간 걸렸어요. 이게 장애인의 속도라고 하잖아요. 세상은 장애인의 속도를 인정해주지 않으면서 여전히 장애인을 위해서 열심히 뭔가를 하고 있다고 하는데 장애인들은 여전히 바닥으로 내려오고 있어요. 이거 아이러니하잖아요. 내가 지금 30대 후반인데, 40대에도 기어야하고, 50대에도 기어야 하나? 내 몸은 점점 지쳐가고 장애도 점점 심해져 가는데, 다음에 길 때는 온몸으로 굴러야 하나, 이런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지금은 챙피하진 않아요. 대신에 이런 것들을 언제까지 지속할 수 있을까. 우리가 안 해본 투쟁이 없거든요. 단식, 삭발, 농성. 집회랑 기자회견은 밥 먹듯이 하고. 이동권 투쟁할 때는 장애인들이 휠체어에서 내려와 버스 밑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온몸으로 맞서 싸우고 있는데 ‘노력하고 있다, 예산은 없다’ 이런 말만 되풀이해서 듣는 게, 기어가면서 너무너무 화가 나더라구요.
이번에 요구안을 내걸긴 했지만 사실 요구안들 때문에 기어간 것만은 아니에요. 우리 장애인들이 5년 동안 광화문 농성도 하고, 지금 청와대에서 농성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애인들이 이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인식을 잘 못 하는 거 같아요. 그렇다면 온몸으로 보여줄 수밖에 없는데 청와대 보이는 한복판에서 우리 좀 봐라, 그런 거 같애.
아직도 무릎이랑 발목 쪽이 다 낫진 않았지만 괜찮아요.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많이 까지진 않았어요. 기는 요령이 있어서. 그리고 단련됐다고 해야 하나, 그동안 너무나 수많은 집회, 농성을 하면서 경찰들한테 정말 개처럼 질질질 끌려 나온 모습이 너무 많았는데 그렇게 들려 나오면 일단 휠체어와 분리되면서 휠체어 올 때까지 그 상태로 짧으면 십분, 길게는 몇 시간 동안 바닥에 앉아있는데 그때마다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한 번씩 봐요. 그 시선에 무심해졌다고나 할까, 신경 안 쓰게 됐다고 할까. 그렇게 되면 오히려 발악하는 모습을 보여줘야겠다, 오랜 시간 거치다 보니 몸에 익히게 된 거 같아요.
휠체어에서 내려오는 것조차 힘든 사람도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 조직하기가 매우 힘들었어요. 그래도 형숙 언니(이형숙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 소장), 명애 언니(박명애 전국장애인야학협의회 이사장, 대구 활동가) 덕분에 힘이 났어요. 형숙 언니는 각 단위 소장님들 조직해주고 명애 언니는 대구지역에 얘기도 안 하고 기었데요. 긴다고 하면 반대도 많고 속상해하는 사람도 많이 있으니깐. 그리고 박경석 대표님. 나와 같은 마음이었을 거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