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말] 누군가 “장애 문제야말로 인문학의 블루오션이다”라고 했는데, '장판'에서 2년여 활동을 해보니 정말 그렇습니다. 장애운동은 과거 노동운동이 그랬던 것처럼, 사회변혁운동의 최전선에서, 정상 권력에 대한 저항 담론을 주도하고 있고, 앞으로 더 그럴 것입니다.
예전부터 미셸 푸코를 좋아해서 『말과 사물』부터 ‘parrhêsia’(진실의 용기)에 관한 마지막 강의록까지 대략 읽어보았는데, ‘장판’이야말로 푸코를 읽기 가장 좋은 곳이자, 푸코를 꼭 읽어야 할 곳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그동안 장애인 언론 <비마이너> 객원 기자, 노들장애인야학 교사,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으로 활동하면서 든 문제의식을 가지고 푸코를 다시 읽어보려고 합니다. 장애 문제를 사유하는 데 푸코의 사유 방식이 어떤 도움이 될지 검토하고 함께 사유하는 시간을 만들고 싶습니다. 단언컨대, ‘장판’보다 푸코를 읽기에 좋은 곳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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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혹은 인간학이란 뭘까?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의 저작 『말과 사물』(1966)의 부제는 인간과학의 고고학(Une Archéologie des Sciences Humaines)이다. ‘인간과학’이란 흔히 ‘인문학’, 혹은 ‘인류학’이라 지칭하는 학문을 가리킨다. 뭐라고 부르든 ‘인간’, ‘인간됨’, ‘인간 본질’을 대상으로,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을 따라가는 학문이다. 단어마다 지시범위나 강조점이 조금씩 다르다. ‘인간과학’은 굳이 과학임을 주장할 필요가 있을까 싶고, ‘인문학’은 인간의 ‘무늬’(文)란 말이 너무 모호하고, ‘인류학’은 민족학(ethnic)의 냄새가 너무 난다. 쓸데없이 덧씌워진 의미를 걷어내고, 가장 명료한 ‘인간학’이란 단어를 쓰려 한다. ‘인간학’이라 쓰고, ‘인문학’이라 읽어도 좋다.
인간학이란 뭘까? 미셀 푸코는 자신의 국가박사학위 부논문으로 칸트의 『실용적 관점에서 본 인간학』을 프랑스어로 번역하고 「칸트의 인간학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서설을 첨부하여 제출했다. 칸트는 1772년 겨울학기부터 1796년까지 20여 년 간 ‘인간학’(Anthropologie)에 대해 강의했다. 인기가 좋아서 출판요구가 쇄도했지만 강의 중이라 거절하다 1798년 74세 때 출판했다. 이 책은 대강 ‘인식 능력’, ‘쾌와 불쾌의 감정’능력, ‘욕구능력’으로 나누어 인간의 정신적 능력을 고찰하고, 인간의 실존 방식을 ‘개인’, ‘양성’(兩性), ‘민족’, ‘인종’, ‘인류’로 나누어 그 특성과 위상을 검토한다. 무작위로 뽑은 다음 두 구절을 통해 칸트의 인간학 강의가 어떤 식으로 이뤄졌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인식 능력의 결함은 정신박약이든지, 정신병이든지 둘 중 하나이다. 인식 능력에 관한 정신병은 두 가지 주요한 부류로 나뉜다. 그 중 하나는 심기증(Hypochondria)이며, 다른 하나는 조광증(Mania)이다.(…) 정신착란은 그의 사고가 자신의 독자적인(주관적인) 규칙 그러나 경험 법칙과 일치하는(객관적인) 규칙에 어긋나는 규칙을 가지는, 그런 사고의 자의적인 흐름이다.1)
남성은 가정의 평화를 사랑하며, 자신의 일이 단지 방해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즐겁게 여성의 지배에 복종한다. 여성은 가정의 싸움을 피하지 않는다. 그 싸움을 그녀는 혀로 수행하며, 자연도 이 목적을 위해서 남성의 무장을 해제시키는 수다나 풍부한 능력을 그녀에게 부여하고 있다.2)
칸트는 『논리학 강의』 서론에서 철학의 분야는 첫째,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둘째,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셋째,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 넷째,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으로 나뉜다고 했다. 인간학은 네 번째 질문에 답하는 학문이다. 칸트가 유별난 건 아니고, 18세기 중후반 서구에서는 ‘인간학’(Anthropologie)란 이름으로,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고 묻고 거기 답하는 형태의 지식이 쏟아져 나왔다. 신학적(형이상학적), 철학적(관념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경험적 차원에서 과학적 태도로. 이 학문들은 보통 ‘인간의’. ‘인간 본연의’, ‘인간의 고유한’ 무엇을 탐구한다는 말로 자신을 소개한다. 인간의 몸에 대한 생물학, 생리학, 의학의 지식이 인간학의 범주에 들어가며, 인간의 영혼에 대한 심리학, 정신의학, 정신분석학의 지식이, 인간의 먹고사는 문제에 대한 경제학의 지식, 인간의 무리생활에 대한 사회학의 지식이, 인간의 소통방식에 대한 언어학, 신화학, 기호학의 지식이 대체로 인간학의 범주에 속하는 것들이다. 그리고 칸트의 말처럼 이것들은 결말에 ‘그래서,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고 묻고 답한다.
미셸 푸코
모닝빵처럼 팔린 ‘인간의 종언’
푸코는 “인간학이 칸트로부터 우리에게 이르기까지 철학적 사유를 지배하고 이끈 가장 기본적인 경향”3)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인간이나 인간의 지배 또는 인간의 해방에 관해 말하고자 하는” 경향, “항상 인간이 본질적으로 무엇인가에 관해 자문하며”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인간을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고, “모든 인식은 인간 자신의 진실로 귀착된다.”고 주장하는 경향, 다시 말해 “사유하는 것은 바로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고는 사유하려고 들지 않는” 그런 인간학적 사유 방식을 “도래할 사유를 끈질기게 가로막는 장애물”로 느낀다. 그리고 마치 선지자처럼 인간학의 종언을 예언한다.
사유의 고고학이 분명히 보여주듯이 인간은 최근의 시대에 발견된 형상이다. 그리고 아마 종말이 가까운 발견물일 것이다. (…) 어떤 사건에 의해 그 배치가 뒤흔들리게 된다면, 장담할 수 있건대 인간은 바닷가 모래사장에 그려 놓은 얼굴처럼 사라질지 모른다.4)
푸코의 말과 글 중 단언컨대 『말과 사물』이 가장 어렵다. 그런 책이 마치 “모닝빵처럼 팔린”5) 이유에는 분명 인간의 종언을 선포하는 선언문의 어조도 한몫 했을 것이다. 인간의 종언은 당시 젊은 지성인들의 시대정신 같은 것이었다. 2차 대전 직후 스무 살을 맞은 푸코 연배의 지식인들은 헤겔과 사르트르로 대변되는 기성세대의 철학에 대한 반감이 강했다. 대학 내의 헤겔주의, 대학 바깥의 실존주의 모두 ‘인간 주체가 만들어가는 역사’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 나치와 스탈린의 전체주의를 경험하고 드골의 민족주의에 환멸을 느낀 푸코 세대에게 ‘인간 주체가 만들어가는 역사’는 끔찍하고 지긋지긋했다.
구조주의의 유행도 같은 맥락에서 젊은 세대에게 다가왔다. 푸코는 구조주의자로 불리길 거부했지만 구조주의자로 불린 사람들에게 공통적인 태도를 갖고 있었다. 그 태도는 데카르트에서 사르트르까지, 프랑스 철학에서 결코 단념되지 않은 위대하고 근본적인 기본원리, ‘인간의 주체성’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구조주의적 언어학을 결합시킨 자크 라캉은 무의식 이론과 주체성 이론은 양립할 수 없다고 했다. 그 때문에 사르트르는 정신분석학의 무의식 이론을 거부했다. 당대 최고의 문화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도 언어학에 기반한 구조적 분석틀로 주체의 이론에 이의를 제기했다. 심지어 맑스주의자인 알튀세 역시 맑스주의의 본령은 초기의 휴머니즘적 소외이론이 아니라 그것을 극복한 『자본론』에 있다고 주장했다. 1960년대 프랑스의 지성인들에게 구조주의는 인간의 주체성을 근간으로 하는 전통철학의 비판이자 기존 체제의 거부로 인식되었다. 구조주의가 지닌 체제 비판적 성격은 구조주의의 발원지인 소련과 동유럽의 언어학, 민속학, 신화학의 형식주의가 스탈린주의에 의해 분쇄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구조주의 안에는 전통적인 맑시즘과 공산주의에 조종을 울리는 뭔가가 있었다.
하지만 『말과 사물』은 정작 인간학이 왜 사라져야 하는지, 어떤 점이 새로운 사유에 걸림돌로 작용하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70년대에 가서 인간학이 근대 규율 권력과 맺는 동맹관계가 비판되는데 『말과 사물』에는 그런 게 없다. 여기서는 다른 방식의 비판이 이뤄진다. 그것은 인간학을 당연하거나 필연적인 것으로 여기는 사고방식을 무너뜨리는 방식이다. 인간학에 대해 우리는 보통 인간이니까, 인간이 주체로서 인간 자신에 대해 탐구하는 것은 당연하고도 필연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전까지 그러지 못한 것은 인간이 소외되어 있어서, 인간 정신의 발달수준이 미숙해서라면서. 푸코는 그런 목적론적 역사관을 비판하면서, 대안으로 고고학을 제시했다. 푸코는 인간학을 역사학이 아니라 고고학의 대상으로 삼았다. 인간학을 고고학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인간학을 필연적인 것도 아니고 목적도 아닌, 과거의 유물로 보는 시선이다. 고고학적 관점에서 푸코는 인간학이 18세기 고전주의적 사유 체계의 붕괴 속에서 우발적으로 출현해서, 그것을 떠받치고 있는 근대적 사유 체계의 붕괴와 함께 조만간 지식사의 유물로 남게 될 것이라고 본다.
지식의 고고학과 에피스테메
고고학(Archeology)은 땅에 묻혀 있던 유물이 드러나면서 시작된다. 그렇게 발굴된 유적을 복원하고 다른 유적과 비교하면서 그것이 원래 사용되던 맥락과 성격, 의미를 밝혀낸다. 푸코는 고고학의 방법으로 특정 지식의 역사를 추적한다. 시작은 유적 발굴, 지식사의 유적은 고문서이다. 푸코는 역사학의 교과서에 기록된 텍스트 대신 여기 저기 흩어진 고문서들을 발굴한다. 가령, 푸코가 스웨덴 웁살라 대학에 있을 때 고문서 수집가 에릭 발러가 수년간 모은 고문서들을 웁살라 대학도서관에 기증한 게 있다. 16세기에서 20세기 초반까지 총 21,000개 품목의 편지, 원고, 희귀본, 마법의 책 같은 자료들이다. 특히 의학에 관한 자료가 많았는데 대부분 1800년 이전에 인쇄된 것들이다.
푸코는 담론 생산을 통제하는 장치에 의해 억압되는 두 종류의 지식이 있다고 했다. 하나는 역사주의적 담론 통제 속에서 억압된 과거의 파편적 지식으로, 고고학적 작업으로 발굴되어야 한다. 또 하나는 권위주의적인 지식 제도에 의해 억압된 민중적 지식으로, 권력관계의 말단에 있는 희생자들과 실행자들의 일상적 경험 속에서 발굴되어야 한다. 이 둘을 연결하여 기존 담론 체제의 권력에 저항하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고 푸코는 생각했다. 특히, 고문서들을 발굴, 복원, 해석하는 고고학적 작업은 엄청난 노력과 인내력과 지적 역량이 필요하다.
푸코의 고고학에는 지질학적 발상이 있다. 푸코는 고문서의 지식을 지질학의 출토된 광물처럼 다룬다. 즉 그것을 지각변동으로 묻혀버린 지식의 지층 속에 있다가 출토된 광물로 본다. 그것을 분석해보면 그것이 원래 묻혀 있던 지식의 지층 구조를 알 수 있다.
우리가 명백히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인식론적 영역, 즉 인식이 합리적 가치나 객관적 형태에 대한 기준 바깥에서 검토되고, 인식의 실증성이 파묻히며 이런 식으로 인식의 완벽성이 증대하는 역사보다는 오히려 인식을 위한 가능조건의 역사가 드러나는 에피스테메인데, 이 이야기에서 반드시 나타나게 마련인 것은 지식의 공간에서 경험적 인식의 다양한 형태를 야기한 지형이다. 우리의 시도는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역사라기보다는 오히려 고고학이다.(강조: 인용자)6)
푸코의 고고학이 구조주의와 비슷해 보이는 것은 지식의 역사를 개별 지식의 통시적 변천사로 보지 않고, 그 지식이 원래 놓여 있던 공시적 지층의 변천사로 보기 때문이다. 과거의 인식 지층이 어떤 공시적 체계를 이루고 있는지 규명하고, 그 체계가 붕괴되면서 어떤 새로운 지식 체계가 형성되어 그 위에 쌓이게 되었는지 탐사한다. 지식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그것을 가능케 하는 조건이자 지형 위에 놓여야 하는데, 푸코는 그 인식의 조건이자 틀을 에피스테메(épistémè)라고 부른다. 『말과 사물』 서문 첫 페이지에 나오는 다음의 분류방식에서 우리는 ‘에피스테메’의 존재를 느낄 수 있다.
보르헤스의 텍스트에 인용된 ‘어떤 중국의 백과사전’에는 동물이 다음과 같이 분류된다. (a)황제에 속하는 동물 (b)향료로 처리되어 방부 보존된 동물 (c)사육동물 (d)젖을 빠는 돼지 (e)인어 (f)전설상의 동물 (g)주인 없는 개 (h)이 분류에 포함된 동물 (I)광폭한 동물 (j)셀 수 없는 동물 (k)낙타털과 같이 미세한 모필로 그릴 수 있는 동물 (l)기타 (m)물 주전자를 깨뜨리는 동물 (n)멀리서 볼 때 파리같이 보이는 동물.7)
보르헤스의 수필집 『또 다른 심문』(1952) 중 「존 윌킨스의 분석적 언어」에 인용된, 실은 보르헤스가 상상한 이 중국인 백과사전의 황당한 분류를 보고 어떤 생각이 드나? 푸코는 이걸 보고 “우리의 사유, 우리의 시대와 우리의 지리가 각인되어 있는 사유의 친숙함을 깡그리 뒤흔들어 놓는 것” 같아서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우리는 이 분류표에는 뭔가가 없음을 느낀다. 그래서 무질서하다고 생각한다. 사물을 분류할 때 꼭 있어야 하는 어떤 것, ‘황제에 속하는 동물’과 ‘향료로 방부 처리된 동물’을 연달아 놓을 수 있는 어떤 ‘테이블’, 어떤 ‘공간(장소)’, 혹은 어떤 틀이 이 분류표에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게 ‘에피스테메’이다.
칸트 식으로 말해서 어떤 대상에 대한 인식 경험, 혹은 경험적 인식이 이뤄지는 것은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인식의 틀이 경험에 앞서, 경험의 조건으로서, 즉 선험적(transcendental)으로 있기 때문이다. ‘에피스테메’는 칸트가 말한 그 선험적 인식 틀이다. 칸트는 그 선험적 인식 틀의 보편성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푸코는 시간적으로 영원하고 공간적으로 세계성을 가진 보편적 인식 틀 같은 건 없다고 봤다. 어떤 인식 대상을 출현시키고 그것을 인식하는 방식과 인식 요소를 구성하는 에피스테메는 시간적으로 유한하고 공간적으로도 유한하다고 본 것이다.
인간 본질, 노동, 생명, 언어
미셸 푸코의 저작 <말과 사물>
그럼, 인간을 인식 대상으로 출현시킨 인간학의 에피스테메는 무엇일까? 푸코는 ‘인간’ 개념 자체를 출현시킨 에피스테메를 추적하지 않는다. 대신 ‘노동’, ‘생명’, ‘언어’가 경험과학의 대상으로 출현하게 된 에피스테메의 역사를 추적한다. 왜냐하면 노동, 생명, 언어에 대한 실증적 지식이 응집되면서 인간 본질에 대한 탐구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생명, 노동, 언어를 경험적 실체로 다룬 생물학, 경제학, 언어학이 출현하고, 그런 인식 지층 위에서 노동하는 존재로서의 인간, 진화의 정점에 있는 생명체로서의 인간, 언어를 통해 상징 세계를 구성하는 존재로서의 인간 본질에 물음이 제기된 것이다.
인간학은 살아가고, 말하고, 생산하는 범위 내에서 인간을 겨냥한다. 인간은 바로 생물로서 성장하고, 기능과 욕구를 지니고, 인간 자신에게서 맺어지는 유동적인 좌표들의 공간이 열리는 것을 보고 일반적으로 육체적 삶에 의해 생물계의 나머지와 철저하게 엮이며, 물건과 도구를 생산하고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을 교환하고 자신에 의해 소비될 수 있는 것이 유통되고 자신이 중계 지점으로 규정되는 온전한 망을 조직하는 만큼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들과 직접적으로 뒤얽히는 것으로 보이며, 끝으로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위해 온전한 상징 세계를 구성할 수 있는데, 이 상징 세계 내에서 과거, 사물, 타자와 관계를 맺고 또한 이 상징 세계로부터 지식 같은 것을 구축할 수 있다.8)
노동, 생명, 언어에 대한 실증과학의 인식지평 위에서 인간 본질에 대한 인간학적 탐구가 시작되었다면, 우리는 바로 그 인간학의 에피스테메 위에서 장애라는 개념이, 장애인이라는 인식대상이 출현했다고 유추해 볼 수 있다. 즉, 노동을 통한 가치산출 능력이 인간의 본질로 구성될 때 그런 노동 능력이 결핍된 인간으로서의 장애인이 인식대상으로 출현한 게 아닐까? 같은 방식으로, 기능들의 유기적 총체로 인간이 정의될 때 그 유기적 기능의 손상으로 정의되는 장애인이, 분절된 언어로 의사소통하는 것이 인간의 본질로 정의될 때 그 언어 능력의 결핍으로 정의되는 장애인이 인식대상으로 출현한 게 아닐까? (계속)
* 각주
1) 칸트, 이남원, 『실용적 관점에서 본 인간학』, 울산대출판부, 1998, 123쪽.
2) 칸트, 『실용적 관점에서 본 인간학』, 260쪽.
3) 미셀 푸코, 이규현 역, 『말과 사물』, 민음사, 2012. 468쪽.
4) 미셀 푸코, 『말과 사물』, 525~526쪽.
5) 디디에 에리봉, 박정자 역, 『미셸 푸코, 1926~1984』, 그린비, 2012, 278쪽. 1966년 여름에 초판 3,500부가 단숨에 매진됐고, 6월부터 2쇄에 들어가 5천부를 더 찍었고, 7월에 새로 3천부, 9월에 3,500부, 11월에 또다시 3,500부를 더 찍었다. 1989년 이 책의 총 발행부수는 100만부가 넘었다.
6) 미셀 푸코, 『말과 사물』, 17쪽.
7) 미셀 푸코, 『말과 사물』, 7쪽.
8) 미셀 푸코, 『말과 사물』, 480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