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장애인 활동가가 '자립생활 예산확대', '자립생활센터 개소수 확대'라는 피켓을 들고 있다.
장애인 탈시설-자립생활은 이제 거스를 수 없는 시대 흐름이 되었음에도 정작 이에 대한 예산은 늘지 않고 있다. 이에 6일,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아래 한자협)는 청와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장애인의 자립생활을 권리로서 보장하라며 ‘장애인 자립생활 나무’를 문재인 대통령에게 전달했다.
장애인자립생활센터는 지역사회를 거점으로 장애인 이동권, 장애인 활동지원서비스 제도, 탈시설 등 장애인 권리확보를 선도해 오며 장애인 자립생활 패러다임을 변화시켰다. 하지만 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 대한 정부 지원은 1억 5천만 원으로 13년째 동결이다. 그것도 전국 227개 장애인자립생활센터(보건복지부 추산) 중 고작 62개소만 국비 지원을 받는다. 장애인복지법상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장애인자립생활센터를 지원할 것을 명시함에도 이에 관해 제대로 된 종합계획은 수립된 적이 없다.
장애인 자립생활을 지원하는 주요 제도 중 하나인 장애인 활동지원서비스 예산 또한 장애인의 삶을 실질적으로 변화시킬 만큼 증액되지 못하고 있다. 최근 3년간의 예산을 보면, 2016년 5008억 원에서 2018년 올해 예산은 6906억 원으로 증액됐다. 그러나 월평균 시간은 109.8시간으로 동결된 채 이용 인원만 6만 1000명에서 7만 1000명으로, 단가는 9000원에서 1만 760원으로 증액됐을 뿐이다. 인원 증가에 대해서도 한자협은 “전년도 자연증가분 인원을 올해 인원으로 확정하는 방식으로 복지부는 소극적 인원 확대를 하고 있을 뿐”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단가 증액마저 최저임금 인상률에도 못 미치고 있다. 2011년 장애인활동지원법 제정 이후 올해까지 최저임금은 약 63% 인상된 반면 활동지원 단가는 33%인 2,460원만 인상됐을 뿐이다. 이로 인해 2018년 활동지원 단가는 시간당 10,760원인데 이는 활동지원사에게 주휴수당, 연차수당도 지급할 수 없는 수준이다. 복지부 스스로 근로기준법을 위반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용 시간이 동결된 채 단가 인상으로 급여량만 확대되어도 장애인 이용자의 본인부담금은 크게 인상된다는 데 있다. 한자협에 따르면, 2009년 본인부담금은 최대 월 4만 원에 불과했으나 2010년엔 월 8만 원으로 두 배가량 뛰었고, 올해 2018년도엔 최대 25만 5700원까지 장애인 이용자가 부담해야 하는 실정이다. 한자협은 “본인부담금이 예산 문제라는 것은 복지부의 궁색한 변명”이라면서 “현재 본인부담금이 예산에 기여하는 비율은 4.4%에 불과하며, 이는 복지부가 사용하지 못해 남기는 불용처리 예산보다 적은 액수”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따라서 이날 한자협은 △장애인자립생활센터 예산 확대 △중증장애인 자립생활 지원체계 5개년 계획 수립 △활동지원 수가 현실화 △활동지원 24시간 보장 △활동지원 생활시간 보장 △장애등급 및 연령 제한에 의한 대상 제한 폐지 △활동지원 자부담 폐지 △활동지원사 노동권 보장 등을 위해 장애인활동지원법을 전면 개정할 것을 요구했다.
'문재인 대통령님! 장애인 자립생활 나무를 함께 심어요!'라는 현수막을 발언자들이 들고 있다.
- 개정 근로기준법, 활동지원 현장 개선 없이는 ‘이용자-노동자-기관’ 갈등만 증폭될 뿐
이러한 누적된 문제와 함께 이날 한자협은 지난 2월 28일 개정된 근로기준법에 따른 장애인 활동지원서비스 현장의 혼란을 새로운 문제로 제기했다. 한자협은 “근로기준법 개정은 노동자 권리 확보를 위한 의미 있는 개정이나 지금 시스템에서 중증장애인은 그저 환영만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라고 곤혹스러워했다.
과거 사회복지서비스업은 특례를 적용해 사용자와 근로자의 대표가 서면으로 합의할 경우, 현행 근로기준법에서 명시한 월 최대 근로시간 208시간을 초과해 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특례조항은 ‘초장시간노동을 부추긴다’며 노동계의 비판을 받아 왔다. 이로 인해 이번 개정된 근로기준법에선 특례업종이 현행 26개에서 5개 업종으로 대폭 축소됐다. 이 과정에서 사회복지서비스업도 특례 업종에서 제외되면서, 이제는 반드시 주 52시간(월 208시간)의 노동시간을 지켜야 한다. 이는 노동자의 초장시간노동을 법으로써 제지한다는 면에서 분명 긍정적이다. 그러나 활동지원기관 입장에서 보면, 이제 한 명의 활동지원사가 한 달에 208시간 이상 일하게 될 경우 근로기준법 위반으로 과태료를 물어야 하니 이용 시간을 제지할 수밖에 없다. 사업장 규모에 따른 단계적 적용 계획에 따라, 50~299인 규모의 사업장(활동지원기관 대부분이 이에 해당한다)은 2020년 1월 1일부터 적용받는다. 한자협은 “한 사람의 이용 시간을 제한할 경우, 노동 강도가 높은 최중증장애인을 기피하는 현상은 더욱 심화할 것이며, 활동지원 구인이 어려운 산간지역은 실제 추가 활동지원사를 구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힘들다”며 이에 대한 복지부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개정 근로기준법에 따른 문제는 또 있다. 지난 3월 보건복지부가 활동지원기관에 배포한 지침을 보면, 주 40시간 이상 일한 사람 중 휴일에 8시간 이내 일한 사람에겐 통상임금의 50%를, 8시간 초과로 일한 사람에겐 100%를 가산해서 줘야 한다. 이는 지난 3월 20일부터 이미 현장에 적용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100% 가산’이 현재 복지부 단가에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재 복지부는 심야와 휴일에 50% 가산된 급여량까지만 예산에 책정하고 있다. 김태훈 한자협 활동가는 “중계기관은 복지부 바우처에서 나오는 돈으로 활동지원 급여를 주고 있다. 그런데 지난 3월 20일부터 휴일에 8시간 이상 일할 경우 ‘100% 가산된 임금’을 지급해야 하는데, 정작 복지부는 이에 대해 예산을 책정하지 않고 있다”면서 “이에 대해 복지부에 예산 추경을 요청한다”고 말했다. 사실상 중계기관 입장에선 ‘없는 돈을 만들어서’ 줘야 하는 실정인 것이다. 한자협 측은 사회보장정보원 데이터를 추계하면 필요한 예산 규모 확인이 가능하다고 밝혔다.
이 외에도 ‘4시간 일하면 30분, 8시간 일하면 1시간 이상의 휴식시간을 부여해야 한다’는 복지부의 지침도 활동지원 노동 특성에 맞지 않는다고 한자협은 지적한다. 이러한 휴식시간은 기존 근로기준법에 있었던 내용이나 현장에선 암암리에 지켜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 복지부가 지침으로 명시하면서 현장에서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것이 됐다. 이를 활동지원 현장에 적용하면 활동지원사는 8시간 일한 뒤 바우처를 결제하고 ‘1시간 동안 무급으로 쉰 뒤’ 다시 바우처를 결제해야 한다. 장애인 이용자의 경우, 1시간 동안 사실상 방치되거나 1시간 동안의 대체인력을 구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는 올해 7월 1일부터 적용된다.
한자협은 “법이 개정되었으면 장애인 활동지원 환경도 이에 맞춰 개선해야 하는데 전혀 준비가 안 되어 있다. 정부의 근본적인 대책 없이는 장애인 이용자, 활동지원사, 활동지원기관 간의 갈등만을 부추길 뿐”이라면서 개정 근로기준법에 따른 최중증장애인 활동지원 대책 마련과 휴일 가산 수당에 대한 추경 예산 편성을 복지부에 촉구했다.
만 65세가 되면 활동지원서비스가 아닌 장기요양 서비스를 받아야 되는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는 퍼포먼스가 펼쳐지고 있다.
이날 최용기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부회장은 “문재인 대통령이 일일 돌봄교사 체험을 한 것처럼 그가 활동지원사 체험을 했으면 좋겠다”면서 “그래서 중증장애인들의 활동지원이 얼마나 중요한지, 현재 활동 지원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가치와 중요성을 파악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경호 의정부장애인자립생활센터 소장은 “오지석 동지가 사망한 이유가 무엇인가. 한 시간, 바로 그 한 시간의 공백 때문이었다. 활동지원사가 퇴근한 뒤 어머님이 오시기 전까지, 그 한 시간 동안 곁에 아무도 없어서 사망한 것”이라면서 “이런 일이 제도라는 이름으로 또 벌어질 수 있다는 절박함이 마음을 짓누른다. 내겐 남의 일이 아니다. 언제까지 우리의 생존권을 구걸하듯이 말해야 하는가.”라고 외쳤다.
기자회견 후, 참가자들은 “문재인 대통령에게 우리의 요구안을 직접 전달하겠다”며 청와대를 향해 이동했으나 경찰에 의해 가로막혔다.
한 발언자가 '활동지원 24시간 확대' 문구가 적힌 영양제 모양의 피켓을 자립생활 나무에 붙이고 있는 모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