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장벽의 도시③] 화장실 찾아 전력질주..물 안나오고 칸막이 없는 일터 화장실 실태
작성자 2022-10-31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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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고려하지 않은 일터 화장실 실태
9개 직업 노동자 인터뷰 "화장실 참아 방광염"
화장실 가려면 수많은 '투명 장벽' 넘어야
지난달 오전 서울역 5번 플랫폼 앞. 부산행 무궁화호가 플랫폼으로 진입했다. 출발 시간 직전 부기관사 김서희씨가 기관차 운전실에서 나와 객차 방향으로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객차에 딸린 화장실이다. 기관차 바로 뒤 객차에는 화장실이 없어 두 번째 객차까지 전력질주해야 한다. 이렇게 뛰어도 짧은 정차 시간 내에 볼일을 보긴 어렵다. 왕복 약 140m를 뛰고 난 그의 이마에 송글송글 땀이 맺혀 있었다.
열차 기관사들의 ‘일터’인 기관차에는 화장실이 설치돼 있지 않다. 기관차와 객차 화장실은 연결돼 있지 않아 화장실을 가려면 기관차에서 내려 가까운 객차나 역사 구내로 가야 한다. 하지만 짧은 정차 시간 동안 쉽지 않아 기관사들은 대부분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화장실이 급해도 참아야 한다.
경향신문 취재팀은 노동자들이 일터에서 화장실을 자유롭게 이용하고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지난 8월부터 9개 직종의 노동자들을 만났다. 건설노동자와 학습지 교사, 지하철·철도 기관사, 도시가스 점검원, 급식 조리실무사, 백화점·면세점 판매원, 콜센터 상담사들이다. 일하는 방식과 공간은 달랐지만 ‘화장실 사용권’이 보장되지 않는 점은 같았다. 이들은 갈 수 있는 화장실이 없거나 적어 일부러 물을 마시지 않는 습관이 붙었고, 그로 인해 방광염 같은 질병에도 노출돼 있었다. 화장실이 있지만 심리적 압박과 차별로 제대로 이용할 수 없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화장실 사용권은 기본적인 생리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당연히 보장돼야 한다. 하지만 2022년 한국 사회에서는 상당수의 노동자들이 화장실에 가기 위해 숱한 장벽을 넘어야 한다.
김서희 부기관사가 열차 출발 전 객차에 있는 화장실을 들린 뒤 다시 기관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최유진 PD“열차 줄줄이 오는데...” 화장실 참는 기관사들
한국철도공사(코레일)는 기관사들이 “정차 후 운전실과 가까운 객실 내 화장실을 이용하면 된다”고 한다. 하지만 1분30초쯤 되는 정차 시간 내 화장실에 다녀오기란 말처럼 쉽지 않다. 기관석과 객차가 연결돼 있는 경우는 그나마 다행이지만, 분리돼 있는 열차에서는 시간이 더 걸린다.
김 기관사는 이 경우 기관차에서 하차해 객실까지 달려가는 데 30초, 화장실 있는 객실을 찾는 데 30초, 용변에 1분, 다시 되돌아오는 데 30초쯤 걸리는 것 같다고 했다. 용변을 1분으로 한정해도 2분30초가 걸린다. 간신히 화장실에 도착했는데 ‘사용 중’일 땐 아뜩해진다. 기다릴까, 다른 객차로 다시 뛸까. 아무리 서둘러도 열차 출발은 지연된다. 김 기관사는 “ ‘화장실에 가야 한다’고 하면 관제사가 발차 전화를 늦게 해주긴 하는데, 아무래도 (운행은) 지연된다”고 했다.
‘정시성’을 중시하는 철도 운행에서 ‘화장실 가겠다’는 이유로 출발 시간을 늦추는 기관사는 거의 없다. 정혜림 기관사는 그런 경험이 “17년 동안 딱 3번”이라고 했다. “뒤에 열차들이 줄줄이 오고 있단 말이에요. 급하다고 ‘화장실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갈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 회사는 문책하지 않는다지만 부담스럽죠.”(노동환 기관사) 그래서 기관사들은 대부분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이를 악물고 버틴다.
남성 기관사들은 만약을 위해 비닐봉지를 챙긴다. 37년 경력의 노 기관사가 이 방법을 쓴 지는 10년쯤 되었다. “기관석 안에서 운전하고 있는 동료 옆에서 실례를 해야 하잖아요. 같은 남자라도 그러기 싫어 소변을 참았죠. 한 20년 참았더니 병에 걸렸어요, 전립선염.” 고통스러운 치료 과정을 겪은 뒤로는 봉지를 챙기기 시작했다. 그나마 여성 기관사들은 이런 임시변통이 불가능하다.
지하철 기관사들에게 지급된 휴대용 좌변기. 성동훈 기자지하철 기관사들에게 지급된 남성용 소변 봉투. 성동훈 기자지하철 기관사도 사정이 다르지 않다. 지난 8월 만난 지하철 승무원 김형석씨(가명)의 손에 묵직해 보이는 플라스틱 상자가 들려 있었다. “이게 화장실이에요.” 상자를 열자 낡은 접이식 좌변기와 두꺼운 비닐 주머니가 나왔다. 김씨는 좌변기에 주머니를 넣고 끝을 변기 가장자리에 붙여 고정시켰다. “저희는 ‘배변봉투’라고 해요.” 서울교통공사가 2008년, 코레일이 2017년부터 지급한 ‘휴대용 화장실’이다. 2007년 지하철 기관사가 달리는 지하철에서 밖으로 몸을 내밀어 용변을 보다 사망한 사고를 계기로 지급됐다. 그는 “사람 죽고 나서 변기 하나 왔다”고 했다. 회사는 30㎝ 길이 반투명 비닐봉지도 ‘소변 봉투’로 나눠준다. 그는 정말 급했을 때 딱 한 번 좌변기를 사용한 적이 있다. “ ‘설마 저걸 쓸 일이 있겠어’ 싶었는데 사람 일은 모르더라고요. 배가 너무 아픈 거예요. 사용하면서 ‘이거 인권 없구나’ 했죠.” 지하철 기관사 오현주씨(가명)는 한 번도 이 좌변기를 써 본 적이 없다. “정차 시간이 30초밖에 안 돼요. 지하철 플랫폼에선 승객들이 기관석을 보고 있어요. 역사 내 폐쇄회로(CC)TV도 기관실을 비추고 있어요. 다 보이는데 쓸 수가 없죠.”
지하철 승무원 김형석씨(가명)이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성동훈 기자매일 수십만 명의 이동을 책임지는 기관사들이 왜 이렇게밖에 화장실을 이용할 수 없을까. 기차와 지하철, 역사 모두 설계 때부터 그 공간에서 가장 긴 시간을 보내는 기관사들은 고려되지 않는다. 철도노조에 따르면 미국 등 일부 국가에서는 장거리 운행용 열차의 기관차에 침실과 화장실이 딸린 차량을 연결해 다니기도 하지만, 한국에 그런 차량은 없다. 김선욱 철도노조 정책실장은 “화장실 설치가 기술적으로 불가능할 것 같진 않은데, 애초부터 고려하지 않은 것 같다”고 했다. 노동자를 고려하지 않은 공간은 시민의 안전도 위협한다. 서동훈 민주노총 노동안전보건실장은 “기관사가 용변을 참느라 집중력을 잃으면 시민의 안전을 위협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고 했다. 철도노조 김한수 국장은 “무궁화호 같은 열차에는 동력차에 기관사용 화장실을 설치하고, 지하철은 주요 역 끝 부분에 간이화장실이 아닌 일반 화장실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화장실 없거나 있어도 물 안나오거나지하 5층에서 일하는 형틀목수 김명숙씨가 화장실을 가기 위해 지상까지 이어진 철제 계단을 오르고 있다. 건설현장 계단의 높이는 일반 계단 2~3칸의 높이와 맞먹는다. 강윤중 기자
지난 7월 경기도의 한 신축 아파트 천장 안에서 ‘인분’이 발견됐다. 입주 때부터 악취를 견디다 못한 입주민이 천장을 뜯자 인분이 든 봉투가 나왔다. 집을 짓던 현장 노동자가 용변을 보고 따로 치우지 않고 묻은 것으로 추정됐다. 왜 화장실에 가지 않고 봉투를 사용했을까.
“예전에 일하던 현장에서 아침 조회 때 늘 하는 말이 있었어요. ‘아무 데서나 대소변 좀 보지 마라.’ 아니, 화장실을 만들어 놓고 보지 말라 그래야지, 화장실이 없는데 그럼 어떻게 해요.” 27년 경력의 타워크레인 기사 박미성씨가 말했다.
건설 현장에는 노동자들이 쓸 화장실이 없거나 매우 적다. 박씨가 요즘 일하는 곳은 지상 29층, 지하 4층짜리 아파트 여러 동을 짓는 대형 현장이다. 현장에는 총 3개 공구가 있는데, 그가 있는 2공구에서만 아파트 10개동을 맡는다. 인원이 많을 때는 400~500명씩 드나든다. 하지만 2공구에 설치된 화장실은 6개에 불과하다. 그중 4개는 ‘거품식’이다. 용변을 보면 물이 내려가는 대신 거품이 나온다. 세면대에는 물이 안 나온다. “손 씻을 데가 없어요. 어떻게 화장실에 물을 안 나오게 할 수 있느냐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안 고쳐요.” 물이 나오는 화장실 2개 중 하나는 원청 사무실이 있는 지하에 있다. 130m 높이의 타워크레인에서 일하는 박씨가 물이 나오는 화장실에 가려면 1㎞ 가까이 이동해야 한다. “원청 사무실이 지하에 있다고 거기다 화장실을 만들어 놨어요. 물 있는 데를 찾아가려면 거길 가야죠. 노동자를 위한 화장실은 아니에요.”
김씨가 일하는 건설현장 지하에 설치되어 있는 남성용 간이 소변기. 강윤중 기자박미성씨가 일하는 건설현장에 설치되어 있는 남성용 간이 소변기. 칸막이가 아예 없다. 박미성씨 제공다른 현장에서 일하는 형틀목수 김명숙씨의 상황도 비슷하다. 그가 일하는 지하 5층에는 노란색 간이 소변기가 하나 있다. 지하에서 일하는 남성 노동자를 위한 것이다. 소변기 옆에는 칸막이가 있는데, 한쪽이 터져 있어 소변 보는 모습이 그대로 노출된다. 박씨가 일하는 현장에는 아파트 3개 층마다 하나씩 이런 소변기를 놨는데, 아예 칸막이가 없었다. “그걸 본 순간 현장 본부장님에게 물어봤어요. ‘본부장님, 제가 계단 내려가고 있는데 거기서 소변 보실 수 있겠어요?’ 그랬더니 못 본대요. ‘그럼 노동자들은 봐도 되는 거냐? 인권위에 신고하겠다’고 했어요.”
여성용은 ‘간이 소변기’조차 없어 김씨가 화장실에 가려면 지상으로 나와야 한다. 지상까지 가는 철제 계단 한 칸의 높이는 보통 계단 두세 칸의 높이와 맞먹는다. 무거운 장비를 찬 채 계단을 오르다보면 금방 숨이 찬다. “여성 노동자들은 50대 중반 이상이 많은데 연세가 많으니 소변을 참지 못하기도 하죠. 계단 올라가다 실수할까봐 요실금 팬티를 입고 다니는 분들도 있고, 창피하지만 그냥 안 보이는 데서 해결하는 분들도 있고….” 그렇게 애를 써서 찾은 화장실 중 원청 직원용을 제외한 나머지는 대부분 거품식이고, 물도 잘 나오지 않는다. ‘인분 아파트’ 사건이 발생하자 민주노총 건설노동조합은 “건설노동자를 ‘파렴치한 인간 막장’으로 여기기 전에, 건설 현장에는 화장실이 없다는 점에 주목해달라”며 국가인권위원회에 ‘적절한 화장실 설치 권고’를 촉구하는 진정서를 냈다.
화장실 가로막는 차별·눈치 장벽이동·방문 노동자인 가스 점검원은 담당구역 내 동선 상 화장실이 없으면 화장실에 가기 어렵다. 최유진 PD
‘화장실 장벽’은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학습지 교사, 도시가스 점검원 같은 방문 노동자들은 일상적으로 장벽을 맞닥뜨린다. 담당 구역의 동선에 공중 화장실이 없으면 갈 곳이 없다. 서울 은평구의 오래된 주택가가 담당 구역인 점검원 김윤숙씨가 화장실을 가려면 도보 20여분 거리의 지하철역이나 집까지 되돌아가는 수밖에 없다. 카페 화장실은 음료값도 부담스럽고 시간도 없어 그냥 참는 쪽이다. 분 단위로 동선을 짜 움직여야 하는 학습지 교사도 처지가 비슷하다. 경기도 수원의 한 아파트 단지에서 만난 학습지 교사 여민희씨는 짧은 인사를 나누자마자 아파트 관리사무소 건물로 뛰어들어갔다. “안녕하세요, 그런데 제가 지금 화장실을 가야 해서…” 이곳엔 그가 유일하게 마음 편히 갈 수 있는 화장실이 있다. 그는 첫 수업과 중간 수업을 마친 뒤 항상 이곳을 찾는다. 동선상 이 화장실을 못 가면, 오후 9시20분 마지막 수업을 마칠 때까지 참아야 할 수도 있다. “무조건 들러야 돼요. 화장실 안 가고 싶어도 가야 돼요.”
면세점 판매원 김수현씨가 ‘면세점 판매사원의 화장실 가는법’을 그림으로 그리고 있다. 최유진 PD건물 내에 화장실이 있지만 ‘차별과 눈치’의 장벽을 넘어야 하는 노동자들도 적지 않다. 면세점 판매사원인 김수현씨는 매장 코앞에 있는 ‘고객용’ 화장실 대신 다른 층의 ‘직원용’ 화장실을 사용하라는 지시를 받은 적이 있다. “고객용은 왕복 5분이면 되는데 직원용은 계단으로 가서 보안카드로 문만 2~3개를 열어야 했어요. 15분은 걸리죠.” 불만이 나오자 매장 앞 화장실 사용은 허가됐지만, 양치질은 안 된다는 조건이 붙었다. 에스컬레이터나 엘리베이터 역시 ‘고객용’으로 분류돼 직원들은 자유롭게 이용할 수 없다. 백화점 판매사원 허영미씨(가명) 역시 일터에서 고객 화장실은 이용할 수 있지만 에스컬레이터를 탈 때에는 명찰을 떼야 한다.허씨는 “(에스컬레이터) 탈 때 기본적으로 명찰을 떼요. 그냥 고객이 불편할 수도 있으니까. 우리 스스로도 눈치를 봐요”라고 말했다. 백화점은 잠시 머무는 고객에겐 더없이 편리한 공간이지만, 그곳이 일터인 노동자들은 공간을 온전히 누릴 자유가 없다. 김씨는 “익숙하기도 한데, 우선 짜증이 난다”고 했다. “화장실 문제는 생리적인 거잖아요. 사람이 가장 원초적인 것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게 자존심 상했어요.”
콜센터 상담사 박기연씨(가명)는 화장실에 갈 때 컴퓨터에 ‘개인사유’ 버튼을 눌러야 한다. 동시에 여러 명의 상담사가 자리를 비우는 것을 막자는 차원인데, 화장실에 갈 때마다 전체 공지를 하게 되는 셈이다. ‘개사’를 자주 누르면 상담사 평가에 반영돼 실적도 떨어진다. 상담사가 한 개의 콜이라도 더 받아야 실적이 쌓이는 구조이다 보니 얼마 전까지는 ‘화장실 안 가면 가점 3점’을 주는 이벤트도 있었다. “상담사 스스로 화장실 이용을 제한하고 자리에 더 오래 앉아있어야만 수당을 더 받을 수 있고, 그렇게 하도록 회사도 부추기는 게 문제예요.”
물 안 먹고, 화장실 참자 병이 되었다김규연 직업환경의학과 전문의가 지난달 초 경향신문 스튜디오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성동훈 기자
화장실 이용이 쉽지 않은 노동자들은 수분 섭취를 제한한다. 도시가스 점검원 허보기씨는 원래 물을 많이 마시는 사람이었다. “피부에 좋다길래 2ℓ씩 마셨었죠. 지금은 많아야 500㎖ 정도?” 하지만 입사 초 평소처럼 물을 마셨다가 화장실에 못 가 아찔한 경험을 한 뒤로는 수분 섭취를 줄였다. 지난 8월에 만난 김윤숙씨도 땀을 비오듯 흘리면서도 “화장실에 가고 싶어져 안 된다”며 고객이 준 드링크제를 그대로 가방 안에 넣었다. 김씨는 10여년 전 화장실이 없는 동네에서 자전거를 타고 검침을 돌다 생리대를 제때 바꾸지 못해 집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나왔던 적도 있다. “물을 하루에 종이컵 기준으로 3잔 마셔요. 가끔 어지러워서 휘청거려요.”
성인의 적정 수분량은 종이컵 기준 하루 10잔 정도다. 김규연 직업환경의학과 전문의는 “세계보건기구(WHO)는 성인들에게 하루 1.5~2ℓ의 물을 섭취할 것을 권장한다. 매일 몸에서 나가는 소변, 땀, 피부로 나가는 수분 등이 2~2.5ℓ 정도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가스 점검원 김윤숙씨가 검침을 돌고 있다. 그의 담당구역인 은평구 응암동에는 이용할 수 있는 화장실이 없다. 김한솔 기자물을 적게 마시고, 화장실을 참는 습관은 병을 부르기도 한다. 김씨는 오래 전부터 주기적으로 방광염을 앓고 있다. 그는 “처음엔 일 때문이라고 생각 못했는데, 동료들이 ‘다 그런 거야, 나도 그래’라고 했다. 우리 직업이 화장실에 잘 못 가니까 안고 사는 병이란 걸 알게 됐다”고 했다. 여민희씨는 방광염이 급성 신우신염으로 이어져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다른 노동자들도 빈뇨, 물을 마시자마자 화장실에 가고 싶어지는 급박뇨 증상을 호소했다. 김 전문의는 “방광염을 일으키는 균은 초기엔 항생제로 금방 치료되지만, 계속 재발되면 내성이 생겨 약이 잘 안 듣는다. 방광염을 제때 치료하지 않으면 균이 콩팥까지 올라가 염증을 일으키는데, 그게 신우신염이다. 균이 혈액을 타고 전신을 돌며 패혈증도 올 수 있어 매우 위험하다”고 했다. 노동과정에서 발생한 질병이지만 ‘산업재해’로 다뤄야 한다는 논의는 활발하지 않다.
화장실 이용은 헌법적 권리
한국 사회에서 ‘일터 화장실’ 문제는 다른 노동 사안에 비해 주목을 받지 못했다. 공론화하기 껄끄럽다 보니 ‘사적인 영역’으로 취급되었던 것이다.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는 지난해 낸 ‘여성노동자 일터 내 화장실 이용 실태 및 건강영향 연구’ 보고서에서 “화장실은 일하는 사람으로서 존엄의 문제이자 건강과 직결되는 중요한 문제”지만 “고충처리 수준으로 여겨지거나 개인의 문제로 다뤄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지적했다. 또 “그러다보니 원인과 해결 모두 개인에게 맡겨져 풀지 못하는 숙제처럼 여겨진다”고 했다. 화장실 장벽을 없애기 위해선 사업주들이 화장실을 ‘사적 공간’이 아닌 작업장의 주요한 노동환경으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한눈에 보기에도 낡은 지하철 기관사의 휴대용 좌변기. 두꺼운 비닐 주머니를 좌변기에 붙여서 용변을 봐야 하는데, 주머니는 완전히 밀봉되진 않는다. 성동훈 기자우선 화장실 관련 법령이 구체화·의무화될 필요가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건설근로자의 고용개선 등에 관한 법’에는 공사 예정금액이 1억원 이상인 건설 현장에는 반드시 화장실이 있어야 한다고 규정돼 있다. 하지만 시행규칙의 설치 기준을 보면 ‘현장에서 300m 이내에 설치할 것, 관리자를 지정할 것, 남녀를 구분할 것’에 그쳐 ‘무늬만 화장실’도 허용되는 수준이다. 독일이 화장실 ‘동시사용률’까지 고려해 변기와 세면대의 수를 규정한 것과 대비된다. 독일은 이동형 변기 칸에 세면대가 없으면 변기 가까운 곳에 세면대를 설치하도록 하고, 화장실이나 이동형 변기에서 작업장까지의 이동거리가 100m 이내이거나 이동시간이 5분을 넘기지 않도록 하는 등 세밀하게 규정하고 있다. 인권위가 시행규칙에 노동자 수에 따른 편의시설 규모 등을 더 세부적으로 마련하라고 2020년 권고했지만, 아직까지 바뀐 건 없다. 고용노동부의 ‘사업장 세면·목욕시설 및 화장실 설치·운영 가이드’(2019)에는 보다 구체적인 기준이 있지만 권고사항일 뿐이다. 강제사항이 아닌 ‘권고’인 이상 건설사로서는 굳이 돈을 더 들여 ‘좋은 화장실’을 만들 이유가 없다. 박미성씨는 “권고는 아무리 해봐야 소용없다. 법으로 강제하지 않으면 원청은 절대 안 고친다”고 했다.
어느 학교 급식 노동자들이 이용하는 화장실의 모습. 한 공간 안에 샤워기와 세면기, 변기, 세탁기가 모두 함께 있다. 김영애씨 제공법이 있어도 ‘노동자의 눈높이’에 맞지 않으면 실효성이 떨어진다. ‘학교급식법’의 기준을 따라 만들어진 급식 노동자의 편의시설이 그렇다. 김영애씨는 학교 급식실 조리실무사다. 그가 최근까지 일했던 학교의 화장실에는 변기와 세면대, 샤워부스, 세탁기가 한꺼번에 들어가 있다. 여러 명이 용변과 양치, 샤워, 빨래를 동시에 해결해야 했다. 법이 급식위생에 초점을 맞춘 것이어서 이런 화장실도 규정 위반은 아니다. 서동훈 실장은 “적절한 노동조건을 마련할 (1차적) 책임은 사업주에게 있지만, 사업주가 그렇게 하도록 만들 책임은 정부에 있다”고 했다.
화장실은 인간의 존엄과 자아를 지키는 공간이다. ‘근로 조건이 인간의 존엄을 보장해야 한다’는 헌법(제32조3항)의 취지를 고려하면 노동자의 자유로운 화장실 사용은 ‘헌법적 권리’에 속한다.
‘화장실 가는 길’은 그 사회가 ‘노동을 얼마나 존중하느냐’와 연결될 수밖에 없다. 이나래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한노보연) 상임활동가는 “노동이 존중받지 못하는 사회 분위기가 강하다 보니, 화장실 문제도 우선순위에서 뒤로 밀리고 있다”며 “노동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바꿔야 화장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했다.
출처 : https://v.daum.net/v/2022101406001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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