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벽 없는 공연장, 수어로 함께하는 시와의 노래
작성자 2022-11-10 최고관리자
조회 406
10월 15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의 한 공연장. 가수 시와는 노래에 앞서 잠시 숨을 골랐다. 조용히 눈동자를 굴리며 관객들의 표정을 살피고, 연주자들과 짧은 대화를 주고받은 뒤에야 그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여러분은 어떤 순간을 떠올리며 공연장에 오셨나요. 제가 노래를 부르는 동안 여러분은 어떤 마음이실까요. 두근두근하는 기대를 담아 먼저 네 곡의 노래를 들려드릴게요.”
‘숨’이라는 노래가 흘러나오자, 공연장에 있는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음악에 참여했다. 시와는 노래를 부르고, 관객들은 연주를 감상하고, 수어통역사와 문자통역사는 선율에 맞춰 가사와 대사를 전달했다. 시와는 “누구나 혼자 숨을 쉬지는 않는다”고, “숨은 늘 곁에 있어 의식하지 않지만 함께 쉬어진다”고 말했다. 숨은 그렇게 ‘너와 나 사이 부는 바람’이라는 노랫말이 되어 공연장을 가득 메웠다.
이날 공연의 이름은 ‘숨 쉬는 시간’이다. 시와는 “관객들과 함께 숨을 쉬듯 소통하면서 평등하고 평화로운 공연을 만들어가고 싶다”고 했다. 공연 이틀 중 첫날을 다녀오고 나흘 뒤 마포구의 한 카페에서 그를 1시간가량 만났다. 들여다보고 안아주는 노래를 부르는 한 독립음악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 휠체어 접근 가능한 배리어프리 공연… “수어통역사도 같이 노래해요”
시와의 공연은 홍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디밴드 공연과 여러 면에서 달랐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즐길 수 있는 배리어프리(barrier free) 공연을 지향한다는 점이 특히 그랬다. 30명 안팎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소규모 공연장 ‘살롱 문보우’는 휠체어 접근이 가능한 1층에 있었다. 어둡고 조용한 지하 공연장과 달리, 커튼 틈새로 들어오는 햇빛이 이날 무대를 환하게 밝혔다.
수어 통역과 문자 통역이 함께 제공된 점도 눈에 띄었다. 두 명의 수어통역사가 번갈아 무대에 올라와 시와 옆에서 노랫말을 전했다. 시와는 목소리로, 통역사는 손짓과 표정으로 관객들을 만났다. 객석 뒤편에서 문자통역사가 속기한 내용은 문자 통역 어플리케이션 ‘쉐어타이핑’에 실시간 자막으로 올라왔다.
이날 시와가 부른 노래에는 ‘기댄다’는 단어가 많이 나왔다. 노래 ‘나무의 말’에서 시와가 “내게 편안히 기대”라고 하자, 이민호 통역사는 왼손 엄지로 자신을 가리킨 뒤 양손을 오른쪽 귀에 대고 살포시 눈을 감았다. 노래 중간중간 터져 나오는 박수와 웃음소리는 쉐어타이핑에서 이모티콘 형태로 전달되었다.
이 같은 시도들은 공연의 장벽을 허무는 과정이었다. 이틀간의 공연은 실제로 ‘장애가 있다’고 답한 네 명의 관객에게 가닿았다. 객석 둘째 줄에 앉아 있던 농인 해랑 씨는 수어와 문자 통역서비스를 이용해 이날 공연을 즐겼다. 그는 공연이 끝난 뒤 기자와 인터뷰하면서 “공연에서 통역이 제공돼도 내용을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종종 있는데, 이렇게 문자 통역과 수어 통역이 둘 다 갖춰진 개인 공연은 처음 본다”고 했다.
2시간이 넘는 공연에서 전해지는 모든 감각은 그 자체로 공연의 일부가 되었다. 속기사가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 수어통역사의 몸짓과 얼굴 표정은 기존의 음악의 범주에는 들어가지 않는 것들이다. 시와는 공연 중 생겨나는 모든 소리와 몸짓과 이야기가 비로소 음악이 되는 순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기서 펼쳐지는 모든 순간이 이 노래가 된다고 생각해요. 저는 옆에 계신 수어통역사분과 같이 노래하고 있는 거죠. 화음 같은 소리가 없어도, 목소리를 내지 않아도 함께 노래하는 기쁨을 이제는 알고 있어요. 둘만의 합창이랄까요(웃음). 타이핑 소리 역시 공연의 일부로 들어주셨으면 해요.”
- ‘노래 속의 대화’서 청각장애인 만나… 공연장 장벽 하나씩 허물어가다
2006년 음악을 시작한 시와는 그때만 해도 특수교사로 일하고 있었다. 좋은 선생님이 되고 싶어 음악치료 연수를 다녀왔고, 그곳에서 배운 것들을 수업 시간에 적용하며 아이들과 노래를 만들고 불렀다. 수업을 위해 노래를 배웠지만 자신을 위해 노래하고 싶다는 마음이 점점 커졌다. 2011년 교직을 나와 음악을 전업으로 삼은 지 어느덧 10년이 넘었다.
시와는 장벽을 허무는 방식의 공연을 여러 차례 시도해 왔다. 40회 넘게 이어지다 지난 8월 잠시 중단된 ‘노래 속의 대화’라는 공연이 그렇다. 잘 꾸려진 무대가 아니더라도 그는 관객이 한 명이라도 있는 곳이면 어디든 직접 찾아갔다. 가까이서 음악을 듣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자리라면 기꺼이 응했다.
무대와 객석의 경계가 사라진 공간에서 그는 관객들과 마주 앉아 노래를 불렀다. 음율 사이를 잇는 하얀 여백 위에 누구는 자기 이야기를 그려 넣었고, 누구는 참고 있던 눈물을 쏟아냈다. 이때만큼은 서로가 서로에게 곁을 내어주고 힘이 되어주는 존재가 된다고 그는 말했다.
“잔존 청력이 있는 청각장애인 한 분을 관객으로 만난 적이 있어요. 집에서 혼자 음악을 들을 땐 괜찮지만, 공연장에만 가면 소리가 웅웅대서 현장을 즐기지 못한다고 아쉬워하셨어요. 그런데 ‘노래 속의 대화’로 그 분을 가까이서 뵈니 입술을 보며 노래를 선명하게 들을 수 있어서 반가웠다고 하더라고요. 그때부터 문자 통역과 수어 통역에 대한 인식이 생겼어요.”
그는 2년 전 앨범 발매 기념 공연을 준비하면서 처음으로 배리어프리 공연을 기획했다. 경사로와 엘리베이터를 갖춘 홍대의 한 라이브카페에 150여 명의 관객을 초대했다. 지난 6월 공연에는 스크린 형태의 문자 통역만 제공했지만, 이번 공연에는 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에서 연이 닿은 통역사와 함께 수어 통역을 추가했다.
배리어프리 공연을 위한 시와의 시도들은 조금씩 확장되고 있다. 그는 앞으로 “발달장애인도 올 수 있는 공연”을 꿈꾸고 있다. 그러면서 장혜영 정의당 국회의원의 발달장애인 동생 장혜정 씨가 그의 공연을 보러 왔던 당시를 떠올렸다.
“공연 중에 혜정 씨가 저한테 말을 건네고 싶어 했는데, 그 말을 받아 대화하면서 노래하고 싶더라고요. 객석이 조용하기만 하라는 법이 있나요. 조용하기만 한 공연이 과연 좋은 공연인지, 누구나 와서 함께 즐길 수 있는 공연이 진정 평화로운 공연이 아닐지 생각했어요.”
최근 들어 장애인 관객의 문화예술 접근권을 보장하기 위한 배리어프리 움직임이 활발하다. 지난 3월 가수 이랑은 ‘문자 통역 신청 매뉴얼’을 만들어 온라인에 배포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관련 법제는 여전히 미비하다. 전국 17개 광역자치단체 문화기반시설 중 배리어프리 인증 비율은 2020년 기준 4.56%에 그쳤다.
시와는 이 같은 개인적인 차원의 시도들이 우리 사회의 상식이자 표준이 되었으면 한다고 했다. “제 공연은 결과적으로 장애인의 문화예술 접근권을 보장하는 방향과도 맞닿아 있어요. 제가 이런 공연을 열고 노래를 한다는 사실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지면 좋겠어요. 큰 돌을 움직이려면 오랜 시간이 걸리니까, 저처럼 각자가 할 수 있는 몫을 하나씩 해나가는 개개인이 많아졌으면 해요.”
출처 : https://www.beminor.com/news/articleView.html?idxno=24169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