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회 일상속의 장애인-스토리텔링 공모전’ 수상작 소개-16
장려상 ‘1과 5 사이’
에이블뉴스, 기사작성일 : 2022-10-11 08:51:27
밀알복지재단이 최근 ‘제8회 일상속의 장애인-스토리텔링 공모전’을 진행했다.
스토리텔링 공모전 ‘일상 속의 장애인’은 장애인과 관련된 일상 속 이야기들을 통해 장애인식개선을 도모하고자 2015년부터 진행되고 있다.
올해 공모전 결과 박관찬씨의 ‘청년은 오늘도 첼로를 연주합니다’가 보건복지부 장관상의 영예를 안았으며, 총 19편이 수상했다.
에이블뉴스는 총 19회에 걸쳐 공모전 수상작을 연재한다. 열여섯번째는 장려상 수상작인 이정식 씨의 ‘1과 5 사이’이다.
1과 5 사이
이정식
떠난 버스는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
종착지에 도착하기까지 탈 사람과 내릴 사람을 싣기 위해 정해진 행선지를 부지런히 이동할 뿐이다. 버스를 놓치면 다음 버스가 오기까지 기다리면 된다. 탈 것과 타는 것과 운전하는 행위 사이에는 필연적인 대기시간이 발생하며 정해진 버스 노선의 운행시간 사이에는 버스가 떠났다는 표현은 여행이 아닌 일상에서는 사용할 일이 적다. 버스를 놓치면 그 자리에서 기다리거나 다른 탈 것을 이용하면 그만이다.
버스가 떠났다.
형과 나는 버스를 떠나보내야 했다. 정류장에 도착해 미리 기다리고 있었음에도 다른 승객들이 보이지 않을 때에는 버스는 우리를 태울 생각이 없었던 것인지 정류장에 서지 않고 지나치는 일이 종종 있었다. 휠체어가 탑승할 수 있는 저상버스는 일반버스보다 대기시간이 더 길기도 하지만 승객으로 만원인 버스에 휠체어로 올라선다는 건 많은 불편한 상황들을 야기했다. 가령 출퇴근 시간에 쫓기는 이들은 버스가 멈추고 리프트를 내려 휠체어 이용객이 탑승하기 위해 빚어지는 시간을 반기지 않는 게 분명해 보였다. 힐끗 휠체어를 내려 보는 시민들의 시선으로부터 초조함과 불편한 기색들을 느끼기도 했으니까.
심지어 휠체어가 들어서야 하는 자리에 앉은 승객들은 자리를 양보해 주지 않았다. 접이식 의자를 올리고 그 자리에 휠체어가 고정될 수 있도록 시민들에게 배려를 부탁하고 휠체어를 탄 형에게 안내를 해야 하는 기사님을 만난다는 건 아주 드문 일이었다. 그래서인지 형과 나는 버스를 타는 것을 싫어했다. 특히 사람들로 붐비는 시간에는 자연스럽게 주변 전철역을 찾게 되었다. 사람이 많은 버스 안은 척박하고 험한 밀림이었고 우리는 그 밀림 안을 헤치고 들어간다는 것에 겁을 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형보다도 내가 형과 같이 버스를 타는 게 싫어진 일이 있었다.
이른 오전이었고 버스 안은 교복을 입은 여학생들이 많이 보였다. 형은 휠체어 지정석에 있었고 난 빈자리에 앉아 형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나이라는 말이 적절한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학생들은 활력이 넘쳤고 쾌활했으며 웃음소리와 목소리가 컸다.
누군가에겐 닫힌 공간에서의 작은 소란스러움이 불편했을 수도 있겠지만 난 학생들의 밝은 목소리가 좋았다. 나도 그들의 나이에는 누군가의 눈치를 보지 않고 친구들과 웃고 떠드는 것에 집중했으니까. 그러다 어떤 한 학생의 말이 귀에 들어와 나가지 못했다.
친구를 비하할 의도는 없었겠지만 ‘너 장애인이냐’라는 한 학생의 목소리에 기분이 무척 가라앉았다. 우스갯소리로 친구를 얕잡아 했을 그 말이 누군가에겐 오랜 시간 동안 쌓인 상처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그들과 같이 타고 있는 버스 안에는 휠체어를 탄 형이 앉아 있었기에 난 형이 그 학생들의 말을 들었을까 버스에서 내리기까지 신경이 곤두서버렸다.
버스에서 내리고 형에게 말했다.
“형 우리 앞으로는 웬만하면 제가 좀 더 걸어도 되니까 지하철 타고 다니면 좋겠어요.” 물론 그전에도 비슷한 상황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나이가 지긋한 어떤 분으로부터 몸이 불편한 사람이 집에 있지 왜 집 밖에 돌아다니느냐는 말을 들은 일도 있었다.
우리는 버스를 기다렸다.
버스를 기다리는 건 형과 나만이 아니었다.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장애인 해변 캠프에 가기 위해 모인 형과 누나들, 그리고 장애인 활동 지원사 선생님들 수십 명이 공원에 모여 휠체어 리프트 버스를 기다렸다. 장애를 갖고 태어났다는 이유로 집에서 나오지 못하거나 시설로 보내져 평생을 살아야 했던 사연이 아니더라도 휠체어로 이동한다는 건 현실에서 많은 제약에 부딪히는 일이다. 그건 휠체어가 계단을 올라갈 수 없는 비장애 중심의 건축 구조물의 영역을 넘어 산과 바다처럼 일정한 필요조건을 갖춰야 방문할 수 있는 장소는 장애인에겐 도달하기 어려운 불가능의 영역이 되어버린다.
장애인 해변 캠프만 하더라도 턱이 없는 샤워장이나 모래사장 위로 휠체어가 이동할 수 있도록 플라스틱 합판을 조악하게 깔아 놓았지만 휠체어 리프트 차량과 이동과 체류에 소요되는 비용이 없다면, 지불능력이 없는 장애인 당사자는 갈 수 없는 곳일 뿐이다. 그건 기초생활수급비와 장애인 연금으로 생활하는 이가 도시에서 복지 혜택으로 지하철을 무료로 이용하는 일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다.
긴 시간 버스를 타고 도착한 바다는 누군가에겐 태어나서 처음 방문하는 바다이자 마지막으로 방문하는 바다였다. 처음이자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한 사람의 삶의 순간을 같이 나누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일렁이듯 움직였다. 장애인 활동 지원사 선생님의 양손을 잡고 바다로 걸어 들어가거나 튜브를 착용하고 바다에 들어간 형과 누나들은 파도에 따라 다 같이 출렁이며 물 위에 떠있었다. 몸을 움직이지 못해 긴 튜브 위에 누워있던 한 누나가 햇빛에 노출돼 화상을 입는 작은 사고가 있었지만 2박 3일의 시간 동안 우리는 행복했다. 몇 번의 낮과 밤의 시간을 같이 보내며 웃고 또 웃었다.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그들이 집에서 먼 곳으로, 더 멀리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수단이 많아지길 진심으로 바라며 창가에 앉아 생각했다. 그들이 혼자서도 바다로, 섬으로 아주 먼 곳으로 더 나아갈 수 있는 이동할 권리를 가질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불현듯 겨울 바다의 바람이 생각나 떠나고 싶은 충동의 순간들이 그들에겐 생각과 상상으로만 그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그것이 먼 미래에 내맡기는 기대로 끝나지 않기를 바라며 창밖을 보았다.
두 세 정거장의 거리를 걷는 게 익숙해진 무렵이었다. 한여름의 열기와 습도가 높은 날이면 쉽게 지치기도 했지만 휠체어에 앉아 자세를 바꾸지 못하는 형은 두 발로 보행하는 나보다도 더 많은 땀을 흘렸다. 충무로역 3호선에서 4호선으로 환승하기 위해 역 승무원을 호출했다. 충무로역은 일반적인 지하철역보다도 지하의 깊이가 높은 편이었다. 승무원이 오기 전에 난 형에게 잠시 양해를 구하고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에 탑승했다.
승무원이 오고 휠체어 리프트를 내리고, 리프트에 탑승하고 올라가는 과정의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궁금했다. 난 위에 올라갔고 다시 내려갔다. 그 사이 승무원이 도착해 휠체어 리프트를 작동시키고 있었다. 휠체어 리프트를 작동하면 나오는 노래는 모든 지하철역이 동일했다. 난 위에 있던 리프트보다 더 빠르게 내려갔다. 왜 휠체어 리프트의 음악은 항상 같은 음악일까. 적어도 휠체어 리프트를 이용할 때는 사용자가 원하는 음악이 나오면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탑승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난 다시 올라갔다. 형은 그 사이 밑에 도착한 휠체어 리프트에 올라가고 있었다. 난 에스컬레이터에 올라서고 내려가길 다섯 번은 반복했고 그제야 형은 지하에서 4호선으로 환승할 수 있는 위로 올라갈 수 있었다. 형이 층을 한 번 올라서기 위한 시간에 난 다섯 번을 움직였다. 그 한 번과 다섯 번의 사이의 시간은 단지 장애와 비장애로 압축시켜 설명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평생을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길 반복하면서 살아왔던 형의 삶의 단면이었다. 언제까지나 형의 휠체어 옆에 있을 순 없겠지만 적어도 나와 형이 하루를 살아가는 방식의 시간이 다르게 흘러가는 그 사이의 면 옆에 있는 동안에는 그를 응시하고 쓰다듬어 주고 싶었다. 한 번과 다섯 번 사이의 틈새에서 그와 내가 서로의 나약함을 인정하고 삶의 균형을 맞춰나가길 바라면서. 아주 천천히 긴 시간이 필요하다 하더라도 그와 내가 우리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게 익숙해지는 시간을 기다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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