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장벽의 도시⑤] '차별없는' 공간이라는 불가능한 약속을 멈출 수 없는 이유
작성자 2022-11-02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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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애나랩 '차별없는가게' 프로젝트
내가 나라는 이유로 세상이 좁아지는 사람들이 있다. 지하철 입구의 계단에 가로막힌 휠체어 장애인이, ‘노키즈존’ 카페에 들어갈 수 없는 어린이가 그렇다. 화장실을 맘 편히 쓸 수 없는 노동자도, 식당의 키오스크 앞에서 좌절하는 노인도 마찬가지다.
경향신문은 지난 6일부터 창간기획 ‘투명장벽의 도시’에서 한국 사회의 약자들이 마주치는 물리적·심리적 장벽, 이로 인한 도시 공간의 불평등 실태를 들여다봤다. 누구나 자유로이 드나들고, 누구에게나 자리를 내어주는 환대의 공간은 어떻게 실현될 수 있을까. 이는 도시행정의 임무이겠지만, 민간에서도 이런 목표점을 향해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다. 독립예술창작집단 다이애나랩은 2018년부터 ‘차별없는가게’ 프로젝트를 이어오고 있다. 다이애나랩을 기획한 시각예술가 백구(김지영)·신원정·유선 세 사람의 목표는 “장애 등 본인의 정체성을 이유로 쫓겨나거나 불안해하지 않을 수 있는 공간을 늘리는 것”이다. 본업도 아니고 수익이 발생하는 것도 아닌데, 공공기관 공모 사업비를 받아 공간을 바꿔주기까지 한다. 사회운동 같기도, 예술활동 같기도 한 이 실험이 햇수로 5년째. 카페, 식료품점, 빵집, 음식점, 병원, 약국, 운동센터, 서점 등 30여곳이 참여하고 있다.
지난 16일 백구씨, 유선씨와 만난 서울 연희동의 카페 보틀팩토리도 이 프로젝트에 참여 중이다. 카페 입구에 붙어있는 씨앗 모양의 ‘차별없는가게’ 스티커는 “지역사회 곳곳에 차별없는가게가 심어지고 퍼져나가길 바라는 희망”을 나타낸다.
다이애나랩의 유선씨와 백구씨(왼쪽부터). 우철훈 선임기자- 차별없는가게는 어떻게 시작됐나.
“다이애나랩은 사회적 소수자와 함께하는 표현을 연구하고 실행하는 그룹이다. 셋 다 노들야학의 예술창작 수업을 통해 장애인을 만난다. 주변에는 성소수자, 비건 등 소수자성을 가진 친구도 많다. 이런 우리가 함께 들어갈 수 있는 가게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가게에서 최소한 쫓겨나지 않았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이 프로젝트를 시작한 계기였다.”
- 누군가의 정체성은 단일하지 않다.
“발달장애가 있는 친구와 식당에 간 일이 있다. 친구가 탁자를 쾅 치는 행동을 했더니 휠체어 손님도 환대하던 사장님이 나가달라고 했다. 장애의 유형은 다양하고, 아이를 동반한 사람이나 뭔가 특이해 보이는 사람들 역시 입장을 거부당하는 경험을 한다. 어느 한 대상을 차별하지 않는다고 해서 다른 차별이 해결되지는 않는다.”
- ‘모든’ 차별이 없는 공간은 현실에서 불가능한 것 아닌가.
“프로젝트 소개글로 답변을 대신하고 싶다. ‘차별없는가게가 완벽하게 차별이 없는 공간을 검열하거나 인증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낯선 상대방을 이해하고 존중하려는 최소한의 노력, 그 가능성과 과정에 대한 불가능한 약속을 한번 해보려는 것입니다.’ 어떤 공간의 입구에서 망설여야 했던 사람들의 세상이 넓어지는 것만으로도 의미있는 변화가 아닐까.”
제로웨이스트 카페인 보틀팩토리는 차별없는가게에 참여하면서 작지만 의미 있는 변화가 있었다. 입구에는 경사로가 설치됐고, 화장실은 성중립화장실로 바뀌었다. 내부는 휠체어가 다닐 수 있도록 테이블 간의 통로를 넓혔고, 점자 메뉴판도 갖췄다. 그냥 할 수 있을 듯싶지만, 막상 바꾸려고 보니 ‘장애 없는 성인을 기준으로 짜인’ 도시 공간의 물리적 제약은 컸다.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혐오발언을 하지 않으며, 나이, 성별, 성정체성, 성적지향, 장애와 혼인 여부, 국적, 피부색, 출신 지역, 학력, 가족관계, 직업 등을 이유로 차별하지 않는다”는 약속 앞에서 망설이는 업주들도 많았다.
‘차별없는가게’ 체크리스트의 마음접근성 항목. 다이애나랩 제공- 차별없는가게는 어떻게 섭외했나.
“프로젝트는 실태조사와 인터뷰, 전문가 자문, 약속문 만들기, 가게 섭외와 방문·교육 등으로 진행됐다. ‘보틀팩토리처럼 동물권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곳은 인권 감수성도 있지 않을까?’ 이렇게 서포터스들이 알음알음 섭외를 했다. ‘장애인은 괜찮은데 성소수자는 안 된다, 다 괜찮은데 노키즈존이어야 한다, 손님들 눈에 안 보이면 괜찮다, 오기 전에 미리 연락해야 한다’ 등등 많은 경계와 마주쳐야 했다. 모두에게 열린 공간과 점주의 인식을 중시했다.”
- 체크리스트를 만들었다.
“차별의 문턱을 없애기 위한 기준이 필요했다. 유엔 장애인권리협약 등 여러 자료를 참고해 19개 체크리스트를 만들었다. ‘공간 접근성’은 휠체어 경사로 등 물리적 조건의 개선을, ‘정보 접근성’은 음성·문자 안내 등 여러 장애를 가진 이와 소통하는 방식을, ‘마음 접근성’은 ‘모든 연령 환영’ 등 방문자에 대한 태도를 규정했다. 공간 접근성에선 이동식·고정식 경사로, 엘리베이터 등 가게 여건에 따라 적용할 수 있는 방식을 다양하게 고민했다. 서울이 계획도시가 아니라 가게마다 환경이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체크리스트를 모두 지키는 것은 이상에 가깝다. 그럼에도 차별을 끊임없이 환기하도록 하는 효과는 크다.”
- 접근성이 물리적 접근만을 의미하는 것 같지는 않다.
“접근성을 생각할 때 우리는 어떤 전시나 워크숍에 오지 못하는 누군가를 떠올린다. 휠체어를 타는 누군가는 계단이 있으면 못 올 것이고, 볼 수 없는 사람은 인쇄된 글만 있으면 읽지 못할 것이다. 지금 여기에 어울리지 못하는 누군가를 떠올릴 때 수많은 배리어(장벽)들을 생각하게 된다. 그걸 어떻게 바꿀지가 우리가 생각하는 접근성이다.”
- 배리어프리를 의미하나.
“배리어프리라는 말을 떠올리면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우선 한국에서 배리어 없는 공간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에서 그렇다. 차별없는가게의 전제 조건도 물리적 문턱을 없애는 것이다. 하지만 눈앞의 배리어가 사라진다고 보이지 않는 배리어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다중의 정체성을 갖는다. 우리 중 일부는 장애인인 동시에 여성이며, 퀴어이며, 비건이며, 아이의 양육자이기도 하고, 외국인이기도, 피부색이 다르기도 하다. 교육 수준이 낮기도, 가난하기도 하다. 배리어는 어디에나 있으며, 소수자뿐 아니라 거의 모두를 관통한다. 그런데 ‘배리어프리’라는 말을 쓰는 순간 이런 복잡한 현실이 감춰진다. 우리가 사용하려는 말은 ‘배리어컨셔스(conscious·의식하는)’이다. ‘눈앞의 배리어를 없앤 곳에도 여전히 배리어가 있기 때문에, 있는데 없다고 하기보다 오히려 배리어를 의식하고 서로 그 존재를 확인하는 것’(시각장애인 예술가 미쓰시마 다카유키, 미학자 요시오카 히로시가 제안한 개념)이다.”
- 서울이라는 도시 자체가 차별 위에 서있는 듯하다.
“같은 서울에 살면서도 다른 세계에 사는 듯한 느낌을 자주 받는다. 우리 주변에는 넉넉하지 않은 친구들이 많고, 아이를 낳지 않는 이도 많다. 얼마 전 아파트촌에 갔다가 유아차 수십대가 한꺼번에 지나가는 광경을 봤다. 일년치 유아차는 다본 것 같았다. 닫힌 커뮤니티 안에서 계급적 격차를 본 느낌이었달까. 사는 공간이 같다고 생각하지만 굉장히 다를 수 있다. 이를테면 장애를 가진 사람은 집이나 시설에만 있어야 한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려면 활동지원사와 스케줄을 맞추고, 전동휠체어를 우비로 씌우고, 주변에 갈 카페가 없어 장애인콜택시를 불러야 할 수도 있다. 누군가에게 5분 걸리는 일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5시간의 일이 되는 것이다.”
차별없는가게 목록에 들어간다고 휠체어나 유아차가 몰려오는 일은 없다. 매출이 크게 늘지도 않는다. 다만 이전에는 올 수 없던 낯선 손님들이 조금씩 눈에 띈다. 업주들은 ‘물어물어 찾아온 손님들과 대화하며 새로운 세상을 만났다’는 피드백을 다이애나랩에 전해온다. 다이애나랩은 책자로 만든 ‘차별없는가게 가이드북’과 웹페이지‘차별없는가게(wewelcomeall.net)’‘공간학교(wwa.school)’를 통해 생각을 나눈다.
‘차별없는가게’의 접근성 정보.- 앞으로의 계획은.
“서울 외에 제주에도 차별없는가게가 두 곳 생겼다. 지난해 제주에서 열린 공공예술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만난 친구들이 섭외를 하고 있다. 서귀포의 한적한 시골에서 열린 프로젝트였는데 주민들로부터 ‘우리 동네에는 장애인이 없다’는 말을 듣곤 했다. 그런데 실은 없는 게 아니라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거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다보니 서울 바깥에 차별없는가게가 더욱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그렇다면 차별없는가게 숫자가 너무 적다.
“가게를 100개로 늘리는 식의 실적주의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차별없는가게 프로젝트를 알고 연락을 주시는 분들이 종종 계신다. 막상 이야기를 나눠보면 조건에 맞지 않는데도 일종의 올바름을 인증받고 싶어하는 듯한 경우가 많았다. 프로젝트는 지속하되 함부로 확장하지는 않으려고 한다. 다만 우리가 생각하는 차별없는가게의 개념과 기준이 널리 펴져나갔으면 좋겠다. 관심이 있다면 가이드북과 웹사이트를 통해 본인의 가게나 공간에 적용해볼 수 있다.”
- 시민 모두가 도시의 주인이 되는 ‘공간민주주의’가 중시되고 있다. ‘모두를 위한 공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어떤 공간이 좋은 공간일까.
“정책의 변화가 필요하다. 하지만 인식의 변화가 동반되지 않는다면 역효과가 날 수 있다. 이를테면 좁은 공간에도 일률적으로 휠체어 경사로를 설치하도록 하면 잘 받아들여질까. 물리적 조건 못지않게 마음의 태도가 중요한 까닭이다. 우리가 말하는 차별 없는 공간은 표백된 공간이 아니다. 발달장애인이 오면 불편할 수 있다. 그러나 거기서 그치지 말고, 왜 불편을 느끼는지 직접 만나는 경험을 해보자는 것이다. 내가 차별하는 사람이 될 수도, 반대로 차별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인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때로 차별없는가게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누군가는 이 공간에서 편안함을 느끼지 않을까. 여기라면 괜찮다고, 조금 편하게 수다를 떨어도 된다고. 그런 순간들이 많아지면 세상이 조금씩 바뀌어 있지 않을까.”
- ‘투명장벽의 도시’에서 하고 싶었던 얘기와도 비슷하다.
“우리 주변이 투명장벽으로 가득하다고 생각한다. 빤히 보이는데 막혀있고, ‘다 올 수 있다’고 했는데 들어갈 수 없는 공간이 너무 많다. 예술계에서 ‘모두의 ○○○’과 같은 표현이 유행했다. 그런 행사를 주관해본 큐레이터가 ‘정말 힘들었다’고 고백하더라. 청각장애, 시각장애 등등 모두를 고려하다보니 ‘모두’에 도달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모두를 위한다’는 말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하지만 다가가기 위한 노력을 멈출 수는 없다.” <시리즈 끝>
출처 : https://v.daum.net/v/20221025060006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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