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엄마는 너를 기다리면서, 희망을 잃지 않는 법을 배웠어』. 포스트잇을 빼곡히 붙여 가면서 읽었다. 사진 울림 생애 가장 고통스러웠던 둘째 임신 후기 기다리던 둘째를 임신하고 나는 CF에 나오는 것처럼 공원에서 우리 네 식구가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상상을 하곤 했다. 딸 하나 아들 하나, 같이 공놀이도 하고 배드민턴도 치며 깔깔 웃는 그 상상 속 둘째는 키가 크고 운동을 잘 하고 공부도 제법 하고 친구가 많은 훈남 아들이었다. 6킬로그램이 빠지는 혹독한 입덧을 하던 중 매트리스까지 흠뻑 적실만큼의 하혈 때문에 산부인과에 입원했다. 유산방지제 링거를 맞은 채 병실에 누워서 옆방 신생아 울음소리를 들으며 제발 저 아이처럼 무사히 자라서 세상에 나오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퇴원을 하면서 팔에서 피를 뽑아 기형아 검사를 했는데 다운증후군일 가능성이 1:6으로 매우 높게 나왔다. 퇴원 후에도 두 달을 더 누워만 지내면서 배 속의 아이가 다운증후군일 경우에 대해 생각했다. 의사는 양수가 흘러 유산 위험이 있기 때문에 양막에 바늘을 꽂는 양수검사는 권하지 않는다며, 목투명대도 정상 범위인 걸로 보아 산모인 내 나이가 많아서 고위험군으로 나온 것 같다고 말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장애아의 엄마가 된다는 게 진짜 내 미래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두 달 후 일상생활을 해도 되겠다는 의사의 말에 가족들은 모두 기뻐했다. 잘 버텨준 아이에게 고맙다고, 기특하다고들 했다. 그런데 한 달 후 정밀 초음파 검사에서 십이지장과 심장 기형이 의심된다는 소견을 듣고 대학병원으로 옮겼다. 24주에 뒤늦게 양수검사를 했고 다운증후군 확진 판정을 받았다. 지옥 같은 임신 후기를 보낸 뒤 아이를 만났다. 그 시기가 끔찍했던 이유는 모두가 아이를 낳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다. 책 『엄마는 너를 기다리면서, 희망을 잃지 않는 법을 배웠어』(아래 『엄마는 너를 기다리면서』, 잔드라 슐츠, 손희주 옮김, 생각정원, 2020)의 저자 잔드라 슐츠가 겪었던 것처럼. 『엄마는 너를 기다리면서』는 임신중절이 합법인 독일에서 다운증후군을 가진 마르야를 만나기까지 엄마의 고통, 고민, 갈등, 기쁨, 그리고 간절함이 솔직하게 담긴 책이다. 나는 이 책의 저자와 공통점이 매우 많았다. 임신 초기에 하혈을 하고, 다운증후군임을 알고, 병원을 옮기고, 정밀 검사를 할 때마다 새로운 장기 이상을 발견하는 등의 과정이 내 일기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한 줄 한 줄 읽어나갈 때마다 둘째 임신 시절의 슬픔과 고통이 떠올라서 몇 번이나 책장을 덮었다. 지금도 서평을 쓰기 위해서 다시 책을 들춰보는데 가슴이 뻐근하고 목이 잠긴다. 장애아를 낳겠다고? “다른 사람들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지만, 나는 마치 들은 것 같았다. “어떻게 건강한 애도 아니고 장애가 있는 아이를 낳기로 결정한단 말이야?” 마치 장애가 있고 없는 두 유형의 삶이 상품 가판대에 올라 사람들의 선택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27쪽) 이 책의 저자 잔드라는 어머니가 “너의 선택”이라고 말한 게 “마치 아픈 아이를 선호한 것처럼 들렸다”고 썼다. 내 가족들도 나에게 임신중절을 하지 않으면 다운증후군 아이를 낳기로 ‘선택’하는 것이라고, 그 선택은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 거라고 말했다. 나는 장애아를 배 속에 넣겠다고 선택한 적이 없다. 나에게는 태아의 염색체를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아들이길 바랐던 첫째가 딸이었던 것처럼, 다운증후군 역시 내가 원한다고 가지거나, 혹은 피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저 양수검사 전과 마찬가지로, 유산 위험을 겪을 때와 같은 마음으로, 내 아이를 무사히 만나고 싶었을 뿐이다. 장애아를 낳기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내 아이를 낳기로 결정한 것뿐이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 모두가 기다리던 둘째 아이가 양수검사 결과가 나오는 순간, 가족의 행복을 깨트리는 방해물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내 결정에 온 가족의 삶이 달려있다고도 했다. 그건 고위험군 임신부가 감당하기에 너무나 큰 부담이었다. 잔드라는 “이 결정은 너무나 고통스럽기 때문에 비인간적”이라고 말한다. 상상하던 건강한 아이가 아닐 거라는 건 내게도 받아들이기 힘겨운 일이었다. 남편도, 가족들도 머릿속에 그리던 아이의, 손주의, 조카의 모습이 있었을 것이다. 잔드라는 책에서 “배 속에 있는 아이보다 머릿속에 자리 잡았던 아이의 모습이 더 중요한” 것이냐고 질문을 던진다. 장애 유무, 건강 상태와 상관없이 모든 부모는 자신의 아이가 “특별히 예쁘고, 똑똑하고, 강하다고 상상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가 자신의 상상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첫째를 키울 때 아이가 더 활발하기를, 더 호기심이 많고, 더 사교성이 좋기를 기대했다. ‘부모 됨’이란 상상 속 아이에게 작별을 고하고 내 앞에 있는 아이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사랑하게 되는 과정을 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저자는 “어떤 아이가 나올지는 우리가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자고 제안한다. 포스트잇이 빼곡히 붙어 있는 책. 사진 울림 다운증후군 진단과 임신중절 독일은 임신 12주까지 합법적으로 임신중절을 할 수 있고 이후에도 ‘다운증후군’이라고 진단받은 임신부는 ‘의학적 근거에 의한 임신중절 요건’을 충족하여 수술을 받을 수 있다. 독일인 저자는 의료진과 임신중절에 대해 충분히 상의할 수 있었다. 독일에서는 모체를 떠나 살 수 있는 독자 생존 시기가 되기 전까지는 임신중절이 가능하지만, 22주 차부터는 태아의 심장에 주사를 놓는 영아살해 방법으로 수술을 하므로 윤리위원회가 관여한다고 한다. 한국에서 양수검사를 한 나는 이와 관련된 어떠한 정보도 얻지 못했다. 둘째 임신 시기는 헌법재판소의 낙태 불합치 판결이 나기 전이었기에 검사 결과를 전한 대학병원 의사는 “우리는 아무것도 해줄 수 있는 게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만약 중절을 원하면 다른 병원을 알아보라는 뜻이었다. 가족 중에는 불법 수술을 하는 병원을 알아보겠다는 사람도 있었고, 실제로 연락을 취한 사람도 있었다. 만약 우리나라에서도 다니던 산부인과에서 안전하게 중절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면 나도 고민을 더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의료보험의 혜택을 받을 수도, 환자로서의 권리를 주장할 수도, 내 생명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도 없는 수술을, 그로 인해 범법자까지 되어야 하는 수술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낙태 합법화에 찬성한다. 원치 않는 임신으로 고통받는 여성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임신 초기에 몸에 큰 부담을 주지 않는 선에서 약물로 중지를 할 수 있는 기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가 법으로 이를 막고, 여성과 의사만을 처벌하는 것은 큰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 경우는 원하던 임신이었다. 계획에 따라 가진 둘째였고, 아이를 낳아 키울 수 있는 환경이었다. 기다리던 아이가 장애가 있다고 밝혀지면, 아니 추정이 되면, 갑자기 내 아이가 아니게 되는 걸까? 어제까지 배를 쓰다듬으며 태명을 부르고 노래를 해주다가, 오늘 산전 검사에서 장애아인 것으로 보이면, 너는 내 아이가 될 자격이 없다고, 이 세상에 나올 자격이 없다고 내 몸에서 억지로 떼어내야 하나? 저자는 “내가 마르야를 죽이면 내 속의 어떤 것도 함께 죽을 것”이라며 “그것은 내 몸을 스스로 잘라내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썼다. 나 역시 알았다. 배 속의 아이를 죽이면 남은 삶을 온전히 나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첫째 아이의 눈을 바로 볼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을. 내일 첫째에게 사고가 생겨 장애를 가지게 된다고 해서 아이를 버리거나 내 사랑을 철회하지 않듯, 나는 양수검사 전에 그랬듯이 배 속의 둘째에게 주던 사랑을 오늘도 내일도, 내년에도, 죽는 날까지 주기로 했다. 마르야에게 엄마인 잔드라밖에 없었듯, 내 배 속의 둘째에게도 나뿐이었다. 아이를 지켜줄 사람은. 다운증후군을 가진 아이 엄마가 바라는 세상 아이의 장애를 알고도 낳기로 결심한 나는 대단한 사람이고 훌륭한 엄마일까? ‘다운증후군을 가진 아이를 기꺼이 낳겠어!’라고 했지만 장애를 가진 아이를 키우는 건 처음이라 아이의 장애를 실감하는 매 순간 나는 무너지고 좌절한다. 이 책의 저자 역시 “임신중절을 선택하지 못했을 뿐”이라고, 대단한 윤리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라 단지 “사랑하기 때문에 아이를 낳았다”고 고백한다.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보다 우리 삶을 인정하는 것이다.” (256쪽) 용감하다고 추켜세우는 말도, 불쌍하다는 동정의 시선도 아닌 다운증후군을 가진 아이가, 사람이 우리 곁에 같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그저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는 것, 내가 사람들에게 바라는 모습이다. 잔드라와 마찬가지로 나는 더 정밀한 산전검사로 장애가 있는 사람을 아예 더 이상 태어나지 못하게 하는 세상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일이 우리 모두에게 일상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