휠체어 탄 장애인이 문을 열고도 못 들어간 이유
작성자 2019-08-12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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휠체어 탄 장애인이 문을 열고도 못 들어간 이유
[서평] 김원영 '희망 대신 욕망'.. 모두가 '보이는 존재'로 살기 위한 조건
[오마이뉴스 글:송주연, 편집:이주영]
아이와 함께 대구 시내 번화가를 걷고 있을 때였다. 영화관과 식당이 들어선 한 건물 앞에 휠체어를 탄 장애인 아저씨가 멈춰서 있었다. 아저씨는 한 팔로 건물의 문을 힘껏 밀었고, 얼른 휠체어의 바퀴를 굴렸다.
하지만 휠체어가 채 움직이기도 전에 건물의 문은 다시금 제자리로 돌아왔다. 아저씨는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할 수 있는 한 힘껏 문을 밀고, 최대한 재빠르게 휠체어 바퀴를 굴렸지만, 육중한 건물의 문은 휠체어 바퀴가 구르기 전에 아저씨의 앞을 가로막았다.
마침 그 건물의 지하주차장에 차를 주차해 두었던 아이와 나는 얼른 뛰어가 문을 잡아 주었다. 우리는 함께 건물 안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서로 반대 방향의 버튼을 누르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저씨는 주섬주섬 휠체어에 걸어 놓은 검은 비밀봉투에서 초콜릿 과자를 꺼내더니 아이에게 건넸다. 아이가 내게 '받아도 되냐'는 시선을 던지는 사이, 아저씨가 기다리던 상향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인사도 건네기 전에 아저씨는 엘리베이터 안으로 사라졌다.
아이와 나는 서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문을 잡아준 것일 뿐인데 아저씨가 과자까지 주시며 고마워했던 이유는 뭘까? 왜 이 건물을 만든 사람은 버튼으로 열리는 문이나 자동문을 만들지 않고 저렇게 무거운 문을 밀게만 만든 걸까? 사실 우리도 짐이 많은 날엔 저 문 열기 힘들던데.
그리고 이렇게 결론지었다.
아직 많은 사람들 눈에는 장애인이 보이지 않는 거 같아. 건물을 만든 사람도 장애인의 존재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기에 저런 식으로 문을 달았을 거고, 우리말고 지나가던 사람들의 눈에 장애인 아저씨는 잘 보이지 않았을 거야. 그래서 우리가 그 분을 알아봐줬을 때 고마워서 과자까지 주신 게 아닐까.
나는 내가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라는 사실을 차츰 깨달아갔다. (33쪽)
▲ 건물의 현관문은 아무리 힘껏 밀쳐도 휠체어 바퀴를 올리기도 전에 제자리로 돌아와 아저씨의 앞을 막아섰다. |
ⓒ pixabay |
저자는 선천적으로 골형성부전증을 가지고 태어났다. 아주 작은 충격에도 뼈가 부러지는 이 질환으로 저자의 어린 시절은 골절과 수술을 반복하는 시간들로 채워진다. 15살이 될 때까지 방 안에서 창밖으로 학교에 오가는 아이들을 관찰하며 지냈던 그는 15살이 되던 해에 경기도의 한 재활학교에 입학한다.
재활학교를 처음 방문했을 때, 저자는 다른 장애인들의 모습에 충격을 받는다. "태어나서 나 이외에 장애인이라는 존재를 본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중략) 절대 그들과 함께 하고 싶지 않았다(52쪽)." 하지만, 달리 교육받을 방법이 없었던 그는 이 곳 기숙사에 입소한다. 저자는 이곳에서 교육을 통해 달라지고, 할 수 있는 게 많아지는 자신을 발견하며, 인지적 능력을 꽃피운다. 그리고 일반 고등학교 입학에 성공한다.
하지만 재활원 밖에 나서자마자 저자는 곧 깨닫는다. 바깥세상에서 장애인은 '보이지 않는 존재'였음을. 저자가 진학한 고등학교엔 장애학생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은 곳이었다. 휠체어 통로도 없었고, 기숙사는 높은 언덕 위에 있었다.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학교에 다니면서 저자는 매순간 자신이 '민폐'인 것은 아닌지 고민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학교에서 장애인은 '보이는 존재'가 된다. 학교는 각종 편의시설을 확충하며 장애에 대한 편견을 내려 놓는다.
분리된 세계
꽤 공부를 잘했던 그는 서울대학교에 진학한다. 대학에서 그는 장애의 사회적 모델에 기반을 둔 장애인 인권운동을 만난다. 장애의 사회적 모델에 따르면, 장애는 개인의 생물학적 손상으로 발생되는 것이 아니다. "장애는 사회가 특정한 신체적, 정신적 특징을 수용할 수 있는 문화적, 물리적 여건을 갖추고 있느냐에 따라 규정된다(157쪽)."
우리는 장애를 극복하려 애써 노력하지 않는다. 장애로 인한 차별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167쪽, 2005년 4월 20일 장애인의 날에 발표한 성명서 중에서)
▲ 김원영 저, <희망 대신 욕망> (푸른숲, 2019) |
ⓒ 송주연 |
여기까지 읽자 나는 지난 2년간 캐나다에 거주할 때의 일들이 떠올랐다. '통합교육'이 원칙인 캐나다에서 아이들은 장애를 가진 친구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버스와 지하철, 쇼핑몰 등에서 장애인들은 어디서나 잘 보였다.
그곳의 장애인들은 스키장에서 특수 시설을 이용해 스키도 탔고, 내 아이가 여름에 카약을 배울 때도 함께 했다. 장애와 함께 하는 것이 일상이 되는 곳에서 장애는 '전시'되지 않았고, 동정 받지도 않았다. 장애인에 대한 배려는 다른 소수자들을 비롯한 함께 사는 사람들 사이의 예의를 지키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저자가 지적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었다. 철저하게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분리된 한국의 시스템에서 장애인들은 그들만의 세계에서만 산다. 때문에 세상에서 장애인은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된다.
이렇게 분리되고 특별한 존재가 된 장애인들은 비장애인과 일상을 공유하기 힘들다. 이런 곳에서 장애인은 도움이 필요한 대상이 될 뿐이다. 물론 도움이 필요할 때도 있다. 하지만, '도움을 주는' 입장이라는 우월감이 작용하기 시작할 때 장애인은 누군가의 자존감을 세워주는 수단이다.
저자가 살면서 자신이 가치 있다 느꼈던 순간들은 장학금을 받고, 거리에서 도움을 받을 때가 아니었다. "자유로운 사람의 일상에도 내가 일정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고, 그들의 삶을 쓰다듬는 자격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녀가 나를 특별한 존재로 취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진정 특별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72쪽)." 즉 일상에서 '함께 함'을 느낄 때 그는 '보이는 존재'가 되고 세상과 통합될 수 있었다.
변호사가 된 현재도 여전히 두 세상의 괴리를 고민하고 있다는 저자는 함께 하는 '연대'야 말로, 장애인은 물론 우리 모두가 '보이는 존재'가 되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라고 강조하며 글을 맺는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자 극장 앞에서 만났던 장애인 아저씨가 다시 떠올랐다. 장애인 아저씨가 우리에게 그토록 고마워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 아니 혼자서도 극장문을 자유롭게 통과할 수 있는 세상, 장애인이 영화를 보러 가는 것이 특별한 일이 아닌 세상. 저자가 꿈꾸는 세상은 이런 곳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건물 설계부터 정책 수립까지 보통의 일상에 장애인을 비롯한 소수자들의 삶이 녹아들어 갈 때, 세상은 누구나 자신의 욕망을 표현하며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는 진정으로 평등한 곳이 될 것이다.
만약 당신이 나를 도우러 여기에 오셨다면, 당신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여기에 온 이유가 당신의 해방과 나의 해방이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라면, 그렇다면 우리 함께 일해 봅시다. (멕시코 치아파스 원주민, 180쪽)
출처 : https://news.v.daum.net/v/20190812091805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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