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고용한다 해놓고 잡일만 시키니 못 견디고 나온다"
작성자 2019-07-25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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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고용한다 해놓고 잡일만 시키니 못 견디고 나온다"
조호근 장애인고용안정협회 국장, 장애인고용지표(KDEI) 개발한 이유
능력을 인정받아 입사한 소프트웨어 회사였다.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고 입사 5년 만에 내가 만든 프로그램이 회사 간판 제품이 됐다. 그런데 팀장 승진을 며칠 앞둔 1998년 어느 날, 상사가 불러 말했다. “아무래도 호근씨는 승진이 힘들 것 같아. 팀장 되면 사람 만날 일이 많은데 호근씨는 다리가 불편하니까… 월급은 팀장 대우로 줄게.”
조호근 한국장애인고용안정협회(장고협) 국장은 20년 전의 일을 회상하며 “내가 다리가 불편한 2급 지체장애인이라서 승진이 안 된다는 말이었다. 돈을 더 받으며 일할 수도 있었겠지만 ‘이 회사에서 나의 비전(장래)은 없구나’고 느꼈다. 그 날로 바로 회사를 그만뒀다”고 말했다.
이 경험은 조 국장에게 가슴 아픈 일화로 남았다. 그러나 그가 향후 장애인고용 회사 평가지표, KDEI(Korea Disability Equality Index)를 개발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이 지표의 ‘비전’ 영역에는 ‘귀사에서는 승진 시 장애인이 불리하지 않다는 자료를 제시할 수 있는지’를 평가하는 항목이 포함돼있다.
고용노동부 사단법인 장고협은 기업이 장애인이 근무하기 좋은 환경과 정책을 갖추고 있는지 등을 조사하는 지표인 ‘한국형장애균등지수(KDEI)’를 개발 완료했다고 26일 밝혔다. 이전까지 장애인고용을 질적으로 평가하는 지표는 없었다. 3년여 간 이 지표 개발을 주도해온 조 국장을 24일 서울 영등포구 이룸센터에서 만났다.
장애균등지수(DEI)는 2015년 미국장애인협회(AAPD)와 기업단체 미국기업리더쉽레트워크(USBLN)가 공동 개발했다. 미국 기업들은 DEI 점수를 높게 받으면 기업이미지가 좋아지기 때문에 설문조사에 적극 협조한다. 장고협은 한국판 DEI를 개발하기 위해 USBLN 관계자, 한국공공정책개발원 등의 도움을 받아 여러 연구를 진행했다. KDEI는 채용, 노동 및 복지, 직장문화와 비전, 접근성 및 배려, 균등처우 등 5개 영역과 12개 세부 평가 항목으로 구성돼있다. 100점 만점인 이 평가에서 80점 이상을 받은 회사는 시장에 공개된다.
2016년 4월 주한미국대사관 후원으로 'DEI국내 적용방안 모색을 위한 전문가 초청 간담회'가 열렸다. 조호근 국장은 오른쪽에서 세 번째.KDEI 질문지에는 조 국장이 20년 간 5000명 이상의 장애인들을 상담한 경험이 녹아있다. 조 국장은 장고협에 있으면서 본인의 전문성, 적성과 맞지 않는 업무를 맡아 퇴사하는 장애인들을 가장 많이 봤다. “기업들은 비장애인을 뽑을 때 업무에 따라 직군을 다르게 모집하죠. 그런데 장애인을 뽑을 땐 ‘장애인 고용부담금을 물지 않기 위해 뽑아야하는 인원’만 따지다보니 직무 분석 없이 마구잡이로 모집합니다. 그러다보니 재능, 적성을 썩히면서 자신과 맞지 않는 일을 맡은 장애인들이 견디지 못하는 거죠.”
조 국장은 “장애 종류에 따라 적합 업무가 다를 수 있다”고 했다. 예를 들어 청각장애인은 시끄러운 장소에서도 정교한 작업을 할 수 있다. 시각장애인의 경우 청각이 상대적으로 발달해 음향효과를 시험하는 업무 등에 적합하다. 사소한 데 집착하는 특성이 있는 자폐장애인은 불량품 검사 등 단순 작업을 오래 맡아도 지치지 않고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래서 KDEI는 응답 회사가 ‘장애인을 채용하기 위해 직무분석을 실시한 자료를 제시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 또 국가에서 비용을 부담해주는데도 사업주가 알지 못해 활용하지 못하는, 지원 프로그램을 이용했는지를 확인한다. 예를 들어 5년 내에 ‘직무지도원’ 제도(지도원이 직접 사업장을 찾아가 장애인 작업 및 직무를 분석해주고 적응을 도와주는 제도)를 활용했는지를 묻는 것이다. 조 국장은 “최근 장애인 고용 기업 4군데를 대상으로 임시 테스트를 했는데 인사 담당자 모두 그런 제도가 있는지 모르고 있었다”며 “이 설문제도가 지원서비스 홍보 효과도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응답사가 화재 등 긴급 상황 시 장애인을 대피시킬 수 있는지’의 항목이 KDEI에 포함된 건 조 국장이 상담한 한 지체장애인의 트라우마를 잊을 수 없어서다. 휠체어를 탄 그 상담자는 회사 소방벨이 오작동으로 울리자 3분 만에 모두가 대피했고 사무실에 혼자 남았었다고 했다. “그 분은 휑한 사무실에 남아서 ‘만약 정말 위급한 상황이었다면?’이라며 스스로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이 회사에서 무슨 일이 나면 나는 죽겠구나’ 하는 생각이 꼬리를 물었고 그 분은 결국 퇴사했죠.”
고용노동부, 장애인고용공단은 매년 장애인고용 촉진대회 등을 열고 장애인 고용률, 해직률 등을 평가해 좋은 점수를 받은 기업에게 표창을 주고 있다. 그러나 장애인 업무 환경을 질적으로 따진 게 아니다보니 포상을 받은 기업에도 자진 퇴사하는 장애인들이 적지 않다는 함정이 있다. “한 지체장애인 분은 장애인고용 촉진대회에서 대상을 받은 회사에서 근무를 했는데, 본인과 맞는 업무 대신 다른 분야의 잡일을 맡았어요. 그런데도 상사가 ‘입사 몇 년 찬데 일처리를 느리게 하냐’고 항상 구박해 스트레스를 엄청 받다가 나왔죠. 양적 평가의 함정인 겁니다.” 조 국장이 말했다.
조 국장은 경제 단체들이 KDEI 개발에 참여하지 않은 게 아쉽다고 했다. 조 국장은 “미국 사례처럼 기업 단체와 장애인 단체가 함께 개발하면 좋을 것 같아 여러 단체들에 문의해봤지만 거부 당했다”며 “앞으로 우선 300인 이상 기업들을 대상으로 방문조사를 실시할 건데, 여기에라도 잘 협조했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강조했다.
안규영 기자 kyu@kmib.co.kr
출처 : https://news.v.daum.net/v/20190725070049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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