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김민준 기자]
1년 전인 2018년 3월 9일부터 18일까지 평창에서 패럴림픽(장애인 올림픽)이 열렸다. 그런데 이렇게 쓰고 보니 정말로 열렸는지도 의심이 될 정도로 제대로 경기가 중계되지 않았다. 지난해 3월 6일 <스포츠조선>의 기사에 따르면, 당시 공중파 3사는 패럴림픽을 두고 18시간 가량 중계 편성을 한 반면, 외국 방송사들은 그에 비해 3~4배 이상을 편성했다. 한국이 개최국임에도 불구하고 패럴림픽에 대한 방송사들의 관심은 차가웠던 것.
그나마 장애인 스포츠 관련 언론 보도들이 이뤄지는 경우에도, 내용을 살펴보면 '장애를 극복하고 메달을 거머쥐었다' 같은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는 걸 알 수 있다. 늘 이런 표현이 의아했다. 장애인이 스포츠 경기에서 좋은 성과를 내는 것이 장애를 '극복'하는 것인가? '장애인임에도 불구하고' 메달을 땄다는 뜻인 걸까? 그렇지 않아도 한국 사회에선 장애와 장애인에 대해 관심이 적은 편인데, 관심을 갖는 경우에도 보도 방향은 대부분 이런 식이었다.
비정상과 정상의 경계를 벗어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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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년 1월 7일 방송된 EBS <배워서 남줄랩> '나는 장애를 극복하지 않았다'편 중 한 장면 |
ⓒ EBS |
EBS <배워서 남줄랩>(아래 <남줄랩>) 역시 이런 현상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지난 7일 방영된 '나는 장애를 극복하지 않았다' 편에는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을 쓴 변호사 김원영이 출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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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년 1월 7일 방송된 EBS <배워서 남줄랩> '나는 장애를 극복하지 않았다'편 중 한 장면 |
ⓒ EBS |
"('장애를 극복했다'라는 말은) 평범하고 보통의 장애를 가진 수많은 사람들을 소외시킬 수도 있는 표현이에요. 현실에서 장애 때문에 존재하는 수많은 불리함이 존재하잖아요. 그런 불리함에 놓여 있는 사람들에게 '너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걸 못 하면 그 사람이 열심히 하지 않은 것처럼 이야기하는, 그런 문제를 내포하고 있어요."
김 변호사는 자신이 장애를 '극복'한 것이 아니라 일상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 장애를 다루는 일에 조금은 노련해진 것이라는 말을 한다. 사실 맞는 말이다. 흔히 '극복'이라고 표현하는 순간을 벗어나더라도 여전히 그들에게는 장애가 존재한다. 그저 그들은 상황에 맞게 적응했을 뿐이고, 좀 더 잘 살아남기 위한 방법들을 찾아냈을 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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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년 1월 7일 방송된 EBS <배워서 남줄랩> '나는 장애를 극복하지 않았다'편 중 한 장면 |
ⓒ EBS |
그러면서 미디어가 그리는 장애인의 모습들에 대한 이야기도 한다. 정형화된 장애인의 이미지를 재생산하는 미디어에 대한 비판은 최근 들어서 문제가 제기된 것이지, 예전에는 다들 알다시피 코미디의 소재로 곧잘 쓰여 왔다. 일상에서도 '벌칙'이라는 이름으로 몸과 정신에 장애가 있다는 식의 분장이나 묘사를 재밌다는 이유만으로 해오기도 했다. 이에 관해 사회자인 코미디언 김숙은 '무지에서 오는 개그'라고 지적한다.
랩 가사에 나오는 장애인 비하 표현에 대한 논의 역시 EBS가 아니면 보기 힘든 내용이 아닐까 싶다. 10~20대 사이에서 '병_신', '애자' 같은 표현들은 여전히 일상에서 쓰이고 있고, 특히 대중 문화에 영향을 주고받는 래퍼들은 별 문제의식 없이 가사에 이런 표현을 쓰는 경우도 있다. 랩 가사로도 종종 쓰이다 보니 SNS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표현들이 됐는데, 이제야 본격적으로 문제가 제기되는 모양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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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년 1월 7일 방송된 EBS <배워서 남줄랩> '나는 장애를 극복하지 않았다'편 중 한 장면 |
ⓒ EBS |
한 가지 예를 들면, 출연자 중 한 명인 래퍼 슬릭은 일전에 'Rap Tight'라는 싱글 곡에서 '병_신'이라는 표현을 썼다가 이후 SNS를 통해 사과한 적이 있다. 슬릭이 페미니즘과 기타 소수자 담론에 대해 활발하게 목소리를 내는 것으로 유명하기에 그나마 그것이 문제가 된 것이지, 랩에 부적절한 가사를 쓰더라도 보통은 '논란'조차 되지 않는다. 많은 경우 고민조차 부족하기에, 당장에 쓰고 안 쓰고의 문제를 떠나서 고민이라도 해야 한다는 김원영 변호사의 말에 매우 공감되는 이유다.
특별 게스트로는 1인 유튜브 채널 '굴러라 구르님'을 운영하는 구르님이 출연했다. 구르님은 뇌병변 장애가 있는 19살 고등학생으로, '우리 사회에는 장애인들이 많은데 왜 미디어에는 장애인의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없을까'라는 문제의식에서 유튜브 방송을 시작했다고 한다. '십말이초(10대 후반부터 20대 초반)에게 필요한 민주시민교육'이 <남줄랩> 방송 콘셉트인 만큼, 구르님을 섭외한 건 나이대가 비슷한 게스트를 통해 시청자에 더 가깝게 다가가려는 제작진 노력의 일환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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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년 1월 7일 방송된 EBS <배워서 남줄랩> '나는 장애를 극복하지 않았다'편 중 한 장면 |
ⓒ EBS |
꾸미기를 좋아하고, 게임도 즐기며, 학교 생활도 한다는 구르님. 장애가 없는 청소년들이 하는 일을 장애 청소년도 당연히 할 수 있음을 친근하게 이야기하는 시도가 늘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예전부터 '굴러라 구르님' 유튜브 채널을 시청하면서 나도 모르게 내 안에 있는 편견을 지워낼 수 있었는데, 그걸 EBS <남줄랩>을 통해 더 많은 이에게 보여줄 수 있어서 개인적으로 기뻤다.
"언제 장애가 낫는대?", "장애인치고 예쁘네"라는 말들을 제일 싫어한다는 구르님. 그의 말은 결국 정상과 비정상 사이에 뚜렷한 경계선을 긋는 우리 사회, 그리고 장애를 전시하고 '극복'의 대상으로만 삼는 사회 분위기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저 그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야기하는 것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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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년 1월 7일 방송된 EBS <배워서 남줄랩> '나는 장애를 극복하지 않았다'편 중 한 장면 |
ⓒ EBS |
물론 <남줄랩> 방송을 한 편 방송한다고 해서 사회적 편견이 쉽사리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원래 편견이란 단단하고 깨지기 힘드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애인을 포함한 여러 소수자들이 본인이 여기에 있음을, 우리 사회의 또 다른 구성원임을 드러내는 작업은 여전히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미디어에서는 잘 나오지 않는, 나오더라도 '시민의 불편함'만을 강조하는 장애인 이동권 투쟁에 대해 <남줄랩> 방송에서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이날 <남줄랩>을 통해 방송된 장면 중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이 지하철 선로를 막아서고, 휠체어를 철사로 묶고, 열차 안에 들어가서 장애인의 죽음을 알리는 영상은 몇 번을 봐도 충격적이다. 출연자 중 "우리는 지하철 타려고 목숨을 걸지는 않지 않느냐"던 래퍼 캐스퍼의 말은 우리가 깊이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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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년 1월 7일 방송된 EBS <배워서 남줄랩> '나는 장애를 극복하지 않았다'편 중 한 장면 |
ⓒ EBS |
만약 누군가가 '이런 얘기들을 왜 해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답은 단순하다. 바로 그들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가지 예시를 들어보면, 유명 온라인 게임인 <오버워치>에는 여러 장애인 캐릭터가 등장한다. 의족이나 의수를 차거나 한 쪽 눈을 다쳐서 못 쓰는 캐릭터들이 다양하게 나온다. 이에 대해 가끔 일부 게임 유저들은 "왜 굳이 게임에 장애인 캐릭터를 넣냐"고 고객 게시판 등에 항의하는데, '장애인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단순한 대답 말고 무엇이 더 필요할까?
게임 <오버워치>가 온라인에서 소수자의 존재를 드러내듯, EBS <남줄랩> 역시 교육방송을 통해 같은 기능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방송 말미에는 출연진 중 래퍼들의 고연이 이어졌는데, 장애 문제에 대한 래퍼들의 노랫말을 많은 사람이 들어보면 좋겠다. 그 중 래퍼 슬릭의 가사가 특히 인상적이다.
"듣기 싫은 건 처음부터 안 들리는 거라고
안 들리는 게 존재하지 않는 이유라던
어디서 온지도 모르는 파편들에
본드 붙여 생각이라는 이름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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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년 1월 7일 방송된 EBS <배워서 남줄랩> '나는 장애를 극복하지 않았다'편 중 한 장면 |
ⓒ EB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