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 서울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진행된 기자회견에서 한 민원인이 집단 민원 서류를 들고 있다.
부양의무자기준의 조속한 완전 폐지를 촉구하는 집단 민원이 제기됐다.
기초법바로세우기공동행동(아래 기초법공동행동) 등 빈곤·시민사회단체들은 5일 오전 서울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부양의무자기준 '단계적' 폐지로 인해 여전히 복지 사각지대에 빠진 이들 대다수가 생존의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며 부양의무자 기준의 조속하고 완전한 폐지를 정부에 촉구했다.
기초법공동행동은 "지난 2017년 8월 25일,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은 장애등급제·부양의무자기준·장애인수용시설 폐지 광화문농성장을 직접 찾아와 부양의무자기준의 완전한 폐지를 위해 조속한 노력을 하겠다고 약속했고, 이 때문에 1842일간 이어져 온 광화문 농성을 2017년 9월 5일 중단했다"라고 밝혔다.
이들은 "농성 중단 후 1년이 지난 지금, 부양의무자기준은 2018년 10월 주거급여에서 폐지가 예정되어 있지만, 이는 농성을 중단하던 당시 발표되어있던 계획일 따름"이라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생계급여와 의료급여에서의 폐지 계획이 세워지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여전히 많은 이들이 가족을 이유로 기초생활보장제도에서 배제되어 최저생계비 이하의 삶을 살아가고, 아픈 곳을 치료받지 못하며 살아가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현재 정부는 2019년 1월부터 생계급여와 의료급여에서 부양의무자가 노인이나 중증장애인인 경우, 소득 하위 70% 기준을 충족하면 부양의무자기준을 적용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복지부는 이를 통해 약 4만1천 명이 사각지대에서 벗어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러나 기초법공동행동은 "이러한 기준을 모두 충족하는 사람들은 사각지대에 놓인 100만 명에 가까운 이들 중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라고 지적했다. 2017년 기초생활보장 실태조사 결과, 소득이나 재산(소득인정액)은 기준 중위소득 40% 이하(현재 의료급여 수급 기준)지만 부양의무자 기준 때문에 수급을 받지 못하는 ‘비수급 빈곤층’은 약 93만 명(63만 가구)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기초법공동행동은 지난 8월 21일부터 2주간 부양의무자기준에 대한 민원을 모았고, 총 103건의 민원이 모였다. 부양의무자 기준으로 인해 기초생활 수급을 받지 못하는 당사자, 부양의무자인 가족들, 그리고 사회복지노동자까지 다양한 이들이 민원인으로 참여했다.
기자회견에 참석한 민원인들이 "부양의무자 기준 조속히 완전 폐지하라"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날 기자회견에 참석한 한 민원인은 희귀난치성 질환인 '베체트병' 환자이다. 베체트병은 통증성 구강 궤양, 피부 병변 등을 일으키는 만성 혈관 염증 질환이다. 이 민원인은 환우회에서 만난 친구가 부양의무자기준으로 인해 기초생활 수급에 탈락한 이후, 지난 7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며 "이렇게 사람을 죽게 만드는 부양의무자기준은 정말 너무나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라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누군가는 친구의 자녀들을 탓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명이 벌어 한 명 먹고살기도 어려운 세상에서 어떻게 따로 사는 부모를 부양할 수 있겠는가"라고 되물으며 "부양의무자기준을 폐지한다고 대통령도 장관도 약속했다는데 왜 아직도 폐지되지 않은 것인가. 진작 폐지되었더라면 내 친구는 살아있었을 것"이라고 울분을 토했다.
이 민원인은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내 친구처럼 어디선가 죽음을 결심할 사람이 있을 텐데, 그것이 너무나 마음 아프다"라며 "부양의무자기준 때문에 올여름에도 아까운 한 사람이 떠났다는 것을 모두 함께 기억하고 추모해달라"라고 호소했다.
박승규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활동가는 상담 사례를 소개하며 부양의무자기준으로 인해 삶의 선택권을 침해받고 있는 다양한 장애인 당사자들의 사례를 전했다. 그는 "경제활동을 전담하던 남편이 구치소에 들어가게 됐지만, 어린 자녀를 두고 일할 수 없어 기초생활 수급을 신청했으나 오랫동안 연락도 되지 않는 아버지가 직업이 있다는 이유로 거절당한 지적장애여성, 탈시설을 원하지만, 부모의 비협조로 기초생활수급자가 되지 못해 아직도 시설에서 사는 장애인 당사자 등의 사례가 꾸준히 접수되고 있다"라고 밝혔다.
박 활동가는 "부양의무자 기준에 막혀 아직도 존엄한 삶, 선택이 존중받는 삶을 살지 못하는 장애인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문재인 대통령이 가장 크게 내걸었던 '사람이 먼저다'라는 슬로건대로 정책이 이뤄지고 있는지 되묻게 된다"라고 지적했다.
지난해 11월에 꾸려진 '부양의무자기준폐지 민관협의체' 공동위원장인 윤종술 전국장애인부모연대 회장은 "부양의무자기준 폐지가 속도를 내지 못하는 것은 결국 예산 때문인데, 그렇다면 우리 사회는 아직도 사람이 아니라 돈이 먼저인 곳 아닌가"라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윤 회장은 "복지 사각지대에 빠져 생사를 오가는 사람들이 있고, 가족들은 아직도 부양의무의 부담을 짊어지고 빈곤의 사슬에 갇혀있는 것이 현실인데 '단계적 폐지'라는 말은 기만적"이라며 "부양의무자기준의 조속하고 완전한 폐지만이 한국 사회에서 빈곤의 사슬을 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기자회견에 참석한 민원인들은 '가족을 해체시키는 부양의무자기준', '장애인을 시설에 가두는 부양의무자기준', '가난을 대물림하는 부양의무자기준' 등의 문구가 적힌 종이를 찢어 '부양의무자기준완전폐지함'에 넣는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103인의 민원이 담긴 집단 민원은 우편을 통해 복지부에 접수될 예정이다.
민원인들이 '부양의무자 기준'이 적힌 종이를 찢어 부양의무자기준완전폐지함에 넣는 퍼포먼스를 진행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