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고 없이 판로 막힌 장애인들의 일회용품
작성자 2018-09-03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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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고 없이 판로 막힌 장애인들의 일회용품
[한겨레21] 환경부의 일회용품 줄이기 실천 지침 뒤 중증장애인 생산시설 공공기관의 매출액 급감…
“일자리와 생존권 보장 별다른 대책 없어”
7월1일 환경부 지침으로 공공기관들이 일회용 종이컵 사용을 제한하면서 중증장애인을 고용해 종이컵을 생산하는 시설의 매출이 크게 줄었다. 김진수 기자
“종이컵(에 인쇄된) 그림, 알록달록 예뻐.”
중증장애인 김현식(25·가명)씨는 주말이면 “왜 학원 안 가요”라며 월요일을 기다린다. 김씨는 현재 일하는 ㄱ중증장애인 생산시설을 ‘학원’이라고 했다. 김씨는 ‘학원’에서 돈도 벌고, 언어·미술 치료도 받고, 핸드벨을 흔들며 연주도 한다.
2015년 특수학교를 졸업할 때 김씨는 비장애인이 일하는 카페, 세차장 등 일자리 서너 곳을 알아보다가 접었다. 손님과 소통이 안 돼 일일이 음료를 주문받기 어려웠고, 동작이 둔해 세차를 하다 크게 다칠 수 있어서였다.
특수학교 입학 전 훈련생으로 일했던 ㄱ시설에 재취업한 김씨는 종이컵을 만들며 번 돈으로 토요일마다 수영을 다녔다. 평일엔 기계에서 나온 종이컵들을 상자에 담아 옮겼다. 불량품도 걸러내는 베테랑이었다. 김씨는 열심히 일해 가족에게 맛있는 음식을 사주고 싶다고 했다. “레스토랑 (스테이크) 맛있어. 같이 먹을래. 내가 낼래요.”
하지만 <한겨레21>이 ㄱ시설을 방문한 8월14일 오전 11시께, 김씨가 “그림이 예쁘다”며 좋아하던 종이컵이 담긴 상자 500여 개가 창고에 쌓여 있었다. 열흘이면 다 빠졌어야 할 물량이었다. 하지만 20여 일이 지나도록 창고에 그대로 있었다. 상자들을 쌓아 만든 기둥 주변에는 종이컵 재료가 포장도 뜯지 않은 채 놓여 있었다.
11개 시설 공공기관 매출액 지난해보다 24%↓
환경부의 공공기관 일회용품 사용 줄이기 실천 지침 시행 뒤 달라진 풍경이었다. 지적장애 2급 박윤형(22·가명)씨의 어머니(52)는 <한겨레21> 인터뷰에서 “모르는 사람과 눈도 마주치지 못하던 아들이 사람들을 바라보며 웃는다. 신발끈도 못 묶었는데 혼자 장갑까지 낄 정도로 동작이 자연스러워졌다. 아들이 일자리를 잃으면 장애가 다시 심해질까봐 걱정”이라며 “중증장애인은 몸이 불편하거나 지능이 낮아 보호자가 함께 있어야 한다. 아들이 집에 홀로 있으면 가족도 일을 그만둬야 한다”고 말했다. 가족의 삶에도 균열 조짐이 보였다.
7월1일부터 중앙부처, 지방자치단체, 공기업 등 모든 공공기관은 일회용 컵과 페트병 사용을 금지하고, 회의와 행사를 할 때 다회용품을 되도록 쓰고 있다. 환경부의 일회용품 사용 줄이기 실천 지침에 따른 조처다. 2009년에도 비슷한 지침이 시행됐다. 하지만 일회용품 감량 실적을 지자체·공공기관 평가에 반영하는 것은 처음이다.
불똥은 중증장애인 생산시설로 튀었다. 공공기관에서 쓰는 일회용 종이컵은 중증장애인 생산시설의 12가지 생산품 가운데 하나다. 지난해 전체 11개 시설에서 생산한 종이컵 매출액은 25억4941만원가량이다. 이 가운데 공공기관 매출액은 17억1199만원(67.1%)에 이른다. 직업 재활 등을 위한 중증장애인 생산품 우선구매 특별법에 따른 것이다. 공공기관의 자판기·정수기용 종이컵 등이 중증장애인들이 만든 제품이다.
환경부의 지침 시행 뒤 공공기관의 종이컵 수요가 줄자 시설들의 매출도 줄줄이 감소했다. 실제 6월 이후 4개 시설에서 222만원어치의 종이컵을 반품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매출도 6월 들어 꺾였다. 전체 11개 시설의 7월 공공기관 매출액은 지난해 같은 기간에 견줘 24%나 떨어졌다. 4분의 1이나 줄어든 셈이다.
정재훈 한국장애인직업재활시설협회 종이컵생산시설협의회장은 <한겨레21> 인터뷰에서 “환경보호를 위해 일회용품 사용을 줄이자는 취지는 충분히 공감한다”면서도 “사전 통고도 없이 공공기관들이 종이컵 구매를 갑자기 줄이면서 중증장애인들이 선의의 피해자가 되고 있는데도 취약계층의 일자리와 생존권을 보장할 별다른 대책이 없다”고 강조했다.
장애인 고용 불안, 소득 감소 우려
‘종이컵 소비 절벽’이 장기화할 경우 중증장애인의 고용 불안과 소득 감소는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7월부터 노동 단축에 들어간 ㄴ시설은 노동자들에게 가동을 멈출 경우 일정 기간 월급을 적게 줄 수 있다고 예고했다. 현재 전국 11개 시설에 중증장애인 340여 명(훈련장애인 110여 명 포함)이 일한다. 이 가운데 종이컵만 생산하는 5개 시설은 직격탄을 맞을 수밖에 없다.
김교형 한국장애인개발원 우선구매지원부장은 <한겨레21>과 한 통화에서 “중증장애인은 비장애인보다 긴 시간 훈련해도 생산성이 낮고, 민간 업체에선 장애인의 특수성을 고려한 작업 환경을 기대하기 어렵다”며 “대화가 어려워 다른 직장으로 옮겨도 심리적으로 적응하는 데 어려워한다”고 설명했다.
한국장애인개발원이 2016년 전국 280여 개 생산시설을 대상으로 생산시설 지정이 중증장애인의 고용 향상에 도움이 되는 정도를 분석한 결과, 전체적으로 “도움이 된다”는 답변이 67.7%,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답변이 8.4%였다. 또 생산시설 지정이 장애인 노동자의 임금 향상에 도움이 되는 정도를 분석한 결과, 전체적으로 “도움이 된다”는 답변이 71.8%,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답변이 6%로 집계됐다.
환경부의 이번 지침은 5월10일 관계 부처 합동으로 발표한 ‘재활용 폐기물 관리 종합대책’의 하나로 마련돼 7월 바로 시행됐다. 수도권 지역에서 발생한 폐비닐 수거 거부 등의 문제로 일회용품 사용 금지가 급물살을 탄 것이다. 현장과 국민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는 숙려 기간은 없었다.
엇박자 정책으로 예산 낭비까지
환경부가 2개월 새 공공기관 종이컵 사용 금지를 단행하는가 하면, 보건복지부가 종이컵 생산성 향상을 위해 시설에 생산설비를 지원한 예산은 최근 3년간 5억8200만원(지방비 포함)이었다. 정부 내에서조차 엇박자를 보이는 것이다. 사정이 이렇자, 올해 초 새로운 성형기를 들여온 ㄷ시설은 1년도 채 안 돼 가동률을 정상 수준보다 20%가량 낮추게 됐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한겨레21>과 한 통화에서 “설비 지원 당시 환경부 지침이 발표된 것이 아니어서 해당 정책들의 일관성을 따지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면서도 “업체·규모별로 피해가 제각각이어서 전체적 현황을 진단할 컨설팅을 한 뒤 피해를 최소화하는 대안을 모색할 예정”이라고 했다.
이에 대해 환경부 관계자는 <한겨레21>과 한 통화에서 “환경보호를 위해 일회용품을 줄여야 하는 상황에서 공공기관이 모범을 보여야 한다. 특정 품목을 예외로 할 수는 없다”면서도 “중증장애인 생산품 우선 구매로 고용과 임금을 보장받는 중증장애인에게 돌아갈 피해를 대비하지 못했다. 유관 기관들과 대책을 모색하겠다”고 말했다.
조윤영 기자 jyy@hani.co.kr
출처 : https://news.v.daum.net/v/20180901142801339?rcmd=r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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