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복지원특별법 제정을 국회에 촉구하며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들이 지난해 11월 7일부터 국회 앞에서 농성 중이다.
폭염이 한풀 꺾인 지난 8월 17일 점심 무렵, 국회 앞 형제복지원 농성장을 찾았다. 한낮 온도는 34도에 달했지만, 40도를 웃돌던 날들에 비하면 제법 선선한 편이었다.
부산 형제복지원. 75년부터 88년까지(시설은 87년에 폐쇄) 공식기록으로만 551명이 사망하고 시신은 의과대학 해부용으로 팔려간 곳.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영문도 모른 채 수천 명의 사람들이 ‘부랑인’ 낙인이 찍혀 납치·감금·폭행·강제노역을 당한 곳. 이후 ‘형제복지원 울주 작업장 사건’을 계기로 형제복지원은 세간에 모습을 드러냈으나, 87년 민주화 열기에 휩쓸려 잊힌다.
그리고 25년 후인 2012년, 한종선의 노력으로 형제복지원은 다시 세상에 호출된다. 이후 형제복지원의 근거가 된 ‘내무부 훈령 410호’를 바탕으로 한국 근현대사의 ‘대감금의 역사’가 많은 학자들에 의해 연구되고, ‘형제복지원특별법’이 19대 국회에 이어 이번 20대 국회에 재발의(진선미 의원 대표발의) 됐지만 그뿐이었다. 사건은 파헤쳐지기만 할 뿐 어떠한 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그래서 지난해 9월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들은 형제복지원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부산 옛 형제복지원터에서 청와대까지 22일간 국토대장정을 했다. 대장정 마지막 날, 청와대 행정관을 만나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규명에 대한 청와대 공식입장을 밝히겠다는 답을 들었지만 한 달이 넘어도 아무 응답이 없었다. 결국 2017년 11월 7일,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한종선, 최승우는 국회 앞 농성을 시작했다.
농성장 바닥은 가로 180cm에 세로 135cm. 한 평도 되지 않은 곳에서 성인 남성 두 사람이 몸을 부대끼며 284일째(8월 17일 기준) 농성하고 있었다. 천막 높이도 135cm밖에 되지 않아 일어서면 허리를 수그리고 움직여야 했다. 전기도 없다. 자그마한 무선 선풍기로 바람을 쐬다가 배터리가 다 되면 지하철 아래로 내려가 충전했다. 아이스박스 하나가 냉장고를 대신하고 있었다.
한종선 씨가 아이스박스에서 시원한 음료를 꺼내고 있다.
- 형제복지원은 단 한 번도 심판받지 않았다
사흘 전인 8월 14일엔 최승우 씨가 더위를 먹고 쓰러졌다. 40도에 이르는 기록적인 폭염이 이어지던 날들의 끄트머리였다. 지속된 폭염에 아스팔트 온도는 식을 줄을 몰랐다. 아래서는 뜨거운 지열이 올라오고, 농성장 뼈대가 되는 쇠틀은 열기를 뿜어대며, 정수리에선 햇볕이 내리꽂았다. 그 햇볕을 삼키고는 정신을 잃고 쓰러져 응급실에 실려 갔다. 더위는 그의 체중도 빼앗아갔다. 한 달 동안 7킬로나 빠졌다.
농성(籠城)을 한다는 것은 싸움의 수단으로 한 자리를 떠나지 않고 지키는 것이었다. 그 자리에서 하루하루를, 284일을 살아내야 했다. 국회 앞 형제복지원 농성장은 최승우와 한종선의 집이 되었다. 이곳에서 잠을 자고 씻고 공부하고 밥을 먹고 휴식을 취하고 사람을 만난다. 겨울의 혹한과 여름의 태양과 국회 앞 8차선 차들의 굉음을 겪어낸다.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한종선, 최승우 씨.
최 씨는 새벽 6시 반이면 일어나 농성장 주변을 정리하며 담배꽁초를 줍고 아침 운동을 시작한다. 매일 아침 ‘형제복지원’ 문구가 적힌 유니폼을 입고는 두시간 정도 국회를 뛰었다. 국회의원들에게 형제복지원 문제를 알리기 위한 나름의 행위였다.
그리고 오후엔 주로 연극 연습을 한다. 작년 9월 국토대장정 때 동행하던 연극인들에게 최 씨가 먼저 말을 던졌다. “연극 한 번 하면 안 되나?” 그 말이 씨앗이 되어 오는 10월에 그는 연극무대에 선다.
“처음엔 형제복지원 사건을 알리고 싶다는 의욕이 강했던 거 같애요. 그런데 점점 내가 바뀌어가요. 열네 살 꿈 많던 소년이, 강제로 형제복지원 가면서 꿈이 깨져버렸잖아요. 그때 못했던 거 지금이라도 하자. 내가 하고 싶은 것들. 연극 엄청 재밌더라고. 힘은 들지마는 정말 내 스타일이야.(웃음)”
그래서 시도 때도 없이 연습한다. 아침에 조깅할 때는 소리 지르며 발성 연습을 하고, 연극 연습이 없는 오후엔 반복해서 대본을 읽는다. 그리고 해가 저물면 일기를 쓴다. 농성 이틀째부터 꾸준히 써왔다.
반면, 한 씨는 오전 11시경 느지막이 일어난다. 운동은 숨쉬기뿐이다. 건강을 염려하는 목소리에 한 씨가 말한다.
“안 지칠 수가 없는 게 농성이고, 안 지친 척하는 것도 한계가 있는 거죠. 그리고 우리가 건강해 보일수록 저들(국회의원) 눈에는 색안경으로 비칠 테니까. 운동하려면 하겠지마는, 그런 데다가 쓸데없이 내 에너지를 소비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그냥 농성에 집중해서, 최적화시켜서 최대한 오래 버티는 것이 중요하니깐.”
사건은 해결되지 않은 채 오랜 시간 공회전하고 있었고, 한 씨는 지쳐있었다. 그의 손톱과 발톱엔 까무룩한 때가 껴있다. 그는 일부러 드러내놓고 있었고, 그런 그에게 최 씨는 몇 번이고 깨끗이 좀 하라고 잔소리했다.
지난 2월 검찰 과거사위원회는 형제복지원 사건을 조사 대상으로 선정했다. 그러나 검찰의 인권침해와 검찰권 남용에 대한 조사이기에 이는 형제복지원 그 전체에 대한 것이 아니다. 형제복지원 시설은 이제까지 단 한 번도 검찰에 기소된 적이 없다. 87년 기소되어 박인근 원장이 최종 2년 6개월형을 선고받은 것은 ‘울주작업장 강제노역 사건’에 한해서다. 형제복지원특별법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이들은 형제복지원특별법을 제정하여 형제복지원을 비롯해 ‘내무부 훈령 410호’ 부랑인 단속 지침에 의해 운영됐던 전국 36개 부랑인 수용소에 대한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있다.
“그 당시에 형제복지원에 외압 행사했던 박희태(당시 부산지방검찰청 검사장으로 사건 축소 외압 넣은 혐의)나 전두환, 징역 2년 반 때린 김용준 대법관에 대해선 왜 조사를 안 합니까?”
한 씨는 울주작업장에 한해 이뤄진 판결이 마치 형제복지원 전체에 대한 판결처럼 오독되는 현실에 갑갑해 하고 있었다.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양세환 씨가 농성 일수를 고쳐 쓰고 있다.
- 진상규명을 위한 싸움의 시간, 우리에겐 ‘짐승에서 사람으로’ 되어가는 과정
한종선과 최승우, 이 둘은 30여 년 전에도 같이 있었다. 성인이 되어 피해생존자모임에서 만났을 때, 한 씨를 먼저 알아본 것은 최 씨였다. “네가 1번 한종선이지?”
형제복지원 24소대 1번 한종선. 그때 한 씨는 아홉 살이었고 최 씨는 열다섯 살, 당시 24소대 서무였다. 서무는 소대 내 인원 파악과 피복, 청소, 비품 정리 등 살림을 도맡아 하는 사람이었다. 매일 소대 내 인원 점검하던 최 씨는 ‘1번 한종선’을 기억하고 있었다.
최 씨 말에 의하면 서무는 “최고 편한 직종”이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도 고통이 있었다. 82년 봄날, 형제복지원에 입소하던 첫날부터 성폭행당했던 그는 “소대장 눈에 이쁘게 보여” 서무로 발탁된다. 소대장은 그에게 서무라는 직책을 주어 자기 옆에 두었고, 밤마다 성폭행했다. 가장 지독한 것은 최 씨에게도 다른 아이들을 성폭행하게 시킨 것이다. 최 씨는 그 안에서 가해자이자 피해자였다. 최 씨가 한숨을 쉬며 말한다.
“나도 그때 서무할 때 참 아픔이 많았다, 종선아.”
“형, 그건 언제나 가해의 변명은 될지언정, 용서는 안 돼.”
그의 고통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한종선에게 최승우는 때리고 괴롭히던 가해자 중 한 사람이었다. 즉, 피해생존자모임을 꾸리는 것은 과거 가해자-피해자였던 이들이 다시 마주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쉽지 않았다. 그 안에서 가장 어린 약자였던 한 씨 또래 피해생존자들이 잘 나타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 씨가 형제복지원 사건을 알리며 피해생존자 모임을 꾸릴 때도 ‘형님뻘인’ 피해생존자들이 보인 반응은 무시였다. “나이도 어린놈이, 니가 뭘 아는데?”
사실 최 씨는 한 씨가 형제복지원 진상규명하자고 처음 세상에 외쳤을 때 한 씨를 지독히 괴롭혔던 사람 중 한 명이다. 그때 최 씨에겐 진상규명보다 국가로부터 돈을 받는 것, 즉 배상이 더 중요했는데 ‘진상규명’하자고 나서는 한 씨가 꼴사나웠다. 그러나 피해자모임이 지속되면서 최 씨는 한 씨와의 끝없는 대화를 통해 이제야 진상규명의 진정한 의미를 알아가며, 함께 농성장을 지키고 있다. 그러나 한 씨는 자신을 괴롭혔던 최 씨에 대해 “함께하는 동료로서 같이 계속 가는” 것뿐이지, “아직 진상규명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미리 용서” 할 수는 없다고 했다. 최 씨는 그 말을 기꺼이 수용한다.
“‘용서할 준비도 안 됐는데 과연 사과를 하면?’이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져보거든요. 그래서 종선이가 용서한다고 해도 내가 그 용서받을 자격이 아직 안 된다….”
그래서 그는 국가에 대해서도 “국가의 사과와 ‘우리들의 용서’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우리들의 용서’란 어떤 의미일까.
“우리는 용서할 준비가 안 됐는데, 국가가 돈 주고 사과해버린다고 끝나는 게 아니잖아요. 저도 처음엔 보상을 바랐지만은 긴 시간 동안 깨달은 거죠. 이게 보상이 아니고 국가 사과가 있어야 한다. 국가가 잘못한 것들이 인정되어야 한다. 그리고 국가가 사과할 때 우리 또한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목적은 우리 피해생존자들이 건전하게 살아남는 거예요. 국가가 우리를 ‘진짜 부랑인’으로 만들어버렸는데 그 삶을 국가가 나서서 해결해주지 않으니 우리 스스로가 변해가야 해요. 짐승에서 사람으로 되어가는 과정이 목적이지 않나. 농성하면서 알아가고 있는 거죠.”
국회 앞 형제복지원 농성장 안에서 최승우 씨가 농성장 내부를 정리하고 있는 모습.
그 또한 이제야 “짐승에서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고 했다. 국회 앞에서 각자의 억울함을 갖고 1인 시위하는 사람들, 국가 폭력 피해자들을 만나며 타인의 고통을 듣는 귀를 갖게 되었다.
“내 아픔만 생각하면 욕심이잖아요. 그러면 남의 아픔은 보이지 않잖아. 사람들 속에서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 거죠.”
국가와 피해생존자 간의 관계 회복을 넘어, 그 안에서 가해자-피해자로 존재했던 당사자 간의 관계도 회복될 수 있을까. ‘사람으로서’ 온전히 회복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외부적으로 성과를 내는 것도 중요했으나, 그 과정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가 당장의 오늘을 살게 했다. 그리고 그것이 미래에 영향을 미칠 터였다. 그렇다면 그 지난한 시간 속에서 당사자 개개인의 변화와 성장 또한 특별법 제정이라는 목표만큼이나 중요한 것이었다. 그러한 변화가 국회 앞 농성장에서 조금씩 일어나고 있었다.
- “서로가 최선을 다해 싸우는 게 서로한테 힘이 되지”
과거 한종선과 함께 형제복지원에 끌려갔던 누나와 아버지는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한 충격으로 지금도 정신병원에 있다. 왜 내가, 왜 우리 가족이 이렇게 됐을까. 그 물음의 끝엔 늘 형제복지원이 있었고, 진상규명에 대한 절박함이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로서 그를 여기까지 오게 했다. 그 절박함과 함께 그를 버티게 했던 것은 “끝까지 진상규명 하자”고 그의 손을 붙잡던 몇몇의 피해생존자들이었다. 그래서 포기할 수 없었다. 여기서 그만둔다면 피해생존자들의 고통만 헤집어놓는 꼴이 되니 끝을 봐야 했다.
“나의 절박함으로 시작했는데, 피해자들이 나로 인해서 트라우마를 확인하면서 가정이 깨지거나 자기 분노를 주체 못하는 거라. 그들 이야길 들어야 하는 입장이 된 거지. 그 시련 겪다 보니깐 국가폭력 피해자분들 만나면 저 사람의 아픔은 또 얼마나 클까, 저 사람은 어떤 힘으로 견디고 있을까.”
그 고통이 수많은 만남을 엮어냈다. 이날 농성장엔 일찍이 대한송유관공사 살인사건 피해자의 어머니 유미자 씨도 와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 또한 지난 5월 말부터 광화문 KT지사 앞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유 씨는 한 씨를 가리켜 “국가가 맺어준 남매”라고 했다.
그리고 저녁 무렵엔 ‘국내 최장기 투쟁 사업장’ 콜트·콜텍 해고노동자 방종운 씨(콜트악기 지회장)가 “고기 사주러” 찾아왔다. 8월 17일, 이날은 공교롭게도 한종선의 42번째 생일이었다.
콜트·콜텍 해고노동자 방종운 씨가 형제복지원 농성장에 찾아왔다.
“(종선이) 생일이고 (승우) 쓰러졌다메. 고기 먹으러 가자. 영양 보충해야지.”
이들의 인연은 201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콜트콜텍 노조는 당시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발언(“콜트콜텍이 강경노조 때문에 문 닫았다”)에 항의하며 여의도 새누리당사 앞에서 단식 농성을 시작했는데, 비슷한 시기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들도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국회 앞에서 농성을 하고 있었다. 그때 오가며 친해진 인연이 이제까지 이어져 오고 있었다. 근래 방 씨는 대법원 앞으로 ‘집’을 옮겼다. 양승태 사법 거래에 콜텍 정리해고건도 있음이 최근 드러난 것이다.
“그 평등치 않은 법에다가 난장을 더 쳐놔가지고, 우리보고 다 죽으라는 얘기지, 그거 바로 잡아야 해.”
그 말에 최승우 씨가 응원을 보탠다. “형님이 대법원 앞에가 싸우고 있는 게 정말 잘했다. 누나(유미자 씨)한테도 도움 되는 거야.” 유 씨도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여기서 다 이렇게 싸우고 있는 게 서로한테 힘이 되지.” 각자의 최선이 서로를 버티게 하는 힘이 되었다.
한종선 씨가 농성 300일을 맞아 9월 3일 열리는 문화예술행동을 준비하며 바느질 중이다.
- 농성 300일 맞아 ‘하나의 마음’이 농성장 덮어… ‘특별법’ 제정으로 나아가야
지난 6월, 한종선 씨는 제8회 진실의힘 인권상을 받았다. 그 자리에서 한 씨는 이 사회가 자신을 피해자가 아닌 증언자이자 생존자로서 봐줄 것을 당부하며 “고통을 치유하고 나아가 다시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는 사회를 만드는 데 참여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 진실을 밝히기 위해 그는 이 농성장을 꾸렸다. 이 공간을 지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지키는 것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때로는 절망에 출렁이고 알 수 없는 불안 속을 유영하면서도 그들은 살아내고 있었다. 농성장은 이제 국가폭력 피해자들의 사랑방으로 사람들을 모아내면서, 형제복지원이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사건으로 남아있음을 세상에 드러낸다.
오는 9월 3일, 농성 300일을 맞아 형제복지원 농성장에선 하루 종일 문화예술행동이 이어진다. 이날엔 8월 한 달 동안 형제복지원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마음으로 각자의 자리에서 한 땀 한 땀 바느질한 조각보들을 이어 만든 ‘하나의 마음’ 기념비(김신윤주 작가)가 설치된다. 이를 위해 한 씨도 열심히 바느질했다. 이날, 수많은 마음이 촘촘히 엮여 한 평 농성장을 모자람 없이 덮는 것은 깊고 오래된 고통에 대한 이 세계의 작은 응답은 될 것이나 충분치는 않다. 어느 정도 상투적이나, 결국엔 형제복지원특별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한종선 씨와 대한송유관공사 살인사건 피해자의 어머니 유미자 씨가 9월 3일 열리는 ‘하나의 마음’ 기념비에 함께하기 위해 각자 바느질한 조각보를 들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