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남양주 모란공원에 있는 우동민 열사 묘역
고 우동민 열사를 추모하는 연극이 열렸다.
고 우동민 열사는 1968년 10월 24일생으로 24살까지 장애인거주시설 ‘명휘원’에서 살다가, 2000년대 초부터 장애운동을 시작했다. 그는 장애인이용시설이었던 정립회관 민주화 투쟁, 활동지원서비스 제도화를 위한 한강대교 기어가기 투쟁에 참여했고, 성북장애인자립생활센터 창립 멤버로 활동하면서 장애운동을 이어갔다. 그러던 중, 정부가 입법 예고한 장애인활동지원법안(대상 및 시간제한, 본인부담금 인상 등)에 분노한 장애계와 현병철 국가인권위원회(아래 인권위) 위원장의 반인권적 행태를 지켜볼 수 없던 인권단체들은 2010년 11월 초, 인권위를 점거한다. 이 자리에 우동민도 있었다.
2010년 12월 3일, 인권위는 엘리베이터 가동, 전기 및 난방 공급을 중단하고 활동보조인 출입과 식사 반입을 통제한다. 11층에서 다른 활동가들과 버티던 우동민은 12월 6일 고열과 허리복통을 호소하며 응급차에 후송됐으나 이듬해인 2011년 1월 2일 사망했다. 인권위는 당시 국회 청문회와 UN인권이사회에서도 이러한 인권침해를 계속 부인해왔다. 그러던 중 2017년 12월 27일, 보수 정권 10년 기간의 인권위 행적을 재조사하는 인권위 혁신위가 “인권위는 우동민 활동가와 그 가족들에게 사과하라”는 권고를 내렸다. 2018년 1월 2일, 이성호 인권위원장은 고 우동민 활동가의 7주기 추모식이 열린 마석 모란공원에 찾아와 “죄송합니다”라며 허리를 숙였다. 7년 만이었다.
지난 17일, 장애인문화공간이 주최하는 서울 장애인연극 네트워크제 8월 공연인 “앞만 보지 말고 옆도 보고 뒤도 보고 그렇게 함께 갑시다”가 성북 마을극장에서 열렸다. 이 연극의 제목은 평소 우동민이 즐겨 쓰는 말이었다.
하지만 우동민의 이름은 대사에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그를 기리는 연극임에도 말이다. 이것은 그의 삶과 관련된다. 사람들은 우동민을 ‘시위, 기자회견, 점거 등 모든 현장에 항상 있던 사람’으로 기억했다. 다만, 우 씨는 앞에 나서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었기에 대표단이나 언변이 능한 사람들에 비해 덜 조명을 받았다. 이 연극을 기획한 한예인 씨는 비마이너와의 인터뷰에서 “집회 현장에서 우동민이 단독으로 찍힌 사진이 없어서 영상을 만들지 못할 정도였다”고 했다. 하지만 현장에서 옆을 돌아보면 항상 그가 있었다.
그래서 ‘우동민’이라는 명사는 우동민 한 개인을 지칭함과 동시에 장애운동을 하는 평범한 우동민’들’을 포함했다. 우동민의 삶과 생전 위치는 현재 장애운동의 현장을 채우는 수많은 ‘평범한’ 장애인 활동가들과 비슷하다. 그리하여 그의 삶을 다루는 이 연극은 우동민을 이야기하면서도 장소를 채우는 수많은 우동민‘들’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여기 우동민‘들’이 있었고, 있으며, 있을 것이라고. 이 연극이 ‘우동민’의 삶을 말하면서도 우동민’만’을 지칭하지 못하는 이유다.
이 때문에 극의 흐름은 우동민의 생을 말함과 동시에 다른 우동민‘들’이 겪어야 했던 ‘보통의’ 생애를 노래한다. 이날 연극은 장애인을 차별하는 세상을 향해 싸우겠다는 그‘들’의 의지를 드러낸 노래 ‘덤벼’를 시작으로, 집회 현장에서 불리는 수많은 노래로 채워졌다.
그중에서도 특히 ‘옆을 쳐다봐’는 평소 우동민이 동료들에게 했던 말을 담은 노래다. 우동민은 ‘일에만 매몰되지 말고 옆 사람도 챙겨야 한다’며 동료들에게 “앞만 쳐다보지 말고 옆도 보고, 뒤도 보고 함께 가자”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우 씨가 평소에 좋아해 그의 장례식에서도 불린 이 노래는 고인의 가치관을 담아낸다. 그렇게 '앞만 보면 안 보이잖아 너와 날 필요로 하는 사람, 우리 가던 길 잠시 서서 옆을 쳐다봐'라는 노랫말은 다시 동료로 향하며 ‘(우동민)들’의 이야기로 돌아오고 ‘(우동민)들’의 궤적을 이어 나갔다. 연극의 마지막 노래 ‘장애해방가’는 장애인을 차별하는 세상을 향해 그’들’이 ‘덤벼’서 장애인의 차별이 사라지고야 마는 그날을 이야기한다. 이렇게 첫 노래와 마지막 노래가 맞물리며 연극은 마무리된다.
지난 17일, 고 우동민 열사를 기리는 연극이 성북 마을극장에서 열렸다. 공연 후, 최재호 장애인문화공간 대표, 명숙 활동가, 문애린 활동가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왼쪽에서부터)
연극이 끝난 후, 최재호 장애인문화공간 대표는 문애린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 활동가, 명숙 인권운동 네트워크 바람 활동가와 함께 고인과의 인연을 이야기하는 자리를 가졌다. 명숙 활동가는 현병철 인권위원장 재직 당시 그의 반인권적인 결정들에 반대하며 사퇴를 요구하는 ‘국가인권위 제자리찾기 공동행동’에서 활동했다. 인권단체들이 인권위를 점거하던 그때, 그는 우 씨를 만났다. 문애린 활동가는 우 씨와 같이 성북장애인자립생활센터를 만든 초기 멤버다. 세 사람은 인권위 점거 농성 시절 이야기로 돌아가, 고인을 추억했다.
문애린 활동가는 인권위 점거 농성 당시, 우동민과 끝까지 11층에 남아있던 10인 중 한 명이다. 인권위가 전기를 차단하면서 전동휠체어도 충전할 수 없었고, 난방도 끊겨 바닥에는 한기가 올라왔다. 밖으로 나갈 생각도 없었지만 나갈 수도 없었다. 그런데도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 활동가도 우 씨처럼 실려 나와야 했다.
“시위 끝나기 둘째 날 전이었을 거예요. 동민이 그랬어요. ‘앞만 보지 말고, 뒤도 보고 옆도 보자’고. 전 이 말이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어요. 아파서 먼저 실려 나오기는 했지만 동민이도 실려 나온 줄은 몰랐어요. 감기 정도로 끝날 줄 알았는데 결국 폐렴으로 이어질 줄은, 몰랐어요…….”
그가 말을 멈추었다. “우동민을 만난다면 해주고 싶은 말이 있냐”는 질문에 호흡을 가다듬고는 가슴 속에 남아 있던 이야기들을 마저 꺼냈다.
“…미안하다는 말을 못 했어요. 옆에 있다면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어요.”
농성장에서 실려 나온 뒤, 그 둘은 몸이 채 회복되지 않았음에도 사무실에 함께 출근했다. 그날은 장애인활동지원법을 날치기로 통과시킨 한나라당(현재 자유한국당) 규탄 기자회견이 있던 날이었다. 그날, 우 씨가 문 활동가 앞에서 기침을 했다. 문 활동가는 안쓰러운 마음에도 퉁명스럽게 말했다. ‘집회 가지 말고 병원에나 가.’ 우 씨는 그 말에 ‘허허’ 웃고는 한나라당 중앙당사 앞에서 열리는 집회에 참석하러 갔다. 그것이 문 활동가가 기억하는 우 씨의 마지막 모습이다. 그날의 모습이 부채감으로 남아있었다.
명숙 활동가는 우 씨의 장례식에서 영정을 들었다. 장례식 날, 사람들은 그가 마지막까지 있었던 ‘인권위 11층’에 올라가려고 했다. 인권위의 횡포를 잊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인권위 측에서 엘리베이터를 막아섰고 3시간이 넘는 실랑이에도 인권위는 끝끝내 엘리베이터를 내어주지 않았다. 고인의 영정을 들고 있던 박김영희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대표는 울면서 ‘동민이 잘 보내 달라’는 말과 함께 영정을 명숙 활동가에게 넘겨야 했다. 영정을 받아안은 그도 울었다. 이날, 11층에는 계단을 걸어갈 수 있는 사람들만이 올라갈 수 있었다. 고인과 함께 활동했던 휠체어 이용 장애인들은 1층에 남아있어야 했다.
명숙 활동가는 그때를 회상하며, 비참했다고 했다.
“당시 인권위 위원들이 다 도망갔어요. 마지막 배웅까지 막는 인권위가 경찰보다 더했어요. 우리가 ‘당신들 이런 식으로 할 거냐’고 소리도 쳤는데. 인권위는 우리를 발로 짓밟은 것이나 다름없어요. 그게 몹시 속상하고, 가슴이 너무 아프죠. 전 아직도 그 영정을 박김영희 대표나 그와 가까웠던 성북센터 사람들이 들고 갔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박 대표랑은 아직도 그때 이야기를 하죠.”
이어 명숙 활동가는 우동민의 사망 후, 농성하는 사람들의 인권을 지키기 위해 전기난방 등 최소한의 것은 제공되어야 한다는 가이드라인이 생겼다고 말했다. 명숙 활동가는 “농성 중 전기를 끊는 것은 UN에서도 문제가 됐고 인권위도 사과한 사안이다. 우동민의 죽음이 이러한 가이드라인을 만든 것”이라고 말했다.
연극에 등장한 우동민’들’을 연기한 노래패 ‘시선’에는 생전 고인과 친했던 사람도 있다. 그를 ‘친형보다 더 친형 같았다’고 말하는 ‘시선’의 멤버 김정 씨는 그의 장례식에서 우 씨가 좋아했던 ‘옆을 쳐다봐’를 불렀다. 하지만 장례식장에서도, 연극 리허설 중에도 완창하지 못했다. 울음이 자꾸 목을 막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동민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모인 첫 공연에서, 그는 터져 나오는 울음을 억누르며 꾸역꾸역 노래를 다 불렀다. 그와 연이 닿았던 다른 이들은 연습할 때도, 공연할 때도, 동민을 생각했다.
사람은 누군가를 기억할 때 그의 파편만을 기억한다. 그래서 온전한 존재를 부르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기억에 남겨진 파편을 모아야 한다. 그렇게, 우동민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모여 우동민’들’의 이야기를 담은 연극이 “앞만 보지 말고 옆도 보고, 뒤도 보고 그렇게 함께 갑시다”다. 우동민은 이런 말을 하고 싶지 않았을까. 내 앞에 놓여있는 이 길, 옆과 뒤에 있는 당신과 함께 가야 하니 빠지는 사람 없이, 누군가 뒤처지면 기다렸다가 함께 가야 한다고. 중요한 건 사람이라고. 그래야만 한다고. 그 메시지를 읽은 사람들의 연극이 “앞만 보지 말고 옆도 보고 뒤도 보고 그렇게 함께 갑시다”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