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복지 아닌 ‘사람살이’를 하고 싶습니다”
고교생과 시비에서 얻은 교훈 “정답이 늘 정답은 아니다”
에이블뉴스, 기사작성일 : 2018-08-28 09:54:41
저와 아내는 참 욕 복이 많습니다. 쪼매 모가 나긴 했어도 남들에게 욕 들어 먹을 만큼은 아닌(것 같은)데, 일하다 보면 어이없게도 젊은 것들(?)에게 가끔 쌍욕을 (쳐)들어 먹곤 합니다. 칼럼을 통해 아내의 사연은 소개했으니 오늘은 제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몇 주 전 출근길, 협소한 마을 도로를 아슬아슬하게 달리던 중 도로를 인도인 양 실실 쪼개며 걸어오던 인근 고등학교 학생 세 명과 시비가 붙었습니다. 자칫 위험한 상황이 연출될 뻔 해 인도로 다니라고 뭐라 한 게 기분이 나빴던 모양입니다.
“그러면 한 대 치든가? 영상 찍어서 경찰에 신고하면 되지”
“뭐? 그러면 니가 먼저 치라. 그래야 정당방위지. 미쳤다고 내가 먼저 치나?”
“아~ 아침부터 재수 없게. X발 나이 똑바로 처먹으라고.”
대략 이런 (험악한) 분위기였습니다.
확 마 멱살을 잡고 땅바닥에 패대기를 치고 싶었으나 일단 저보다 신체 건장한 고등학생들이고. 더군다나 세 명이고. 참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요. 하하
어쨌든 살다 살다 새파란 것들한테서 똑바로 살라는 훈계를 곁들인 쌍욕을 들으니 참 기분이 묘~~했습니다. 뭐 사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딱히 제가 잘못한 건 없지요. 인도로 걸어온 학생들에게 위험한 행동이니 다신 그러지 말라며 (인상 쓰고) 충고해 준 것이 도리에 어긋난 것은 아니지 말입니다.
그러나 차분히 따져보니 뭐 백퍼센트 잘 한 사람도, 잘못한 사람도 없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정답’이 그 녀석들의 입장에선 정답이 아닐 수도 있었겠지요.
다음 날 조금 일찍 길을 나서 멀찌감치서 지켜보니 아 글쎄, 세 녀석이 통학버스에서 내리자마자 편의점으로 직행하더니 삼각김밥에 음료수 하나를 흡입하곤 다시 길을 나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그리고 마침 그 주간은 중간고사 기간이었습니다.
어떤 연유에서건 아침을 편의점에서 해결해야 하는 녀석들이 중간고사 시험 날 아침 어이없는 시비가 붙었으니 ‘너는 씨_불이라 나는 내 길 간다.’는 심정이었지 않겠습니까? 바쁜 걸음에 암만 바르고 옳은 말이라도 귀에 꽂힐 리 만무하지요.
약간의 충격이 없진 않았으나 이 일이 제게 시사하는 바는 컸습니다.
근 20년 가까이를 장애인복지현장에서 일해 오면서 정상화니 직업재활이니, 자립생활이니 사회통합이니 딱 들어도 정답인 것들만을 위해 바삐 살아왔고 지금도 그리 살아가고 있으며 단 한 번도 그것들이 정답이 아닐 수도 있겠단 생각을 해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확고했던 신념에 미세한 균열이 생긴 것입니다. 그것들이 꼭 정답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 지난 시간들과 정직하게 대면해 보니 (적어도 제 입장에선) 그 정답인 것들을 향해 최선을 다해 달려오긴 했습니다. 분명히.
정상적이고 보편적인 삶의 향유를 위해 (서비스의 통제권을 움켜쥔 체) 제공되었던 양질의 서비스들, (개개인의 의사, 특기, 적성을 고려하지 않고) 경제적 자립을 목표로 시행되었던 성과중심의 일자리사업들, 사회통합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각각의 문화와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주류사회로의 적응을 목표로 실행되었던 수많은 교육과 훈련들.
정답이라 여겼던 것들이 어쩌면 내겐 옳고 그들에겐 틀린 것이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인권의 문제가 장애를 이유로 정상화니 사회통합이니 자기결정권이니 평등이니, 풀어헤쳐지고 쪼개어져 왔음에도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고, ‘인간은 존엄하다’라는 진리보다 ‘인간은 존엄하다. 장애인도 인간이다. 따라서 장애인도 존엄하다’는 식의 어색한 삼단논법에 편안함을 느끼고 정답을 발견한 양 숨 가쁘게 (죽어라) 달려왔으니 저도 어지간히 ‘인권감수성’이 낮은 사람이었나 봅니다.
결론은 ‘사람’입니다. 존경하는 누군가의 말처럼 장애인복지가 아닌 ‘사람살이’를 하고 싶습니다.
장애인을 위한 사업장이 아닌 장애인‘도’ 일할 수 있는 사업장, 장애인을 위한 주거시설이 아닌 장애인‘도’ 살 수 있는 주거 공간, 장애인편의시설이 아닌 장애인‘도’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시설물. 장애인 ‘전용’이란 말보다 장애인‘도’란 말이 더 자연스러운 세상. 다양한 처지, 환경에 놓인 사람들이 어우러져 함께 살아가는 세상.
심장이 쫀득해지는 비싼 값을 치르고 배운 교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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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제지훈 (sumgim1@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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