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랑장애인자립생활센터는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꿈꿉니다!

  >   커뮤니티   >  

복지뉴스

농인의 내러티브가 담긴 농문화의 정수(精髓), 수어시

작성자 2018-08-31 최고관리자

조회 657

 

 

 

 

농인의 내러티브가 담긴 농문화의 정수(精髓), 수어시
농인만의 고유 언어인 ‘수어’로 만들어진 문학, 수어문학
한국어로 쓴 시, 수어로 번역한다고 ‘수어시’되는 거 아냐
등록일 [ 2018년08월30일 13시44분 ]

* 알아두기

_ 농인(Deaf person/Seeing person) : 청각장애를 가지고 있는 이들 중, 한국수어를 제1언어로 사용하거나 지향하며, 농사회에 소속감을 갖고 있는 이들. 언어적 소수자란 자기 이해를 갖고 있다.

 

_ 청인(Hearing person) : 청각장애를 갖고 있지 않은 이들. 듣는 사람. 다른 장애를 갖고 있더라도 청각장애가 없으면 청인이라고 부른다. 농사회에서는 장애인과 비장애인 개념보다 농인과 청인 개념이 더 우선하는 세계관이다.


- 농인들만의 고유하고 그 자체로 완벽한 언어, 수화언어(수어) 


유례가 없던 폭염이 서울을 달구던, 7월 어느 토요일 오후. 뜨거운 거리를 향해 주저 없이 이촌역을 빠져나오는 이들이 있었다. 숨이 턱턱 막히는 뜨거운 열기를 이겨내고 모여드는 농인들. 오랜 갈증을 견뎌내고 마침내 해갈을 목전에 둔 이들처럼 그들의 눈은 기대감에 반짝였다.

 

‘수어민들레와 함께 하는 수어문학’


무지와 오해에서 비롯된 수많은 편견과 왜곡을 넘어, 마침내 자신들의 문화가 무엇인지 드러내고 함께 누리는 축제가 열린 것이다. 이 축제는 ‘수어민들레’가 주최하고 수어시 예술가인 장펑张鹏(중국)씨가 초대된 수어시 발표회였다. 놀랍게도 이 행사는 공식적으로 우리나라에선 처음 있는 수어시 공연이기도 했다. 농인들은 이 시·공간에서 진정한 자신과 자신의 이야기, 예술성을 목도할 수 있었다. 음향은 필요 없었다. 조명으로 충분했다. 3시간 동안 농인들은 시 한 편 한 편에 자신의 영혼을 담아 함께 느꼈다. 함께 웃고, 함께 느끼고, 함께 환호하며, 무언가 길을 찾은 이들처럼 눈을 반짝였다. 그리고 그들의 눈빛만큼이나 반짝이던 그 박수의 물결은 함께한 이들의 가슴에 뜨거운 무언가를 남겼다.

 

1535604650_63926.jpg 수어시 공연. 장펑张鹏(중국) (사진 제공 : 수어민들레)

우리나라는 수어시 불모지나 다름없다. 한국 농사회에는 청인들의 막강한 영향력으로 인해 농인문화와 청인문화의 혼종인 수화노래가 만연해 있으며, ‘소리’라는 청인문화로부터 독립된 진정한 농인의 문학을 키워내지 못해왔다. 한동안 수어콩트가 종교서사를 중심으로 명맥을 유지했었으나 그마저도 ‘수화찬양’이란 장르에 밀려 자취를 감춘 지 오래되었고, 그 예술적 역량과 농문화성은 수화뮤지컬에 소모되고 있는 게 농사회의 현실이다.

 

사실 수화노래는 수어문학도 아니고 수어예술도 아니다. 청인문화에 접붙여진 수어의 변종, 그리고 농인의 감성과 예술성에 기댄 청인문화일 뿐이다. 한국수어 원어민인 농인에게 있어 수화노래란 지루하지만 우아한 척 받아들여야 하는 퍼포먼스이거나 자신의 영혼을 팔아 얻는 찰나의 갈채에 불과하다. 수화노래는 한국수어를 쇠락하게 하는 달콤한 독이며, 수어를 배우고자 하는 청인들의 눈을 가려 한국수어의 진면목을 못 보게 하는 어둠이다. 수화뮤지컬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 안에 농인의 내러티브가 녹아들면서 농인의 참여가 늘고 있으나 청인문화라는 태생적 한계는 극복될 수 없다.

 

소리의 부재가 불편한 이들은 청인이다. 청인들에게 소리의 부재는 언어의 부재를 의미한다. 그러나 농인들만 모였을 때 그들은 소리의 부재가 더 이상 불편이 되지 않는다. 농인들에겐 그들 고유의 언어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언어, 한국수어는 소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배경음악도 효과음도 메트로놈이 정한 박자도 필요하지 않다. 다들 모르는 사실이지만 농인의 언어인 수어는 스스로 배경을 만들어내고 시각적 효과를 구현하며 고유의 내적 음률을 드러낸다. 이 지점에 수어문학이 있다.

 

- 농인만의 고유 언어 ‘수어’로 만들어진 문학, 수어문학


수어문학이란 농인의 언어인 수어로 만들어진 시와 문학을 말한다. 시와 문학이라고 하니 독자들은 문자(한글)로 된 결과물을 떠올릴 수 있겠다. 그러나 시각언어인 수어로 빚어낸 이 장르에 문자나 음성언어는 개입되지 않는다. 수어문학은 농인의 내러티브를 농인의 언어를 통해 여러 이야기 형식으로 만들어 낸 작품이다. 수어문학은 콩트나 모노드라마, 웅변 형태 안에 농인의 정체성이 드러나는 전통 농문화(농인유머, 언어유희 등), 스토리텔링(자전적), 농사회 연대기, 종교 서사 등을 담아낸다.
 
그 중 수어시(Sign Language Poetry)는 수어문학 장르 중 가장 아름답고 차원 높은 장르이다. 수어시는 수어 본래의 어휘와 문법을 사용하는 동시에 수어를 사용하는 방식과 표현을 매번 새롭게 창조한다. 그리고 그 작품이 펼쳐지는 순간 함께하고 있을 관객에게 끼칠 영향을 염두에 두며 작품을 다듬어간다. 수어시는 공연을 전제로 한 예술이기도 하다. 시공간을 공유하는 시인과 독자의 즉각적인 공감과 소통이 일어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물론 촬영된 동영상을 통해 수어문학을 접하는 독자들도 있기 마련이고 그런 상황을 염두에 둔 작품들도 만들어지고 있다.

 

‘수어시’가 기록에 등장하는 건 1960년대(미국)이다. 그 이전의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나 수어시는 농인 공동체가 존재하는 한 언제 어디에서나 있어왔다. 근대 공교육 시작 이후 농학교 등을 통해 농인들 간의 교류가 용이해지면서 농인들과 그들의 문화에 대한 기록이 가능해진 것뿐이다. 한편 수어시의 요소를 잘 갖춘 작품들이 1980~90년대에 많이 나오기 시작하였는데 녹화기술의 발달과 연관 있다. 녹화기술이 발달하면서 수어시는 동영상으로 기록되고 연구되기 시작하였으며, 농사회 미학적 언어전통의 일부로 취급되던 수어시가 하나의 장르로 자리 잡게 된다.

 

- 수어문학엔 세상을 ‘눈’으로 살아가는 ‘농인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수어문학의 내용적 핵심은 농인의 내러티브에 있다. 수어문학엔 세상을 귀가 아닌 눈으로 살아가는 농인들의 문화와 세계관, 그리고 삶의 이야기들이 담겨있다. 소리에 의존하지 않고 세상을 경험하는 농인들만의 ‘삶에 대한 감흥과 해석’은 특히 수어시로 녹아들어 경이로움과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물론 시의 장르가 다양하듯이 농인들의 수어시도 다양한 갈래를 보여준다. 자유시, 정형시, 산문시, 서정시에 해당하는 작품들도 있고 낭만시, 서사시, 저항시라 이름 붙일 만한 작품들도 있다. 그러나 어떤 이름을 붙이든 수어시엔 세상을 눈으로 사는 이들만이 발견해낼 수 있는 시정(詩情)이 있으며 그 시정(詩情)을 극적으로 심상화(心象化)했을 때 농인(관객)들은 그 작품과 하나가 된다.

 

한편 수어문학 형식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수어 그 자체이다. 수어문학은 수어의 시각적·공간적·운동적 특징을 이용하여 문자를 기반으로 한 문학과는 매우 다른 예술 형식을 만든다. 중요한 것은 수어가 음성언어에 종속된 언어가 아니며 고유의 어휘와 문법을 가진 언어라는 점이다. 그래서 수어 고유의 운율은 음악적 박자에 있지 않다. 수어는 수어만의 호흡이 있으며 그 호흡을 통해 고유의 운율과 심상을 드러낸다.

 

수어시의 운율은 수지기호(손의 모양과 동작 등)나 비수지기호(몸의 동작 등)를 통해 반복·대조·연쇄·점층·점강적으로 전개되는 것을 말하는데 이러한 운율은 관객들에게 심미적인 감동과 카타르시스를 준다. 독자들이 수어시의 운율을 확인해보고 싶다면 유튜브에 있는 Ben Bahan의 작품 ‘The Ball(공)’이나 Ian Sanborn의 작품 ‘Caterpillar(애벌레)’, ‘Tick Tock(틱톡)’ 등을 권하고 싶다.

 

 

 

 

이중 Ian Sanborn의 작품 “Caterpillar(애벌레)”는 수어시의 심상화가 잘 드러나는 작품이기도 하다. 운율과 심상은 동시적으로 구현되는데, 도상성(iconicity)은 수어시의 심상을 구현하는 강력한 전개방식이다. 메시지가 담고 있는 사물의 형태나 사건의 순서·거리·양 등을 다층적이고 동시적인 문법 구현을 통해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물론 도상성은 마임에서도 사용되는 방식이다. 그러나 수어시는 마임으론 담아낼 수 없는 복잡한 구조의 이야기를 담아낸다. 수어가 도상성 뿐만 아니라 자의성을 가진 언어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수어시는 제스처나 마임이 아니다. 예컨대 장펑张鹏씨는 자신의 작품(공연)에서 포도 한 알을 의인화하여, 와인이 되어가는 지난한 과정과 사람의 뱃속에 들어가 지나온 시간을 회상하는 포도알의 심상을 표상해낸다. 수어는 마임과는 달리 생물에서 무생물, 과거와 미래 등 그 표상에 한계가 없다.

 

한국수어는 오랫동안 한국어를 대신한 기호체계로 오해받아왔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수어를 단순한 손짓으로 생각한다. 이러한 오해로 인해 수어는 단어가 부족한 하위 언어이거나 언어로서는 자격이 부족한 소통수단이란 편견에 시달려왔다. 그러나 한국수어는 한국어와 다른 문법구조와 의미 범주를 가진 고유의 언어이다. 수지기호(손)로 구성된 단어들은 한국어와 많이 닮아서 이 단어들만 외우면 농인들과 소통이 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은데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실제 수어의 문법은 손 이외의 요소들이 대부분 결정한다. 얼핏 보면 한국수어는 조사도 존대어도 없어 보인다. 그러나 한국수어는 한국어와 다른 방식으로 주어·서술어의 관계, 문장의 유형, 존대법 등을 구사한다. 한국어와는 다른 문법체계를 가진 것이다.

 

시각언어인 한국수어의 문법은 공간에서 펼쳐진다. 절제되고 적확하게 드러내는 얼굴표지(단순하고 과장된 감정표현이 아니다)와 몸표지(어깨를 좌우로 바꾸는 것만으로 화자가 바뀌거나 한다), 그리고 수지기호(손의 모양과 동작 등)와 결합된 다양한 문법 표지들이 공간에서 동시적으로 구현된다. 그래서 손만 보는 사람은 농인의 언어를 절대로 이해할 수 없으며 농인의 언어를 가장 차원 높게 구사한 수어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수어 화자가 아니고 ‘콩글리시’처럼 수어 단어만 조작하여 의사소통하는 수지한국어 화자들은 수어시의 감흥을 느낄 수 없다. 같은 시공간에 있으면서도 함께 누릴 수 없는 예술의 세계가 수어문학, 그중에서도 수어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시각 중심의 농문화와 수어의 특질이 내재되어 있지 않은 이들, 즉 수어가 언어적으로 내재되어 있지 않은 이들은 수어시를 볼 때 마임과 같은 도상성, 그중에서도 가장 기초적인 표현 외엔 알아볼 수 없다.

 

- 노련한 모국어 구사, 문학적 소양, 예술성 어우러질 때 ‘수어시’ 가능해 


수어는 공간에서 수지기호와 비수지기호를 동시적으로 구현하여 의미를 구축해내는 언어이다. 수어문학은 수어를 통해 정보 전달을 넘어 수어 원어민인 농인들의 깊은 감성을 표현하는 문학 장르이다. 특히 수어시는 농인만의 이런 창의성과 감성 그리고 자신들만의 감동을 담아내고 있다. 농인이 이 사회에서 어떤 감성으로 사물을 보며 감동하고 살고 있는지를 수어시가 아니고는 그 어떤 문학으로도 표현할 수 없다.

 

문학에서 시(詩)는 가장 어려운 장르이다. 언어 능력, 문학적 소양, 예술성이 뛰어난 이들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시를 쓸 수 있다. 자신의 모국어를 잘 구사하는 능력은 시문학을 가능하게 하는 기본이다. 문학적 소양은 세상을 해석하는 능력이며 예술성은 그 해석을 빚어 세상에 내놓을 수 있는 힘이다. 이런 재능들이 어우러져야 한 편의 시가 나온다. 자신의 모어가 무엇이든 그 언어의 정점에 있지 않은 한 시를 내오기는 어렵다. 마찬가지로 수어라는 언어의 정점에 있고 문학적 소양과 예술성이 뛰어난 수어 원어민일수록 수어시를 더 잘 빚어낸다. 그런 의미에서 수어시는 오롯이 한국수어 원어민인 농인의 장르이다.

 

1535604796_47683.jpg 수어시 공연. 변강석(한국) (사진 제공 : 수어민들레)
 

- 한국어로 쓴 시, 수어로 번역한다고 ‘수어시’되는 거 아냐


농사회는 다른 장애 영역과는 다르게 한국어가 아닌 한국수어라는 고유의 언어를 갖고 있다. 그리고 농인들은 자신들의 언어를 통해 고유하고 독창적인 문학을 꽃피울 수 있다. 그 수어문학의 꽃이 바로 수어시이다.

 

안타까운 건 많은 이들이 수어시가 한국시를 수어로 번역한 것으로 생각한다는 점이다. 수어시에 대한 엄청난 오해인데 수어시는 한국어에서 출발한 번역물이 아니다. 한국어로 된 문학이나 시를 수어로 변환하는 건 그야말로 번역물이다. 이런 번역물은 수어시가 아니다. 또 한 가지, 많은 이들이 수어시를 보면 마임을 떠올린다는 점이다.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수어시 안에는 도상성이라고 일컬어지는 심상화 방식이 있다. 이 방식은 마임에서도 사용되는 방식이다. 그러나 마임이 구현할 수 없는 다양한 메시지를 수어시는 품고 키울 수 있다. 연대기적 구조나 다양한 인물의 등장 등이 가능한 이유는 수어가 가진 언어의 힘이다.

 

한편, 모든 언어가 그렇듯이 수어는 완벽한 언어이다. 그러나 그 언어를 기록할 수 있는 도구가 없다. 문자로 수어를 기록해 온 모든 방식은 결과적으로 수어의 진면목을 왜곡하고 그 가치를 축소해왔다. 시각언어인 수어를 온전히 기록할 수 있는 문자는 없다. 오늘날 그 역할을 하고 있는 건 동영상 촬영기들이다. 그러나 이 또한 기록이라 말하기 어렵다. 이렇게 수어시는 농인의 이야기(메시지)와 운율, 그리고 심상을 갖춘 아름다운 문학임에도 불구하고 온전히 기록될 수 없기에, 음성언어로 번역되는 순간 빛이 바래진다.

 

수어시는 경이로움을 간직한, 소수민족의 구전문학보다 더 가혹한 운명 앞에 있다. 어쩌면 온전한 기록과 전승은 농인의 심장과 영혼에 새겨지고 전해지는 것일지 모른다. 여기에 수어문학을 꽃피울 환경이 조성되어야 할 이유가 있다. 인공와우이식술과 통합교육의 확대는 농문화의 요람인 농학교의 쇠락을 가져오고 있으며 농아동들은 자신들의 언어를 배울 시·공간을 잃어가고 있다. 그리고 IT기술과 개인미디어의 발달로 인해 한국수어에 대한 왜곡된 정보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에 걷잡을 수 없이 쌓여가고 있다. 홍수에 마실 물이 없는 형국이다.


이제 한국수어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기초연구가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농문화의 정수인 수어문학, 그중에서도 수어시에 대한 관심을 두고서 수어문학이 성장할 수 있도록 길이 열어갔으면 한다. 그래서 수어문학을 통해 한국수어의 본질이 보존되고 농문화가 풍성하게 전승되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언어적 소수자인 농인들의 예술혼이 담긴 수어문학, 수어시는 농문화의 과거이자 현재이며 미래이기 때문이다.

 

 

 

 

 

 

출처 : http://www.beminor.com/detail.php?number=12547&thread=03r01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 서울특별시 홈페이지
  •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홈페이지
  • 중랑구 홈페이지
  • 보건복지부 홈페이지
  •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홈페이지
  • 장애인 활동지원 홈페이지
상단바로가기

QUICK
MENU 화살표

  • 공지사항
  • 상담게시판
  • 활동사진
  • 오시는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