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인의 내러티브가 담긴 농문화의 정수(精髓), 수어시
작성자 2018-08-31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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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 Ian Sanborn의 작품 “Caterpillar(애벌레)”는 수어시의 심상화가 잘 드러나는 작품이기도 하다. 운율과 심상은 동시적으로 구현되는데, 도상성(iconicity)은 수어시의 심상을 구현하는 강력한 전개방식이다. 메시지가 담고 있는 사물의 형태나 사건의 순서·거리·양 등을 다층적이고 동시적인 문법 구현을 통해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물론 도상성은 마임에서도 사용되는 방식이다. 그러나 수어시는 마임으론 담아낼 수 없는 복잡한 구조의 이야기를 담아낸다. 수어가 도상성 뿐만 아니라 자의성을 가진 언어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수어시는 제스처나 마임이 아니다. 예컨대 장펑张鹏씨는 자신의 작품(공연)에서 포도 한 알을 의인화하여, 와인이 되어가는 지난한 과정과 사람의 뱃속에 들어가 지나온 시간을 회상하는 포도알의 심상을 표상해낸다. 수어는 마임과는 달리 생물에서 무생물, 과거와 미래 등 그 표상에 한계가 없다.
한국수어는 오랫동안 한국어를 대신한 기호체계로 오해받아왔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수어를 단순한 손짓으로 생각한다. 이러한 오해로 인해 수어는 단어가 부족한 하위 언어이거나 언어로서는 자격이 부족한 소통수단이란 편견에 시달려왔다. 그러나 한국수어는 한국어와 다른 문법구조와 의미 범주를 가진 고유의 언어이다. 수지기호(손)로 구성된 단어들은 한국어와 많이 닮아서 이 단어들만 외우면 농인들과 소통이 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은데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실제 수어의 문법은 손 이외의 요소들이 대부분 결정한다. 얼핏 보면 한국수어는 조사도 존대어도 없어 보인다. 그러나 한국수어는 한국어와 다른 방식으로 주어·서술어의 관계, 문장의 유형, 존대법 등을 구사한다. 한국어와는 다른 문법체계를 가진 것이다.
시각언어인 한국수어의 문법은 공간에서 펼쳐진다. 절제되고 적확하게 드러내는 얼굴표지(단순하고 과장된 감정표현이 아니다)와 몸표지(어깨를 좌우로 바꾸는 것만으로 화자가 바뀌거나 한다), 그리고 수지기호(손의 모양과 동작 등)와 결합된 다양한 문법 표지들이 공간에서 동시적으로 구현된다. 그래서 손만 보는 사람은 농인의 언어를 절대로 이해할 수 없으며 농인의 언어를 가장 차원 높게 구사한 수어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수어 화자가 아니고 ‘콩글리시’처럼 수어 단어만 조작하여 의사소통하는 수지한국어 화자들은 수어시의 감흥을 느낄 수 없다. 같은 시공간에 있으면서도 함께 누릴 수 없는 예술의 세계가 수어문학, 그중에서도 수어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시각 중심의 농문화와 수어의 특질이 내재되어 있지 않은 이들, 즉 수어가 언어적으로 내재되어 있지 않은 이들은 수어시를 볼 때 마임과 같은 도상성, 그중에서도 가장 기초적인 표현 외엔 알아볼 수 없다.
- 노련한 모국어 구사, 문학적 소양, 예술성 어우러질 때 ‘수어시’ 가능해
수어는 공간에서 수지기호와 비수지기호를 동시적으로 구현하여 의미를 구축해내는 언어이다. 수어문학은 수어를 통해 정보 전달을 넘어 수어 원어민인 농인들의 깊은 감성을 표현하는 문학 장르이다. 특히 수어시는 농인만의 이런 창의성과 감성 그리고 자신들만의 감동을 담아내고 있다. 농인이 이 사회에서 어떤 감성으로 사물을 보며 감동하고 살고 있는지를 수어시가 아니고는 그 어떤 문학으로도 표현할 수 없다.
문학에서 시(詩)는 가장 어려운 장르이다. 언어 능력, 문학적 소양, 예술성이 뛰어난 이들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시를 쓸 수 있다. 자신의 모국어를 잘 구사하는 능력은 시문학을 가능하게 하는 기본이다. 문학적 소양은 세상을 해석하는 능력이며 예술성은 그 해석을 빚어 세상에 내놓을 수 있는 힘이다. 이런 재능들이 어우러져야 한 편의 시가 나온다. 자신의 모어가 무엇이든 그 언어의 정점에 있지 않은 한 시를 내오기는 어렵다. 마찬가지로 수어라는 언어의 정점에 있고 문학적 소양과 예술성이 뛰어난 수어 원어민일수록 수어시를 더 잘 빚어낸다. 그런 의미에서 수어시는 오롯이 한국수어 원어민인 농인의 장르이다.
수어시 공연. 변강석(한국) (사진 제공 : 수어민들레)
- 한국어로 쓴 시, 수어로 번역한다고 ‘수어시’되는 거 아냐
농사회는 다른 장애 영역과는 다르게 한국어가 아닌 한국수어라는 고유의 언어를 갖고 있다. 그리고 농인들은 자신들의 언어를 통해 고유하고 독창적인 문학을 꽃피울 수 있다. 그 수어문학의 꽃이 바로 수어시이다.
안타까운 건 많은 이들이 수어시가 한국시를 수어로 번역한 것으로 생각한다는 점이다. 수어시에 대한 엄청난 오해인데 수어시는 한국어에서 출발한 번역물이 아니다. 한국어로 된 문학이나 시를 수어로 변환하는 건 그야말로 번역물이다. 이런 번역물은 수어시가 아니다. 또 한 가지, 많은 이들이 수어시를 보면 마임을 떠올린다는 점이다.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수어시 안에는 도상성이라고 일컬어지는 심상화 방식이 있다. 이 방식은 마임에서도 사용되는 방식이다. 그러나 마임이 구현할 수 없는 다양한 메시지를 수어시는 품고 키울 수 있다. 연대기적 구조나 다양한 인물의 등장 등이 가능한 이유는 수어가 가진 언어의 힘이다.
한편, 모든 언어가 그렇듯이 수어는 완벽한 언어이다. 그러나 그 언어를 기록할 수 있는 도구가 없다. 문자로 수어를 기록해 온 모든 방식은 결과적으로 수어의 진면목을 왜곡하고 그 가치를 축소해왔다. 시각언어인 수어를 온전히 기록할 수 있는 문자는 없다. 오늘날 그 역할을 하고 있는 건 동영상 촬영기들이다. 그러나 이 또한 기록이라 말하기 어렵다. 이렇게 수어시는 농인의 이야기(메시지)와 운율, 그리고 심상을 갖춘 아름다운 문학임에도 불구하고 온전히 기록될 수 없기에, 음성언어로 번역되는 순간 빛이 바래진다.
수어시는 경이로움을 간직한, 소수민족의 구전문학보다 더 가혹한 운명 앞에 있다. 어쩌면 온전한 기록과 전승은 농인의 심장과 영혼에 새겨지고 전해지는 것일지 모른다. 여기에 수어문학을 꽃피울 환경이 조성되어야 할 이유가 있다. 인공와우이식술과 통합교육의 확대는 농문화의 요람인 농학교의 쇠락을 가져오고 있으며 농아동들은 자신들의 언어를 배울 시·공간을 잃어가고 있다. 그리고 IT기술과 개인미디어의 발달로 인해 한국수어에 대한 왜곡된 정보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에 걷잡을 수 없이 쌓여가고 있다. 홍수에 마실 물이 없는 형국이다.
이제 한국수어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기초연구가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농문화의 정수인 수어문학, 그중에서도 수어시에 대한 관심을 두고서 수어문학이 성장할 수 있도록 길이 열어갔으면 한다. 그래서 수어문학을 통해 한국수어의 본질이 보존되고 농문화가 풍성하게 전승되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언어적 소수자인 농인들의 예술혼이 담긴 수어문학, 수어시는 농문화의 과거이자 현재이며 미래이기 때문이다.
출처 : http://www.beminor.com/detail.php?number=12547&thread=03r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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