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애를 일으키는 ‘무서운 질병’, 당뇨병
내분비학 교과서를 펼쳐 ‘당뇨병' 부분을 보면, 항상 흉흉한(?) 사진이 당뇨의 무서움을 과시한다. 그 이름은 당뇨발(Diabetes mellitus foot). 만성적으로 당뇨병이 진행되면서 말초신경의 감각이 저하되고, 상처에도 통증을 느끼지 못해 점차 발이 썩어들어 가는 질병이다. 당뇨발이 어느 시기 이상 진행되면 회복이 불가하며, 결국 발을 절단하기에 이른다.
실습생으로 내분비내과 실습을 하다 보면 “어느 병동에 당뇨발 환자가 있고, 곧 다리를 절단해야 한다더라.”는 소문을 익히 들을 수 있는데, 이처럼 당뇨발은 ‘만성질환의 무서움’ 혹은 당뇨를 방치했을 때의 ‘처참한 결과’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질환이다. 당뇨병은 그 밖에도 당뇨망막병증을 유발하여 시력의 영구적인 손상을 가져오기도 하며, 신장을 망가뜨려 말기신부전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처럼 절단장애, 시각장애, 신장장애를 초래하는 당뇨는 가히 ‘무서운 질병’이라 하겠다.
- ‘당당한 장애(Disability Pride)’ 앞에서 당뇨약을 건넬 수 있을까
이러한 ‘의료지식’으로 단단히 무장한 나는, 우연한 기회로 여러 장애인 당사자들을 대상으로 당뇨를 비롯한 만성질환 관리 강좌를 진행하게 되었다. 참여자 가운데는 휠체어 장애인, 자폐성 장애인, 지적장애인 등의 다양한 당사자가 포함되어 있었기에, 청자에게 맞는 강의자료를 만들기 위해 위의 의과대학 교과서를 펼쳐 들었다.
그러나 이윽고, 교과서 속 당뇨에 대한 모든 설명들이, 장애 당사자를 대상으로 한 강좌에선 대단히 무례한 것이 될지 모른다는 예상치 못한 사실에 직면했다. 당뇨에 대한 서술은 마치 ‘당뇨’는 ‘병’으로, 당연히 안 좋은 것이므로 치료해야 한다는 전형적인 만성질환의 겉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그 근거의 근거를 추적하면, 결국 당뇨는 장애를 초래하기 때문에 치료해야 한다는 설명에 다다르게 된다. 결국 ‘당뇨를 예방’해야 한다는 당위는, (당뇨에 수반되는 피로 등의 증상들을 논외로 하면) ‘장애를 예방’해야 한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1)
이처럼 ‘만성질환 치료’가 결국 ‘장애 예방’이라면, 여러 난처함이 금방 눈에 들어온다. 당뇨병이 진행되면 당뇨발이 생기고, 결국 다리를 ‘못’ 쓰(는 ‘불행’에 처하)게 되며, 이를 ‘예방’하기 위해 당뇨 관리를 해야 한다는 말을, 과연 하반신 마비/절단 장애인 참가자 곁에서 할 수 있을까? 당뇨병이 진행되면 눈의 망막혈관이 터지고, 눈이 멀게 되(어 ‘불행’해지)므로 이를 막기 위해 당뇨 관리를 해야 한다는 말을 시각장애인과 함께 나눌 수 있을까? 당뇨를 예방하고 관리한다는 말은, ‘당신과 같은 불행’을 막기 위해 노력한다는, 대단히 실례되는 말과 무엇이 다를까.
수십 년의 세월을 삶으로 길어 올려 ‘당당한 존재’로서의 언어를 쟁취해온 장애 당사자들. 의료인이 장애를 막기 위해 누군가에게 당뇨약을 건네는 행위는, 그들이 쌓아온 가치에 대한 부정인 것은 아닐까. 장애가 진정 ‘불행’하거나 ‘거부’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면, 오히려 사회적 억압에 맞서는 자부심이라면, 만성질환을 막으려는 의료인의 노력은 무슨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2015년도 독일 베를린에서 이루어진 장애 프라이드 퍼포먼스. 1990년대 미국에서 시작된 장애 프라이드(Disability Pride) 행진은, 전 세계적으로 확장되며 자신의 ‘다른 몸’에 대한 당당함과 자부심을 표현해 왔다.
- 진행하는 손상 앞에서 : 장애의 사회모델, 정체성 그리고 약
장애를 초래하는 만성 질병에 대한 ‘치료의 딜레마’를 명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비슷한 결과로 귀결되지만 그 과정은 서로 다른 네 가지 손상 경험에 주목하여야 한다.2)
① 선천성 손상 : 태어났을 때부터 손상을 지니고 태어난 경우이다. 이들에게 손상은 초기 정체성 형성 시기부터 내재되어 정체성의 일부분이 되는 경우가 많다.
② 후천적이고 고정적인 손상 : 척수 손상처럼, 기존의 몸에서 다른 몸으로 단절적으로 이행하지만, 재활 등의 일정한 치료 이후에는 일정한 몸 상태를 유지한다.
③ 빠르게 진행하는 질병에 의한 손상 : 다발성 경화증, 근이영양증 등처럼, 기존의 몸에서 다른 몸으로 빠르고 연속적으로 이행하며, 지속해서 손상이 추가된다.
④ 느리게 진행하는 질병 / 노화에 의한 손상 : 관절염과 당뇨처럼, 기존의 몸에서 다른 몸으로 아주 느리게 연속적으로 이행하며, 지속해서 손상이 추가된다. 질병 말기 이전에는 손상이 거의 드러나지 않거나 체감되지 않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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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까지 장애운동의 주된 정신이 되어온 장애의 사회적 모델(Social Model of Disability)3)은 네 가지 손상 경험 중 손상 정도가 일정하게 유지되는, 따라서 고정된 손상을 둘러싼 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는 ①, ②와 같은 경우를 중심으로 발전해 왔다. 따라서 자신의 ‘손상’을 사회적 차별과 분리시키며, 손상에 대해 안정된 정체성을 형성함으로써 장애 프라이드(Disability pride) 운동이 시작될 수 있었다.
그러나 어제의 장애보다 오늘의 장애가, 오늘의 장애보다 내일의 장애가 점점 더 심해지는 ③, ④와 같은 ‘질병’의 경우, 특정한 장애 상태로 안정적 정체성을 형성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늘 가진 손상과 장애 정도에 맞추어 스스로의 정체성을 형성하면 내일 더 악화되고, 악화된 손상에 겨우 정체성을 다시 형성하면 손상은 더 멀리 달아나버리는 질병의 진행 앞에서, ‘고정된 손상’을 중심으로 정체성을 형성하는 장애에 대한 사회적 모델의 기획은 적합하지 않은 듯이 보인다.
그렇기에 장애운동에서 자신의 장애를 당당하게 생각할 가능성을 열었던 투쟁의 역사와는 달리, 질병을 가진 당사자들의 목소리는 철저히 의료화된 방식으로 구성되었다. ‘비극’으로서의 만성 질병을 가진 스스로의 몸은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고, 언제 더 악화될지 모르는 몸은 결코 긍정하기 어려운 정체성이었다. 의료화된 질병 인식 모델 이외의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질병은 정체성 바깥으로 밀려났고, ‘외부의 적’인 질병과의 투쟁의 서사가 병원과 환자를 지배해왔다.
이러한 인식의 한계 속에서, 장애차별의 역사와 질병차별의 역사는 서로 다른 두 길을 걷게 되었다. 장애차별은 장애운동으로 전환되어왔지만, 질병차별의 역사는 여전히 개인의 불운이나 의료적 모델 속에 갇혀왔던 것이다.
그렇기에 장애계에서 진행된 장애와 손상에 대한 논의는 질병의 경험에 대해서도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만성질환을 지닌 몸을 스스로 어떻게 정체화할 수 있을까? 의료모델에서처럼 질병을 악마화하지 않으면서도 치료를 긍정할 가능성을 우리는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을까? 장애운동과 질병운동은 함께할 수 있는 것일까?
- 당뇨를 끌어안으며 : 질병과 장애의 화해를 위해
이러한 의문에 대한 하나의 해답으로,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저자 김원영 씨는 장애라는 것을 정체성으로 ‘믿는 것’과 ‘수용하고, 살아내는 것’ 간의 차이를 지적한다. 질병이나 장애를 그 자체로 ‘좋은 것’이라 믿는 자부심과, 그것을 끌어안고 살아내며 스스로의 이야기를 써나가는 ‘저자(author)’로서의 자부심은 다른 차원이라는 것이다.
장애를 받아들이는 일은 장애를 어떤 가치 있는 산물이라고 믿는 일과는 다르다. 그러한 믿음은 우리가 장애아의 출산을 손해라고 생각하는 순간 지속되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가치 있는 산물이 손해라는 말인가.
그러나 장애라는 정체성이 어떤 산물이기보다는 장애라는 경험에 맞서 한 개인이 작성해나가는 ‘이야기’ 그 자체라면, 우리가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일은 하나의 국면이 아니라 긴 삶의 시간 동안 그것을 ‘써나가는’ 일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장애의 수용이란 결국 우리가 철저히 자발적으로 정체성을 작성해나가는 일을 의미하게 된다.4)
장애라는 ‘상태’를 정체성이라고 ‘믿는’ 것은 “맥락에 따라 변형되지 못하고,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줄곧 고수된다.”(p.204) 이러한 믿음은 손상이 일정하고 통증이 적은 일부 장애에서는 적합할지 모르지만, 끊임없이 손상이 추가되고 중복장애가 일어나는 질병의 경우에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그러나 개인의 정체성이 어떤 장애나 질병의 손상 상태가 ‘좋기 때문’이 아니라, 누구나 존엄할 권리가 있다는 믿음으로 손상과 더불어 삶을 살아내는 개인의 수행적 가치(performative value)에 기반 한다면, 질병을 지닌 사람의 삶 또한 그 자체로 긍정될 수 있다.
1형 당뇨에 걸린 아이의 삶이 그 자체로 존중받으며 질병과 더불어 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는 것은, 그 질병에 걸린 상태가 좋다고 믿어져서가 아니다. 오히려 질병은 끊임없이 죽음을 환기하며 인생의 마지막으로 달려간다. 처음에는 눈을, 다음에는 신장을, 그 이후에는 발을 침범할 것을 예고하며 서서히 몸을 잠식해간다. 어제와는 다른 오늘의 몸. 오늘보다 나빠질 내일의 몸. 몸의 ‘상태’에 집중하는 개인은 스스로의 몸을 긍정하기 어렵다.
오히려 정체성의 시작은, 그 질병과 손상을 끌어안고 인생을 살아내는 개인의 의지에서 출발한다. 질병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삶은 존중받아야 한다는, 그러한 인간적 존중을 위해 사회와 맞서며 스스로의 삶을 꾸려나가는 이야기의 주체로서 그 아이는 존엄한 하나의 정체성을 써나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인생’이라는 서사적 맥락 속에서, 질병은 정체성의 한 부분으로 새롭게 읽힐 수 있지 않을까.
- ‘달리기의 스타일’ 확보하기 : ‘서사의 편집권’으로서의 약과 새로운 의학의 가능성
이제 다시 앞서 살펴본, 당뇨를 약물로 치료한다는 것의 문제로 돌아와 보자. ‘저자로서의 장애 당사자’라는 개념을 받아들이면, 진료실과 약국에서 오가는 무수히 많은 당뇨약 처방의 의미가 새롭게 읽힌다.
손상을 막는 것은 그의 정체성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당뇨병 환자에 대한 존중은 그 ‘손상’ 혹은 ‘고통’에 대한 찬미가 아닌, 손상과 고통을 껴안고 살아가는 것 ― 그것을 끌어안고 어떠한 인생을 살아갈지 ‘결정하는 것’에 대한 존중에 다름 아니다.
이야기의 주체로서의, 서사의 편집권을 가진 장애인이라는 정체성. 이제 당뇨 당사자에게 약은 하나의 통제나 관리의 수단이 아니라, 당뇨 당사자가 인생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인생의 편집권5) 중 택할 수 있는 하나의 방식이 된다. 인생의 흐름 속에서 죽음으로 휩쓸려가는 인간에게, 장애를 지닌 몸으로 내달려가는 인간에게, 약은 그 달려감을 멈추거나 부정하는 것이 아닌 스스로가 원하는 ‘달리기의 스타일’을 확보하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
‘비정상’으로서의 장애, ‘고쳐야 할’ 장애라는 인식을 조장해왔던 얄궂은 의료모델은, 의학이 보일 수 있는 유일한 얼굴이 아니다. 의학은 의료모델을 넘어설 수 있으며, 약물은 ‘저자로서의 장애인’이 자신의 인생을 자신만의 스타일로 써나가는 하나의 수단이 될 수 있다. 의료모델의 진정한 극복은 의학의 부정이 아니라, 의학이 장애 주체의 편집권으로 해석되고 실천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곳에서 의학과 장애학의 화해가, 질병과 장애의 화해가 열리며, 보다 인간적인 의학의 가능성이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 각주
1) 이러한 논리 구조는 고혈압, 고지혈증 등 대부분의 만성질환에서도 마찬가지로 성립한다.
2) 이러한 분류는 Tom Shakespeare, 이지수 역, 『장애학의 쟁점 - 영국 사회모델의 의미와 한계』, 학지사 p.188-191의 논의에 빚지고 있다.
3) 장애에서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 불리는 ‘장애의 사회모델’은 몸의 ‘손상’과 사회적 불편함인 ‘장애’를 분리하여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였다. 예컨대 하반신 마비라는 손상이 있어 계단을 못 올라가는 것이 아닌, ‘비장애인’을 기준으로 설계된 계단이라는 존재가 계단을 못 올라가게 하는 진짜 원인이라는 것이다. 장애는 사회적 원인에 의한 것이라, 본인이 겪어온 배제와 차별이 신체 손상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면, 손상에 대해서 주눅 들거나 열등함을 느낄 필요가 없었다. 사회모델을 통해 장애 당사자는 스스로의 책임이나 운명으로 여겨왔던 장애를 사회적 권리에 대한 목소리로 바꾸어 냈고, 스스로의 ‘손상’을 다른 각도에서 사유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4) 김원영(2018),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사계절 (강조는 필자)
5) 김현경(2015), 『사람, 장소, 환대』, 문학과지성사
유기훈
노들장애인야학 교사. 함께 살아가는 의미를 찾아 공학, 인류학, 의학 등을 떠돌다가 노들장애인야학에 입성하였다. 야학과 병원의 언저리에 머물며, 억압하는 의학이 아닌 위로하는 의학을 꿈꾸고 있다. 노들장애인야학 바로 앞에 사는 것을 큰 기쁨으로 여기며 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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