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시원할 때 오셨어요."
420장애인차별철폐대구투쟁연대(아래 420장애인연대)는 대구시에 장애인 탈시설-지역사회 자립 정책을 요구하며 6월 18일부터 농성을 이어오고 있다. 농성 50일째인 지난 6일, 대구 시청 맞은편 주차장에 자리 잡은 농성장을 찾자, 사람들이 앞다투어 입을 모은다. "오늘 바람도 많이 불고 온도도…34도밖에 안 되네. 아, 원래는 정말 너무너무 덥고 고생하는데…억울하네."
대구시청 맞은편에 자리잡은 농성장에 420장애인연대 회원들이 모여있다.
숨을 쉴 때마다 폐 속으로 뜨거운 공기가 밀려들어 오고, 얼음을 내놓으면 5분 만에 녹아내리는 날이었다. 그러나 농성장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은 더위에 익숙해진 듯 "이 정도면 참을 만하다"라며 웃었다. 전은애 함께하는부모회 회장은 "보통은 농성장에 반나절만 있다 가도 이틀간 약도 소용없는 두통에 시달릴 정도로 덥다"고 말했다. "농성장 차리던 첫날, 기온이 31도였는데 저 그날 바로 더위 먹어서 링거주사 맞았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36, 7도 돼도 그냥 덥나보다 하고 있어요."
옆에서 듣고 있던 조경원 전국장애인야학협의회 활동가도 한마디 거든다. "농성장 지키는 분 중에 대부분 휠체어를 이용하는 분들이 많아요. 저도 그렇고. 농성장에 앉아있으면 땀이 줄줄 흐르는데, 우리는 의자에 계속 앉아있으니까 땀이 하체에 막 고이죠. 다행히도, 회원분들 중에 척수장애인분들은 별로 없으세요. 이런 날 욕창 생기고 심해지기 딱 좋거든요. 아 이걸 다행이라고 말하긴 좀 그런가? 하하."
이 더위를 식히는 도구는 스탠드형 선풍기 한 대. 모터 위엔 맥주캔이 달려있다. 조금이라도 시원한 바람이 나왔으면 하는 간절함이 담겨있다. 그러나 제아무리 캔을 달아본들, 선풍기에서 나오는 뜨거운 바람만으로는 도저히 열을 식힐 수 없다. 사람들은 얼린 생수병을 하나씩 잡고서, 배며 목이며 머리 위에 얹어본다. 가끔 뜨거운 아스팔트 바닥에서 올라오는 열을 식히기 위해 호스로 물을 뿌린다.
물을 뿌리던 조민제 대구장애인지역공동체 사무국장이 "호스에 얽힌 에피소드가 있다"며 웃는다. "시청 화단에 물 주는 호스가 있길래, 처음엔 그걸로 물을 뿌렸어요. 한 두어 번 썼나? 시청 청경들이 찾아와서 ‘위에서 지시가 내려왔다. 호스 쓰지 말라’고 하는 거예요. 시청 물건이니까 쓰지 말라고. 농성장에 있는 사람들 다 대구시민인데 시청 물건 못 쓰냐고 항의했는데도 안 된대요. 열 받아서 그 길로 호스 사 왔죠."
시청에서 막은 것은 호스뿐만이 아니다. 농성장에 불을 켜고 물이라도 얼릴 수 있는 냉장고를 가동하려면 전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시청은 갑자기 전기 공사를 한다며 배관선을 막았다. 장애인 화장실 역시 시청 건물 안에만 있는데, 시청은 휠체어 이용 장애인의 출입 자체를 막기도 했다.
농성장 바닥에서 올라오는 열을 식히기 위해 호스로 물을 뿌리고 있다.
농성 지킴이가 휴대용 선풍기로 바람을 쐬고 있다.
- "권영진 시장님을 빼놓고는 농성장을 이야기할 수가 없네요"
시청의 비협조적 태도는 농성장의 시작과 맞닿아 있다. 6.13 지방선거를 앞두고, 420장애인연대는 대구시장 후보들과 정책 협약을 맺었다. 대구시의 주요 현안인 대구시립희망원 사건 해결과 탈시설, 자립생활 정책 보장 등이 이들의 요구사항이었다. 당시 시장 후보들과 모두 협약을 맺었지만, 가장 유력한 후보이자 재선에 도전하는 권영진 대구시장과는 끝내 협약을 맺지 못했다. 권 시장은 후보 시절 두 차례에 걸쳐 협약을 약속했으나, 두 차례 모두 결렬되었다.
420장애인연대 회원들은 협약 성사를 읍소하고자 권 시장의 거리 선거유세장을 찾았다. 피하려는 권 시장과 잡으려는 420장애인연대 회원들 간에 실랑이가 벌어졌고, 그 과정에서 권 시장이 뒤로 넘어지며 꼬리뼈 부상을 입었다. 어떤 사람들은 선거기간 중 후보자에 대한 '테러'라며 420장애인연대를 비난했고, 다른 이들은 석연치 않은 권 시장의 부상에 '장풍이라도 맞았나 보다'라며 조소했다. 사실이 무엇이건, 양측의 감정의 골은 더 깊어졌다.
권 시장이 또다시 대구시장으로 당선된 후, 420장애인연대는 △대구시립희망원 사건 해결 및 탈시설 정책 가속화 △발달장애인 사회통합 기본계획 △사회서비스원을 통한 장애인복지 공공성 강화 △활동지원 24시간 확대 및 보장성 강화 △여성장애인 종합지원체계 구축 등을 요구하며 본격적인 농성에 돌입하게 된다. 협약의 배경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전(前) 시장이면서도 협약에는 끝내 동의하지 않은 권 후보의 당선에 420장애인연대 회원들은 곧바로 농성을 결의했다.
"권영진 후보 사무실 앞에서도 한 번 농성장을 열었다가 캠프에서 협약식 하자는 이야기 나와서 접었는데 결국 결렬됐거든요. 더구나 여론전까지 발생하니까 실망과 분노가 컸죠. 권 시장과의 대화가 쉽지 않겠다는 생각도 있었고. 아마 여기 천막 칠 때 다들 직감적으로 알았을 거예요. 길게 가겠구나." (조민제 사무국장)
권 시장은 지난 7월 1일, 태풍 '쁘라삐룬'이 한반도를 향하고 있다는 예보에 취임식도 취소하고 긴급대책회의를 했다. 그리고 이튿날인 2일, 처음으로 찾은 농성장에서 태풍으로 인한 안전사고가 우려된다며 "철수했다가 날이 좋아지면 다시 해 달라"고 말했다. 농성장에 대한 대구시의 공식적 대응은 이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박명애 대구장애인지역공동체 대표는 "이게 감정적으로 갈 문제가 아닌데, 자꾸 이런 식으로 번지니까 정말 답답하고 속상하다"고 토로했다. "우리가 무슨 얼토당토않은 걸 요구하는 것도 아니고, 다 지난 임기 때 권 시장이 약속했던 거 지키라는 건데, 자꾸 '나는 특정 단체와 협약할 수 없으니 나를 믿고 농성을 접어달라'고만 하니까요. 우리는 물러날 곳이 없어서 못 돌아갑니다. 우리는 지금 생존을 이야기하는데 자꾸만 '한 단체와만 협약할 수는 없다'는 이야기만 반복하는 건 공직자, 더구나 시장이 할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박 대표는 이어 말했다. "우리가 권 시장한테 앙금이 있어서 이러고 있겠습니까. 이전에야 후보로서 개인에게 협약을 요구한 거였지만, 이제는 대구시를 대표하는 시장이니까 대화를 계속 요구하는 거죠. 우리와 굳이 '협약' 맺을 필요도 없어요. 대구시에서 책임 있게 정책으로 가져간다는 약속을 하고, 그에 맞는 예산을 배정하면 돼요. 시스템에 대한 요구지 개인에 대한 '생떼'가 아니라는 거예요."
김재민 대구사람장애인자립생활센터 활동가가 하얀색 팔토시를 하고 있다.
- "우리의 배후세력이요? 나의 가족, 또 다른 장애인들, 그리고 나 자신이요."
말 그대로 폭력적인 더위에 한 번, 우호적이지 않은 시장에 또 한 번 풀이 꺾일 법도 하지만, 농성장을 지키는 사람들은 꿋꿋하다. 너무 더우면 농성장에 모여앉아 신나게 얼음을 갈아 팥빙수를 만들어 먹고, 얼음주머니를 만들어 머리에 얹고는 '인증샷'을 찍어 올린다. 농성장 백일이 되는 날, 떡을 할지 국수를 먹을지 옥신각신하고, 해가 너무 잘 드는 곳이니 기념식수라도 심어서 그늘을 만들어 보자느니, 추석에는 대구의 상징인 독수리에게 차례를 지내며 장애인 생존권을 기원하자는 이야기들이 즐겁게 오간다.
이날 농성장 낮 당번인 대구사람장애인자립생활센터 활동가들에게 농성이 힘들진 않은지, 길어지는 것이 우려되진 않는지 묻자 모두 "우리는 다 '농성 4년(대구시장 임기) 하겠다'라고 마음 다잡고 있다"며 웃음을 터뜨린다. 김형기 활동가는 "농성장 지키고 1인 시위 하는 건 당연히 힘든데, 그래도 우리가 다 같이 안 싸우면 해결이 안 될 것 같으니까 오는 거예요.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큰 힘이 되니까요"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듣자 함께 있던 활동가들이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임은현 활동가가 말을 이어갔다. "어쨌든 '내 일'이니까요. 농성장에서 요구하는 것들이 다 저의 삶과 관련 있잖아요. 특히 '여성장애인 종합지원체계 구축' 같은 거요." 노지성 활동가 역시 자신의 의제를 마음에 품고 농성에 참여하고 있다. "저는 활동지원 24시간 보장이요. 지금은 한 달에 168시간밖에 못 받거든요. 그래서 화요일에는 아예 활동지원을 못 받고… 그래서 그날은 밥 굶거나 밖에서 사먹어요. 활동지원, 우리에겐 꼭 필요해요." 김재민 활동가는 주먹까지 쥐어가며 덧붙였다. "지금 장애인 정책이 다 우리 '선배'들이 투쟁해서 만든 건데. 그냥 가만히 있어서 되겠습니까. 얼마 전에도 활동지원 24시간 못 받아 동지들이 죽고, 아팠잖아요. 그런 점에서 여기(농성장)가 우리 목숨이에요. 계속 나와서 어떻게든 우리 목소리를 내야죠, 여기서."
농성장에 거의 매일 나와 있다시피 해 '농성장 지박령(地縛靈)'이라는 별명까지 붙은 최관용 씨는 4년 전, 장애인 거주시설에서 나왔다. 50일 중 그가 농성장에 없었던 날은 사흘 남짓이다. "매일, 자주 와야지 권영진 시장님이 우리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듣지 않겠어요? 우리 이야기 꼭 들어주셔야 하는데..." 무엇이 그렇게 간절한지 묻자 그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말을 이어간다. "제가 시설에서 나왔잖아요. 농성장 힘들다고 하지만 시설도 힘들었어요. 더웠어요. 에어컨 있어도 못 틀었어요. 선생님들만 에어컨 틀고. 밤에도 자기들끼리만 고기 구워 먹고. 그런데 나오니까 다 할 수 있어요. 희망원뿐만 아니라, 다른 시설들에 갇혀있는 사람들 다 탈출하게 도와주고 싶어요, 꼭."
왼쪽부터 전은애 회장, 조민제 국장, 박명애 대표가 농성이 시작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대구시청 앞 농성장을 지키는 사람들.
전은애 회장은 이번 농성장이 유난히 아프게 느껴진다. "권 시장님 꼬리뼈 부상 사건 당시, 권 시장을 '폭행'했다고 지목된 여성분이 저희 부모연대 회원님이셨거든요. 당시에 권 시장 캠프에서 '배후세력이 누구인지 의심된다'는 내용의 성명을 냈어요. 배후세력이요? 물론 있죠. 우리 자녀들이 배후세력이에요." 전 회장은 대구에서 진행되는 농성에 다른 지역 장애인 부모들도 관심이 깊다고 덧붙였다. "발달장애인 지원 체계는 전국 어디도 충분한 곳이 없어요. 대구에서 좋은 선례가 마련되면, 그게 또 다른 지역에서도 마련되는 근거가 되지 않겠습니까? 권 시장님이 서울시 정무부시장(2006.07~2007.12)이었을 때, 별명이 '장애인 부시장'이었다고 자랑스러워하시더라고요. 장애인 정책에 관심이 많고 일도 많이 했다고요. 대구에서도 남은 임기까지 ‘장애인 시장’으로 남아주시면 좋겠네요."
박명애 대표에게도 농성장을 이어가게 만드는 '배후세력'이 있다. "방 안에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더운 날인데도 웃으면서 즐겁게 1인시위 하는 회원님들 보면, 이 농성을 꼭 잘 마무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살아온 과거에 대한 한(恨) 때문에라도 지지 않고 농성을 하고 싶어요. 나 다음에 이 땅을 사는 장애인들은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사회에서 살았으면 좋겠거든요, 정말. 여러모로 올해 대구의 제대로 된 여름을 보고 있네요."
뜨거운 아스팔트 위, 대구시청 건물을 바라보며 농성장이 서있다. 이곳은 지친 서로를 보듬는 쉼터이다. 또한, 가능한 한 많은 사람에게 목소리 낼 수 있는 거리 위로 자신들의 몸을 모아낸 이들의 전장이기도 하다. 바로 그곳에 대구시청의 무심함이 폭염처럼 쏟아진다. 대구 지역 장애인 당사자와 그 가족들은 간절함으로, 연대를 버팀목 삼아 농성장은 2018년의 기록적인 폭염을 돌파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