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추라!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것처럼
2018 대한민국 장애인국제무용제를 가다!
에이블뉴스, 기사작성일 : 2018-08-07 09:20:37
인간의 가장 직설적이고 원초적인 언어는 몸짓이다. 변죽만 울리며 맴돌기만하다 진실에 가 닿지 않는 헛말이 아니라 직선으로 본질을 향해 꽂히는 언어, 태곳적 언어가 있기 이전의 가장 원시적 언어가 바로 몸짓이고 춤이다.
관측 사상 최고의 기온을 연일 경신하던 지난 8월 1일부터 5일까지 대학로 아르코 예술극장에서 기록적 기온보다 더 뜨거운 몸짓의 향연 ‘2018 대한민국
장애인국제무용제’가 펼쳐졌다.
사실 장애와 무용은 일반적으로 자연스럽게 연상되지 않는다. 부자연스러운? 불편한? 움직일 수 없는?... 장애라는 말을 떠올릴 때 대부분은 이런 단어가 먼저 떠올라서 자유로운 몸짓인 무용과는 거리가 먼 말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진 고정관념과 편견의 한계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대한민국
장애인국제무용제’는 우리가 가진, 아니 내가 가진 또 다른 편견의 껍질을 한 꺼풀 벗겨내는 의미로운 행사가 되리라 기대했고 궁금했다.
그래서 공연을 보는 내내 장애인 당사자의 시각이 아니라 최대한 비장애인이 가진 생날 것의 시각으로 보려고 시선조정을 위해 노력했다. 그런 시선으로 바라본 무대들...
우선 나를 가장 매료시켰던 무대는 두 번째 날 두 번째 무대인 네덜란드 팀의
<스테핑 스톤즈>.레도안 에잇 치트와 제로 반 데르 린넨이 함께 펼치는 무대는 보는 내내 감탄해 마지않을 수 없는 훌륭한 무대였다.
한쪽 팔과 다리에 장애가 있는 레도안 에잇 치트의 몸짓은 경이로울 정도였는데 춤출 때의 그 이미지가 영화 ‘더티 댄싱’의 패트릭 스웨이지를 연상시켜서 더 매혹적으로 다가왔다.
<스테핑 스톤즈>는 그들이 14년 넘게 우정을 이어오며 함께 해왔던 춤이라는데 시간만큼 깊어진 그들의 우정이 관객에게도 끈끈하게 전해져 왔고 요즘 말로 브로맨스의 달달함마저 느껴지기도 했다.
굳이 장애와 비장애로 구분되지 않고 함께 하나처럼 어우러져 움직이는 그들의 무대는 그 자체로 너무나도 충만했다.
그 충만함은 어디서 오는 걸까? 바로 장애를 결핍이나 약점으로 여기지 않는 그 인식의 충만함에서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무대 위에서 그들의 장애는 다양한 몸의 일부로서 단 한 올도 가려지지 않은 채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누군가의 무대는 한쪽 팔이 팔꿈치 위까지 ‘없는 것’이 아니라 팔꿈치 위만 ‘있는’ 팔로 떳떳하게 드러났고 근육이 소실돼 가는 가냘픈 몸은 최소한의 속옷만 걸친 채 무대를 풍성하게 채웠으며 누군가의 흔들리는 걸음걸이는 오히려 종을 들고 걸으며 한껏 흔들림을 부각해서 불완전한 몸짓이 아니라 종소리가 되는 아름다운 흔들림이 되었다.
그리고 또 누군가의 휠체어는 무용수를 완성하는 또 다른 몸이 됐으며 누군가의 클러치는 무대 위에서 무용수와 함께 살아났다. 저마다 세상에서는 불완전한, 불편한 장애라 불리는 것들이 무대 위에서 작은 새가 되고 불꽃이 되고... 또 무엇이 되었다.
무언가로 덮거나 가리지 않고 그대로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그들의 장애 있는 몸을 보며 나는 문득 학창시절 누군가가 내게 준 작은 충격을 기억해냈다. 나른한 오후 수업이 끝나고 졸음에 겨운 눈을 한껏 잡아 올리던 순간, 내 눈을 화들짝 뜨게 한 장면이 있었다.
교탁 앞에서 어느 반에서 왔을지 모를 아주 낯선 아이가 팔을 한껏 치켜들며 넓이뛰기를 하고 있었는데 그 치켜든 팔에 마치 누군가가 지우개로 지운 것처럼 손목 아랫부분이 없었다.
다섯 개의 손가락과 여린 손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늘 봐오던 일상의 그런 손이 아니라 지운 듯 없는 손... 그 낯섦에 졸음이 와락 달아나 버렸는데 그 아이는 마치 그게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거리낌 없이 드러내 놓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나는 그때 그 충격적이고도 낯선 아름다움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아무것도 거칠 것 없이 당당했던 그 애의 손이 어떤 결핍이나 부재가 아니라 완벽함으로 느껴지던 묘한 순간이었다.
결핍이나 부재가 아닌 또 다른 모습의 완벽함... 무대 위에서 보여준 장애인 무용수들의 몸짓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거리를 걷다가 쇼 윈도우에 비친 자신의 저는 걸음걸이를 보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던 누군가의 이야기를 기억한다. 사회가 규정한 정상성의 개념으로 보면 그럴 수 있다.
아마도 무대 위에서 거리낌 없이 자신의 몸을 드러내기까지 장애인 무용수들이 그런 과정을 거쳐 오지 않았을까. 나를 온전히 드러낸다는 것은 굉장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그런 용기는 자기 자신을 완전히 있는 그대로 직면하지 않고서는 가질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회가 규정해 놓은 인식의 틀에 갇히지 않고 수없이 나를 깨뜨리고 깨뜨려서 오롯이 자기 자신으로 설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진정한 하나의 세계가 된다. 그들은 그렇게 무대에 올랐을 것이다.
정체성은 밖과 안의 사이, 진실과 외관의 분화 사이 어디에 존재하는가?...
이번 무용제에서 한 작품의 제작 노트에 쓰인 이 질문처럼 무대에 서기 위해 장애인 무용수들은 수많은 내면의 진실과 외관의 분화 사이에서 부딪히고 갈등하며 지금 여기까지 도달했을 것이다. 그 지난한 분투에 박수를...
물론 다른 시각으로 보면 다양한 비판도 존재할 것이다. 실제로 함께 관람했던 이들 중 한 분은 우리나라의 무용수들은 외국 무용수들에 비해 아직도 자기연민이 많이 남아 있는 것 같다는 소감을 말하기도 했는데 나도 그 점에 동의한다.
그리고 지적장애인들의 무대에 대해 권력 관계를 벗어난 자유와 탈억압적 의지가 느껴지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 점도 일부분 동의한다. 그러나 어찌 보면 또 그 지점이 다음을 기대하게 하는 포인트가 되지 않을까. 왜냐하면 아직 우린 어떤 지점을 향해 가는 과정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고작 3회째 아닌가. 네덜란드 팀이 14년이란 긴 시간 동안 서로를 길들이고 작품을 완성해 갔듯이 우리에게도 아직 성장할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지적장애인 무용팀의 공연 중에는 신신애의 노래 ‘세상은 요지경’이 새로운 창법의 라이브로 불려졌는데 듣다가 새삼 어떤 가사가 귀에 콕 박혔다.
“잘난 사람 잘난 대로 살고 못난 사람 못난 대로 산다... 여기도 짜가 저기도 짜가 짜가가 판친다”...
저마다 있는 그대로 완벽하다!
그리고 있는 그대로 완벽하기 위해서는 ‘진짜’ 자기 자신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춤추라,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것처럼...? 그것은 ‘진짜’ 자신을 발견한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완벽한 흥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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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차미경 (myrodem100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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