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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길이 안 떨어져서 머무는 게 가장 어울리는 사람, 박종필

작성자 2018-07-27 최고관리자

조회 477

 

 

 

발길이 안 떨어져서 머무는 게 가장 어울리는 사람, 박종필
박종필 감독 1주기의 의미, 김일란 감독에게 묻다
등록일 [ 2018년07월26일 15시19분 ]

2017년 7월 28일 독립 다큐멘터리 감독 박종필이 49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간경화 진단 받은 지 7년 만이고, 간암 말기 판정을 받은 지 한 달도 채 안 됐다. 그는 자신의 임종을 숨기고 싶어 했다. 소식을 듣고 요양원을 찾아 온 친구에게 제발 다른 사람에게는 알리지 말라고 부탁했다. 그가 죽은 후 이별할 시간을 갖지 못해 안타까운 친구들, 홈리스들, 장애인들, 세월호 유가족들, 현장 활동가들, 동료 다큐멘터리 감독들이 광화문 광장에서 인권 사회장으로 그를 보내주었다.

 
1년이 지나 박종필의 친구들은 ‘지속적인 창작 작업과 연대활동을 위한 쉼이 필요한 또 다른 박종필’을 선정하여 후원하고, 박종필 감독의 다큐멘터리 작업이 지닌 액티비즘적 가치를 찾는 포럼을 준비했다. 박종필 감독의 삶이 사회적으로 비가시화된 존재들을 카메라 앞으로 불러내는 데 바쳐졌다면, 그의 죽음은 카메라 뒤에서 비가시화된 또 다른 박종필들, 독립다큐멘터리 제작자들의 존재와 그들의 작업과 고통을 돌아보게 했다.


박종필 감독처럼 독립다큐멘터리 제작을 개인적 작업이 아니라 집단적 활동으로 가져가고자 ‘연분홍치마’라는 단체를 만들고, 4.16연대 미디어위원회 팀장 역할을 주거니 받거니 했으며, 용산참사를 다룬 다큐멘터리 <두 개의 문>, <공동정범>을 만들었으며, 박종필 감독 사망 하루 전날 위암 수술을 받고 현재 치료 중인 김일란 감독을 만났다. 그에게 박종필 감독을 기억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지 묻고 답을 들었다.

1532586553_95023.jpg 지난해 7월 세상을 떠난 다큐멘터리 감독 박종필의 장례식 현장.

 

박종필 감독은 왜 자신의 마지막 모습을 지인들에게 숨기고 싶어 한 걸까요?


끝까지 박종필스러웠던 것 같아요. 간경화 진단받고 3, 4년 쉬다가 세월호 1주기 지나서부터 4.16연대 미디어 팀에 결합하셨는데요. 다시 활동을 시작하고서 무척 즐겁고 행복해 하셨어요. 그분은 현장에 있는 걸 너무 좋아하세요. 현장에서 고통 받고 소외받고 아픈 사람들과 함께 하고, 자기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사회에 알리는 그 과정이 행복하다고 하셨어요. 임종 직전에 뵈었을 때 저한테 그러셨어요. “행복했다.” 라고요.


제가 7월 27일 수술을 했고, 박종필 감독님이 28일 돌아가셨어요. 그 전 주에 ‘연분홍치마’ 활동가들과 수술 전에 강릉으로 여행가자 해서 갔어요. 그때 박종필 감독님이 속초에서 요양하고 있다는 소식 듣고 잠깐 찾아가 뵈었어요. 그 전까지 전혀 몰랐어요. 알리지 말라고 한 거 맞아요. 특히, 저한테 알리지 말라고 하셨다고. 왜냐하면 제가 세브란스 병원에서 위암 진단 받았는데, 그 즈음 박종필 감독님도 그 병원에서 간암 말기 판정을 받은 거예요.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 저도 위암 판정 받았다는 거 아시니까, 저한테는 알리지 말라고 하신 거죠.


특히 세월호 유가족 분들한테 알려지는 걸 염려하셨어요. 4.16연대 미디어위원회 활동하면서 유작이 된 <잠수사> 촬영, 편집 하고, 마지막까지 목포 신항에서 세월호 선체 조사하는 거 기록촬영하는 데 헌신한 거 세월호 유가족들이 아시거든요. 그러다가 간암에 걸렸다 그러면 유가족 분들이 너무 가슴 아파 할까 봐 그게 걱정돼서 알리지 말라고 하신 거죠. 그런 생각들 하나하나가 박종필 다운 거죠. 그 사람은 그냥 그런 사람이에요. 가뜩이나 힘든 사람들, 자기 때문에 더 힘들고 마음 아파하고, 죄책감 느끼게 하고 싶지 않은 사람.

 

다큐멘터리의 현장, ‘카메라를 허락해준 사람들’의 곁


박종필 감독을 기억하는 사람들 말 중에 가장 가슴에 와 닿는 말이 “가난한 거리에 함께 있어 줘서, 외로운 거리에 함께 있어 줘서 감사했습니다.” 라는 말이었어요. 김일란 감독님도 “영상활동가는 누군가의 곁을 지켜야 한다면 자신의 시간을 다른 이들을 위해 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박종필 감독이 “민중”이라 부르고 때로는 “카메라를 허락해준 사람들”이라고 표현한 사람들의 ‘곁’이라는 영상활동가의 위치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다큐멘터리 감독에 대한 ‘레토릭’이 있어요. “언제, 어디든 누군가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달려간다.”라는. 늘 소외되고 고립된 사람들 곁에 있다는 그 레토릭은 헌신과 희생이 다큐멘터리 감독한테 가장 중요한 미덕이라는 생각을 내포하고 있죠.


박종필 감독님은 특히 그러셨을 것 같아요.


거의 화신이죠.(웃음)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분이죠. 감독님뿐만 아니라 “그건 아니지 않아?” 라고 반발했던 제 자신에게도 그런 생각이 깔려 있죠. 동의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건 이미 다큐멘터리 감독에게 전제된 마인드 같아요. 누군가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달려가야 한다는 것. 그래서 자신의 일상을 선택할 권리가 별로 없어요. 현장에 무슨 일이 생기면 밥 먹다가도 달려가야 하는 거죠. 안 그러면 ‘아, 갔어야 하는데. 갔어야 했는데. 못 갔네.’ 하며 자책하게 돼요.


휴가라도 갈라치면 마침 그때 행사가 잡혀, 그럼 그걸 피해 휴가 일정을 바꾸거나 취소하죠. 저 같은 경우 병원 가려고 하다가도 기자회견이 잡혀, 그러면 당연히 미루게 돼요. 그게 다큐멘터리 감독의 일상이죠. 주위에서 “아니야. 병원 가” 라고 아무리 얘기해도 왠지 죄책감이 드는 거예요. ‘다 놔두고 나 혼자 가도 되나?’ 그게 현장을 지탱해주는 마음결이죠.


언제부턴가 그런 마음이 문제라는 생각을 했어요. 현장을 벗어나는 순간 느껴지는 죄책감, 미안함 때문에 차라리 현장에 있는 게 마음 편한, 그런 게 문제라고. <두 개의 문> 작업하면서 다큐멘터리 감독은 어떤 때는 현장에 있는 것보다 영화를 잘 만드는 게 필요할 때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물론, <두 개의 문>은 현장 투쟁이 끝나고 나서 영화가 시작됐으니까 더 그런 생각을 했을 거예요. 장례 투쟁을 마치고 나서, 이제 영화를 만들어볼까 했기 때문에, 긴급하게 달려가야 하는 상황은 아니었고, 그때 중요한 것은 용산 사태를 어떻게 현안으로 만드는 데 복무할 것인가? 어떤 영화 미학이 그것을 가능케 할까? 그런 고민을 많이 했죠. 그러면서 내 활동의 근거를 숭고한 헌신이나 희생정신에서만 찾지 말자고 생각하게 되었죠. 아픈 후로는 특히.(웃음)


<공동정범>에 대한 인터뷰에서 다큐멘터리가 ‘운동의 공백’을 메꾼다는 얘기를 인상 깊게 들었습니다.


운동은 하나가 아니라 이질적인 고민이 모여서 만드는 거죠. 멀리서 보면 하나처럼 보이지만 안에서 보면 굉장히 다른 관점과 고민이 있어요. 어떤 이는 ‘구호’로 정리된 운동을 한다면 누구는 도저히 ‘구호’로 정리될 수 없는 이슈를 가지고 운동을 하기도 해요. 제가 가깝게 지내며 고민을 나누는 인권 활동가들은 한마디 구호로 정리될 수 없는 뾰족뾰족하고 약간 곁가지 같고, 어떻게 보면 사소하고 혼돈스럽게 보이는 이슈에 주목하면서 그것을 놓치지 않으려고 해요. 그런 사소하고 뾰족뾰족한 문제의식에서 나온 게 <두 개의 문>이거든요. 


<두 개의 문>은 현장에서 인권침해 감시 활동이나 공권력 대응 활동가들의 고민을 드러낸 작품이라고 할 수 있어요. <두 개의 문>을 보고 나서 한 인권활동가 친구가 공권력이 무엇인지 체감할 수 있게 해줘서 고맙다고 얘기해 줬어요. 농성장에서 공권력의 기제가 어떻게 작동하고 그게 왜 문제인지 일반 시민에게 설명하려면 너무 많은 언어가 필요해요. 시민과 경찰의 관계, 경찰에게 요구되는 시민의식을 운동의 언어로 풀기에는 어려움이 많은데, 영화 언어는 훨씬 구체적으로 접근할 수 있죠.

 

1532586797_27962.jpg 언제나 투쟁하는 장애인의 곁에 카메라를 들고 함께 했던 故 박종필 감독.

 

다큐멘터리의 사후성, 남겨진 시간의 현재화


박종필 감독의 <IMF 한국, 그 1년의 기록-실직 노숙자>에 이런 장면이 있어요. ‘두수형’이 고아원에 맡겨둔 두 아이를 만나고 온 뒤 노숙인 시설에 들어가는 장면이에요. “열심히 해서 아이들 찾아올 거야” 결심하고 시설에 들어갔는데 얼마 후 ‘두수형’이 다시 철문 바깥에 쭈그리고 앉아 있어요. 술도 안 마셨는데 술 냄새 난다고 쫓겨났다는 거예요. 홍은전 작가는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그 장면에 대해 이렇게 써요.


“일어설 힘조차 없어 보이는 두수형의 옆모습에 가슴이 저민다. 그런데, 이상하다. 저 장면, 어떻게 찍었을까. 두수형이 철문 너머로 사라진 후에도 박종필은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는 뜻인가. 그리하여 나는 저 모든 현장을 바라보고 있었을 박종필의 얼굴, 그날 밤의 서성임 같은 것을 생각한다.”(홍은전의 [세상 읽기] ‘앎은 앓음이다’, 2017. 8. 14.)


‘두수형’이 시설로 들어가고 남겨진 시간, 거기서 다큐멘터리의 시간성을 묻을 수 있지 않을까요?


홍은전 씨가 말씀 하신 장면. 잘 모르겠지만, 그 주변의 ‘인서트’(삽입할 장면)들을 촬영하느라 머물렀을 수도 있겠죠. 그럴 수도 있지만, 박종필이라는 사람은 인서트를 핑계로 현장에 머물렀을 사람이에요. ‘두수형’을 들여보내고, 마음이 안 좋으니까, 안 좋아서 후딱 가는 게 아니라, 인서트 촬영을 핑계로 거기 더 머물러 있었을 그런 사람이에요. 그러다가 ‘두수형’이라는 분이 쫓겨 나온 것까지 촬영하게 된 것일 수 있지만, 박종필이라는 사람은 발길이 안 떨어져서 머무르는 게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이긴 한 것 같아요. 그게 사실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런 사람이니까.


감독님은 어떠셨을까요?


모르겠어요. ‘이제 집에 가자’ 그랬을라나?(웃음)


<공동정범>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어요. 다른 사람들은 모두 떠나고 남겨진 시간을 다큐멘터리 감독은 붙들고 있다는.


다큐멘터리 감독은 과거를 사는 사람들이에요. 한 영상활동가 종종 한 얘긴데, 소위 큰 판, 큰 운동, 큰 행사가 끝나고 나면 그때부터 다큐멘터리 감독의 일은 시작된다고. 남들은 이제 다른 데로 이행해 갈 때 계속 과거에 머물러서 그것의 의미를 묻는 거죠. ‘연분홍치마’의 일원인 ‘넝쿨’ 감독이 박근혜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의 미디어 팀장이었어요. 퇴진행동은 해소됐지만 기록위원회는 아직 남아 있어요. 지금 촛불집회 다큐멘터리 제작하고 있어요. 촛불집회에 대한 영상이 많이 있지만 국민행동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는 이제 편집 중이죠. 그때 찍은 필름 보면서 그때 왜 그랬지? 왜 사람들이 그렇게 모였지? 그런 물음의 조각을 맞춰가고 있어요. 다른 사람들은 미래로 달려가는데, 다큐멘터리 감독들은 계속 과거에 남아서 과거를 현재로 만들죠. 이 과거가 왜 현재형인지, 어째서 이 과거가 또 다른 미래인지 제시해야 하는 사람들이죠.


지나간 일은 되도록 빨리 잊어버리는 저로서는 가늠하기 힘든 작업이네요. 괴로울 것 같아요.


박종필 감독의 <끝없는 싸움-에바다>(1999)에 대해, 박래군 씨가 제목을 그렇게 지어 가지고 에바다 투쟁이 안 끝난다고 투덜댔다고 하던데.(웃음) 대중들에게 잊혀진, 활동가들도 잊은, 때로는 당사자조차 다른 삶을 살게 되면서 잊게 된 그 시간과 공간을 다큐멘터리 감독 혼자 머물러 있으면서 의미를 찾으려 하죠. 모두가 잊어버려도 이게 남아 있으니까. 다큐멘터리는 본질적으로 사후적이에요.


‘뉴스타파’에서 <공동정범> 공동체 상영했을 때 기자인지, PD인지 어떤 분이 그런 얘기를 했어요. 뉴스로 내보내지 않을 영상만 모아서 만든 것 같다고. 뉴스는 전달할 내용만 보내고 나머진 버리는데, 쓰지 않을 것 같은 컷들만 모아서 그것을 다르게 보게 만든 영화 같다고. 그건 기다림 속에서 나오는 것들인데, 그런 것들을 포착하려면 쉽지 않아요. 현장에 오래 머물러 있어야 하죠. 물리적으로 많은 시간이 필요해요.

 

1532586911_25712.jpg 생전에 박종필 감독의 환하게 웃는 얼굴.
 

다큐멘터리의 진실, 때로는 대면하기 싫은


<공동정범> 보면서 ‘대면하기 싫은 진실’을 보여주는 게 다큐멘터리의 힘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특히, 이충연 씨의 내면과 소위 ‘공동정범’들 간의 갈등 묘사는 어떤 ‘극영화’ 못지않은 드라마적 긴장감을 갖고 있어요.


다큐멘터리가 현실의 운동에 복무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저는 그 복무하는 방식이 미학적이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구호를 외치는 게 아니니까. 구호로서 정리되는 영화라도 미학적으로 의미가 있어야 해요.


영화적으로 의미 있으려면 어떤 보편적인 문제를 제기해야 했어요. 무엇을 말해야 할까? ‘용산참사’를 넘어서 어떤 보편적 물음을 제기해야 할까? 그런 질문 끝에 ‘피해자를 규정하는 방식’에 대해 말하고 싶었어요. 한국에는 수많은 피해자들이 있어요. 용산참사 피해자, 세월호 참사 피해자, 쌍용차 정리해고 피해자, 형제복지원 피해자 등등. 그런데 우리는 진정 피해자를 대면한 적이 있을까? 이충연 위원장이 저에게 던진 질문이에요. 우리가 상상했던 피해자와는 다른 모습을 봤어요. 순박하고, 용감하고, 정의롭고, 그러면서도 따뜻하고, 이타적인, 하지만 저항하고, 차별에 굴복하지 않는 피해자, 희생적이고, 영웅적이고, 숭고한 피해자를 상상하죠.


하지만 이충연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어요. 언론이 이충연 위원장을 그리는 방식, 혹은 연대자들이 이충연 위원장에게 기대하는 모습은 이충연이 감당할 수 있는 모습이 아녜요. 이충연 위원장도 용산참사 피해자가 되기 전에는 평범한 소상인의 삶을 살아온 사람이에요. 그런 사람한테 숭고한 피해자의 인격을 요구하는 것은 또 다른 억압이라고 생각해요. 


다큐멘터리 제작 노동, 카메라의 무게


카메라 많이 무겁죠?


예전에는 더 무거웠어요. 정신적인 무게도 커요. 현장에서 스트레스가 많은 화면들, 가령 경찰들과 대치하거나, 쓰러지고 오열하는 그런 장면을 찍는 날은 더 힘들어요. 누군가의 슬픔을 계속 들여다봐야 하는 거. 힘들어요.


주인공들이 주로 사회적 소수자인데, 평소 자기한테 관심 가져 주는 사람이 없잖아요. 그런데 카메라로 찍고 얘기도 잘 들어주니까, 정서적으로 의존하는 경우가 있어요. 시도 때도 없이 전화하거나, 갑자기 술 먹고 지금 빨리 오라거나. 다큐멘터리 감독들의 감정노동 정말 심해요.


경제적인 부담도 클 텐데.


다큐멘터리 제작하려면 기획에서 편집까지 대략 2년 걸려요. 감독 1인 인건비만도 최저임금 월 150만원 곱하기 24개월, 3600만 원 정도 필요하죠. 감독 혼자는 못해요. 두 명은 있어야 해요. 그럼 7200만 원. 거기다 차비, 진행비까지 더하면 못해도 1억은 있어야 해요. 영화진흥위원회에서 다큐멘터리 제작 지원 한다고 하지만 턱도 없이 모자라요. 그래서 아르바이트를 할 수밖에 없어요. 촬영하다 아르바이트 하고, 아르바이트 하느라 촬영 중단하고, 그렇게 지연되고, 그러다 골병드는 거죠. 월 150만원의 인건비만 나와도 아르바이트 안하고 다큐 제작에 집중할 텐데. 다들 그럴 여건이 못 돼요. 그나마 다른 사람들에 비해 ‘연분홍치마’는 형편이 나은 편이에요. CMS 후원으로 간신히 버티는 중이죠. 

 

1532587152_89809.jpg 김일란 감독.
 


박종필 감독을 기억하면서 ‘지속적인 창작작업과 연대활동을 위한 쉼이 필요한 또 다른 박종필들’ 후원 사업을 마련한 한 것도 그런 취지 같아요. 카메라 뒤에 있는 영상활동가들의 삶과 노동을 돌보자는 뒤늦은 깨달음이랄까. 


그 사업의 취지에 십분 공감해요. 하지만 제목이 마음에 안 들어요. 나는 박종필 감독님처럼 되고 싶지 않은데? 나는 박종필 감독님과 다른데? 현장을 보는 관점도 다르고, 다큐멘터리 미학에 대한 생각도 다른데?


박종필 감독님은 ‘영락없는 사람’이었어요. 정확하고 성실한, ‘깜박 잊어버렸어’라는 말이 있을 수 없는 사람, 제작 단계를 밟을 때 하나도 생략하거나 쉽게 넘어가지 않는 사람이었어요. 가끔 툭탁거릴 때 ‘하여간 촌스럽다’고 놀리면 좋아 하면서 “아 내가 좀 촌스러워” 하시는 분이었어요. 재미있었어요. 그분과 작업하는 거. 하지만 나는 박종필 감독님과 달라요. 


나는 박종필 감독님이 운동에 헌신하다 희생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분의 죽음은 너무 안타깝지만, 나는 박종필 감독님이 저한테 마지막으로 했던 “행복했다”는 말이 진심이라고 생각해요. 그 행복한 시간을 더 오래 갖지 못한 게 안타깝지만, 그 활동 속에서 재미있고, 행복했던 기억을 간직하고 싶어요.


박종필 감독은 유작이 된 <잠수사>의 주인공 김관홍 잠수사와 무척 친했어요. 김관홍 잠수사가 죽기 전 날에도 함께 술을 마셨다고 했어요. 김관홍 잠수사의 죽음을 안타깝게 지켜보면서도, 김관홍 잠수사의 은평구 친구들이 유가족을 돌보는 모습을 아름답게 느끼면서 촬영하셨어요. 고통 자체는 안타깝지만 그 고통 속에서 함께한 사람들이 서로 상처를 어루만지며 희망을 찾아 가는 모습을 ‘아름답다’고 느낀 분이었어요. 박종필 감독님을 기억한다는 건 제게 그런 의미에요. 그분의 숭고한 희생이 아니라 그분이 현장에서 찾은 행복과 즐거움과 아름다움을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것.

 

 

 

 

 

 

 

 

 

 

출처 : http://www.beminor.com/detail.php?number=12425&thread=04r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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