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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필 떠난 지 1년… “기억하고 기록하겠습니다”

작성자 2018-07-30 최고관리자

조회 491

 

 

 

박종필 떠난 지 1년… “기억하고 기록하겠습니다”
‘차별에 저항하는 영상활동가’ 고(故) 박종필, 1주기 추모문화제 열려
“오늘도 현장을 둘러봐요, 그가 카메라 들고 우리를 찍고 있지 않을까”
등록일 [ 2018년07월28일 05시49분 ]

1532724258_24507.jpg 고 박종필 감독의 기일을 하루 앞둔 27일 저녁 7시, 서울 종로구 마로니에공원에서 1주기 추모문화제 ‘보고 싶습니다’가 열렸다. 박종필 감독의 영정을 대신해 카메라를 든 그의 초상화가 놓여있다.

“야, 박종필이 좋아하던 막걸리다. 마셔.”

 

해는 스륵 져가는데, 가만히 서 있어도 땀이 났다. 추모제 시작 전, 사람들은 종이컵에 막걸리 한 잔 따라 마시며 수분을 보충했다. 안주는 시원한 묵밥과 김치전이다.

 

“종필형이 막걸리 좋아했지. 술을 아주,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환장했어.”

 

깔깔깔 모여 웃는 사람들 주변으로는 수많은 현수막이 편지처럼 나부꼈다. 현수막엔 그를 기억하는 이들의 스스로에 대한 다짐의 말들이 쓰여 있었다.

 

“당신이 기록한 역사, 끝까지 이어가겠습니다” _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건강하고 단단한 홈리스 운동을 일구겠습니다” _홈리스행동
“세월호 참사의 책임자 처벌, 꼭 이뤄내겠습니다” _4월16일의 약속 국민연대
“촬영을 허락해 준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말씀, 기억하겠습니다” _비마이너

 

18개 현수막의 주인은 대개 장애운동, 홈리스운동, 세월호 관련 단체들이다. 이는 그의 삶의 궤적과 일치한다. 홈리스·빈곤 현장, 장애운동 현장을 기록하고, ‘4·16가족선체기록단’이라고 적힌 노란 잠바를 입고서 목포신항에서 세월호 선체 기록을 했던 사람. 20여 년 가까이 영상활동가로 현장을 지켜온 고인은 지난해 49세의 젊은 나이에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가난하고 외롭고 세상 바깥으로 밀려난 이들의 곁을 고집스레 지켰던 그에게 사람들은 ‘차별에 저항하는 영상활동가’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고 박종필 감독의 기일을 하루 앞둔 27일 저녁 7시, 서울 종로구 마로니에공원에서 1주기 추모문화제 ‘보고 싶습니다’가 열렸다. 이날 추모문화제엔 백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석했다. 이 공간에 그가 좋아하는 막걸리와, 그가 막걸리를 마실 때면 즐겨 들었다는 노래와, 그의 운동의 무기였던 영상과,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함께했다.

 

1532724297_44361.jpg 이날 추모문화제에 참석한 사람들은 고 박종필 감독이 즐겨 마시던 막걸리를 나눠 마시며 고인을 추모했다.
 

- “박종필추모사업회 통해 그가 남긴 숙제 풀어가고자”

 

박래군 박종필추모사업회(준)(아래 박종필추사) 공동대표는 고인의 마지막 모습을 그리며 박종필추사를 만들게 된 이유를 설명했다.

 

“박종필이 사망하기 열흘 전쯤에 소식 듣고 찾아갔어요. 한 달 만에 사람이 이렇게 변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간암으로 바싹 마르고 샛노랗던 얼굴이 기억납니다. 그는 자기 병이 세월호 때문에 그런 건 아니라고, 세월호 가족들이 오해하지 말았으면 한다고, 오히려 미안하다고 했어요. 전 박종필 감독이 영상 활동 시작하던 때부터 봐왔어요. 우리 사회 정말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을 애써 찾던 사람입니다. 박종필을 잊지 말고, 그가 꿈꾸던 세상을 위해 애쓰자고 추모사업회 만들었어요. 왕성한 활동 할 수 있도록 응원해주세요.”

 

1532724321_75758.jpg 박경석 박종필추모사업회(준) 공동대표
 

박종필추사의 공동대표이자 그의 오랜 동지로 함께해 온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도 고인의 1주기를 기렸다.

 

“아마 박종필의 카메라에 저보다 많이 나온 사람은 없을 겁니다.(웃음) 그는 장애운동이, 제가, 시설에 있던 장애인이 투명인간이 되지 않게 해주었습니다. 그 소중한 동지가 1년 전에 죽었어요.”

 

희미하게 웃는 눈가엔 눈물이 어렸다. 고 박종필 감독은 세월호 작업을 끝내면 박경석 대표를 주인공으로 한 ‘인물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고 싶다고 말하곤 했다. 다큐인 사무실엔 지난 20여 년간 장애운동 현장에서 고인이 박경석 대표를 담아온 필름이 쌓여있다.

 

박 대표는 추모문화제 전에 열린 1주기 추모 포럼 ‘박종필의 카메라, 이것이 액티비즘이다’를 언급하며 “차별받지 않기 위해 저항해야 하는 이 구체적 현실을 어떻게 바꿀 것인지, 포럼을 통해 배웠다. 지속가능한 활동가의 삶을 만들어야 하는데 제가 그러지 못했다. 지속가능한 활동에 대해 여기 계신 분들과 고민하며 추모사업회를 이어가고자 한다”고 말했다.

 

조한진희 박종필추사 집행위원장은 추모사업회의 목표를 보다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조한 집행위원장은 “박종필이란 존재가 어떤 활동을 했는지 기록하고 기억하는 것도 중요하나, 지금도 함께하고 있다면 그가 어떤 것을 고민했는지 생각하면서 그가 남긴 숙제를 생산하고 나누고 풀어가는 과정의 징검다리가 되고자 한다”고 했다. 현재 추모사업회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416연대, 홈리스행동, 한국독립영화협회 등 4개의 단체가 공동대표단체로 있으며, 20여 개의 단체가 단체회원으로 함께하고 있다.

 

고인의 형 박종섭 씨는 “종필이의 활동을 이어가는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하고 죄송하다”면서 “앞으로 많은 박종필들의 활동이, 종필이의 열망이 전파되었으면 한다”고 인사를 전했다.

 

- “오늘도 현장을 둘러봐요, 그가 카메라 들고 우리를 찍고 있지 않을까”

 

1532724413_11599.jpg 고영재 한국독립영화협회 대표
 

살아생전 그와 연을 맺었던 이들은 그가 자신에게 남긴 과제를 이야기했다. 고영재 한국독립영화협회 대표는 독립영화인으로서 그의 유지(遺志)를 이어갈 것을 다짐했다.

 

“한 해 대한민국 영화관람객이 2억 1천 명, 한 달에 4.5회의 영화를 본다고 합니다. 그런데 단 한 편의 영화도 영화관에서 개봉하지 못한 박종필이라는 영화감독을 추모하기 위해 오늘 우리는 모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영상활동가로 불리길 원했습니다. 장편영화만 10편 이상을 만든 이 박종필은, 개봉을 목표로 하지 않고 투쟁 현장에서 상영되길 바랐던 거 같습니다. 그는 장애인과 빈민 스스로가 카메라를 들고 자신의 이야길 할 수 있는 미디어 교육에도 힘을 기울였습니다. 전 이 사회에서 수많은 소수자 투쟁의 이야기가 의무적으로 공중파에서 방영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겠습니다. 그것이 박종필의 뜻, 추모의 방향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를 긴 시간 동안 알아온 이들에게 그의 부재는 여전히 낯설었다. 2000년대 초반, 장애운동 현장에서부터 그를 마주한 문애린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 활동가가 말했다.

 

“지금도 현장에서 저도 모르게 주위를 둘러보게 됩니다. 종필 형이 카메라 들고 찍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될 것 같아서…. 그러나 아무도 없습니다. 저희는 아직도 투쟁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이동권 투쟁을 하고, 이 무더위 속에서 청와대 앞에서 100일 넘게 농성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이야기가, 우리 삶이 좀더 카메라에 담겼으면 좋겠습니다. 종필 형이 많이 보고 싶습니다. 아마 우리 이야기를 같이 고민하고 싸우고 만들어갔던 동지가 지금은 없기에 더 그립고 보고 싶은 것 같습니다.”

 

오지수 416미디어위원회 활동가 또한 그랬다. 그는 영상 작업을 막 시작한 신진활동가다. 그는 박종필 감독에게 묻고 싶은 것들이 많았다. 그러나 더는 질문할 수 없다는 그의 ‘부재’가 그의 존재했음을 일깨웠다.

 

“20년 동안 현장을 떠나지 않고 활동하며 힘들진 않았는지, 물어보고 싶은 게 너무나 많았어요. 이젠 남아있는 동료들에게 물어보며 채워보려고 해요. 언젠가는 카메라 들고 다시 올 것 같은데… 감독님 보고 싶어요. 목소리 까먹을까 봐 두려워요. 그곳에선 아프지도 외롭지도 말고, 좀더 나은 세상에서 우리 다시 만나요.” 

 

1532724435_71963.jpg 홈리스야학 노래교실 학생들이 노래를 부르고 있다.
1532724461_26995.jpg 문화노동자 연영석 씨의 추모 공연
 

박종필 감독은 홈리스야학 교사로 활동하며, 야학에 찾아온 학생들을 조직하는 홈리스운동 조직가이기도 했다. 매년 명절이면 야학에서 사람들과 함께 전을 부치는 것 또한 그의 몫이었다. 다큐멘터리 감독이고 영상활동가이기 전에 그들과 일상을 함께 누린 ‘친구’였던 것이다. 이날 홈리스야학 노래교실 학생들은 그러한 그를 기억하며 무대에서 노래했다. 416합창단이, 그가 사무실에서 막걸리를 마실 때면 즐겨 들었다던 문화노동자 연영석, 박준의 노래도 무대에 울려 퍼졌다.

 

추모제 사회를 맡은 송윤혁 감독은 이날 박종필 감독에 대해 이렇게 정의했다. “영상을 통해 사회변화에 기여하려 한 사람, 다른 이의 인권을 지키기 위해 행동한 사람, 운동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성장한 사람, 그 사람이 박종필 감독입니다.”

 

이날 영정 사진을 대신해 놓인 초상화에서도 그는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박종필’스러웠다. 가난하고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세월호 유가족들이 그 앞에 국화를 올렸다.

 

1532724507_47763.jpg 추모제 후 헌화하는 사람들.
1532724595_78284.jpg 416합창단이 헌화 후 묵념하며 고인을 애도하고 있다.

 

 

 

 

 

 

 

 

 

 

 

 

출처 : http://www.beminor.com/detail.php?number=12436&thread=04r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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