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삶으로 써내려간 변론이 있다. 장애가 있는 몸, 질병, 가난, 아름답지 않거나 '정상적'이지 않은 외모에 끊임없이 실격 선고를 내리는, 사회라는 법정에 등장한 변론.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사계절 출판사)'을 쓴 김원영 변호사는 성장기 내내 골형성부전증을 가지고 태어난 자신의 몸, 나아가 그의 존재 자체가 무가치하고 열등한 것이 아닌지 끊임없이 자문했음을 고백한다. 그의 고백에서 출발하는 이 변론은, '우리는 존재 자체로 존엄하고 매력적이다'라는 주장을 향해 묵묵히 나아간다.
'실격당한 자'의 경험을 공유하는 이들이 보내온, 김 변호사의 변론에 대한 응답을 세 차례에 걸쳐 싣는다. 각기 다른 세 사람의 글을 통해 이 '변론'이 다양한 방식으로, 그러나 한결같은 위로로 사람들의 삶을 어루만지며 공명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차례
⓵ 잘못된 삶을 위한 완전한 연민과 불완전한 위로 / 변재원
⓶ 실격당한 우리를 위한 초상화 / 박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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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영 변호사의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아래 '변론')은 개별적 존재로 인정받지 못하고 항상 집단을 대표하는 기호로만 소비되는 ‘실격당한 자들’의 복잡다단한 일상을 한 폭의 ‘초상화’처럼 그려낸다. 저자는 시간을 농축시켜 덧칠하듯 한 존재를 표현하는 초상화처럼, 사람도 긴 시간과 다양한 각도를 통해 인식되어야 한다고 말한다(273쪽).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단순한 기호로 환원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이만저만 피곤한 일이 아니다. 드러난 면만 파악하기도 바쁜 세상에서, 고운 붓으로 수십 번 덧칠한 ‘한 길 사람 속’을 읽는 일은 얼마나 지난한 과정인가. 다른 사람은 고사하고 내 속에 숨어있다가 예고도 없이 툭툭 튀어나오는 단층들조차 낯설 때가 많다. 내 안에는 아직도 언어화되기를 기다리며 잠영 중인 수많은 결들이 꿈틀대고 있다. 그런데 김원영은 글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의 초상화를 그려보겠다는 듯, 거의 모든 순간 세밀하게 붓끝을 놀린다. 나 하나만도 다독이며 가기도 벅찬 인생에서 이 무슨 무모한 ‘허세’란 말인가. 하지만 나는 이 ‘허세 가득한’ 분홍색 책의 모든 페이지를 한 땀 한 땀 공들여 읽었다. 그가 그려낸 우리의 초상화와 내 속에서 잠영하던 얼굴들이 만나 새로운 오름들로 융기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내 안에 축적되어있는 단층들은 먼저 수면 위로 올라온 다른 사람의 단층에 의지하여 모습을 드러낸다. ‘장애여성’이라는 단어를 마주치고 장애여성들이 세밀하게 묘사해놓은 삶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장애여성으로서의 내가 비로소 첫 숨결을 내뱉었다. 장애로 인한 신체적 고통을 공개적으로 발설해준 사람들 덕분에, 나의 고통을 직시하고 그로부터 새로운 이야기를 끌어낼 용기를 낼 수 있었다. 김원영의 글 또한 정곡을 찌르며 나의 속 깊은 부분들을 언어화시킨다.
나의 단층과 최초로 만난 '변론'의 언어는 ‘우아함’이었다. 저자는 ‘우아한 품격’을 지키려는 장애인들의 전략을 책 전반에 알알이 박아놓았다. 사실 ‘우아한 장애인’이란 말은 ‘소리 없는 아우성’만큼이나 역설적인 표현이다. 저자는 우아하게 한 손에 커피잔을 들고 1.8초 간격으로 휠체어를 민다. 나는 원피스를 차려입고 의사가 금지령을 내릴 수도 있는 샌들을 신고는, 발목 한두 번 휘어지는 것쯤은 아랑곳 않고 ‘내 나름대로는’ 사뿐사뿐 걷는다. 물론, 다른 사람들도 그 모습을 우아하다고 생각할지는 알 수 없다. 게다가 우리는 언제든 어디엔가 걸려 균형을 잃을 수 있고, 그 순간 우리의 자세는 흐트러지게 마련이다. 하지만 우리가 우아함을 완성하는 순간은 바로 그다음 순간이다.
우리의 품격은 휠체어가 배수로에 걸려 고꾸라질 때 잽싸게 손으로 짚고 올라오며 “방금 각도 좋았음?”이라고 허세를 부릴 때, 보도블록 틈에 걸려 휘청일 때 잽싸게 친구 어깨를 움켜쥐며 “방금 내가 잠 깨워줬지? 졸다 넘어지면 큰일 나!”라고 능청을 떨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 같다. 우리가 부리는 이러한 허세는 우리의 우아함과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사수하는 전략이자, 한순간이라도 ‘장애인’이라는 뻣뻣한 기호에 갇히지 않기 위해 부리는 묘기이다. 우리는 묘기로 생계를 잇는 프로 곡예사라도 되는 듯, 웬만해서는 그 묘기를 생략하거나 포기할 줄 모른다.
저자는 “스타일의 추구는 자신을 ‘무엇이 아님’이라는 결여가 아니라 ‘무엇임’이라고 적극적으로 규정할 수 있을 때 가능하다(124~125쪽)”고 말한다. 내 장애는 사회에서 분리되기엔 너무 경증이었고 무시되기엔 가시적이었다. 그래서 오랜 시간 동안 나의 목표는, 나를 제외하고는 모조리 비장애인으로 구성된 집단에서 최대한 자연스럽게 살아남기였다. 나는 ‘약간의 도움만 제공하면 같이 다니기 그리 나쁘지 않은’ 장애인이 되기 위해, 각 활동에 대한 내 참여 수위와 필요 수위를 조절하는 법을 연마했다. 그러므로 ‘사랑과 정의를 부정하’거나 “그럼 너도 다리 잘라”라고 외칠 배짱 따위가 있을 리 없었다. 내가 무슨 화려한 말로 포장을 하든, 실질적으로 나의 꿈은 ‘장애를 가진 것 빼고는 모든 것이 완벽한’ 장애인과 ‘장애 때문에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 장애인, 양쪽 다가 ‘되지 않는 것’ 정도였다.
실생활에서는 이런 편견과 저런 오해 사이를 요리조리 피해 다니기 바빴지만, 부정형이 아닌 계획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아주 오랫동안, 언젠가는 책을 쓰겠다는 생각을 했다. 희한하게도 이 계획만큼은 어떤 모욕이나 어떤 사고에도 무너지지 않고 살아남았다. (지금도 이 책은 여전히 ‘미래에 나올 책’이다.) 김원영 변호사는 현대 입헌 민주주의 국가들이 명시하는 ‘인간의 존엄’을 자신 인생의 내러티브에 대한 각 개인의 고유한 저작권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해설한다(185~186쪽). 나는 그동안 아직 미출간인 나의 책을 쓰며, 나의 내러티브 즉 나의 인간됨을 지키려 했던 것일까?
각 개인은 개별자로서 집단의 내러티브에 종속되지 않고, 자신만의 내러티브를 구축하고 거기에 따라 살아갈 자유가 있다. 더구나 신체적 혹은 정신적 개별성이 큰 장애인들은 비장애인들보다 독특하고 개별적인 내러티브가 형성될 여지가 아주 많다. 하지만 여태까지 그들의 삶은 몇 개의 고정된 내러티브에 욱여넣어 지곤 했다. 사람들은 자신을 불편하게 하는 몸들을 획일적인 내러티브에라도 가둔 후에야 마음의 평안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하지만 바야흐로 ‘변론의 시대’다. 20여 년 전부터 “우리도 사람이다”를 외치며 다른 사람과 같은 권리를 하나둘씩 주장해나가던 이들은, 언젠가부터 주장을 넘어 진술을 시작했다. ‘변태 아님’을 주장하던 이들은 ‘퀴어 됨’이 무엇인지 시연해 보이고, ‘병_신 아님’을 외치던 이들은 독자적인 ‘장애 정체성’ 담론을 구축했다. 그리고 이제는 그 모든 과정에서 기호 속에 묶여버렸던 자신의 일상을 묘사함으로써, 자신의 개별성과 개별자로서의 자신의 일상을 변론한다.
개별자의 삶을 드러내는 데는 내러티브가 필수적이다. 정적인 상징이나 기호로 그것을 대체하려는 모든 시도는, 개별자의 전인격성을 고사시킬 수밖에 없다. 내가 미래에 쓸 책의 내용은 사실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프다. 문단과 문단 사이에 방향 전환이 많고, 머뭇거리거나 의심하며, 한 문장은 바로 직전의 문장을 금방 부인해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사실 많은 내러티브의 기승전결이 그렇게 이루어진다.
비전문가의 개똥 문학 이론으로 분석해보자면 이렇다. 소설 작품에서 제일 중요한 캐릭터는 일관적이면서도 비일관적이다. 캐릭터가 혼란을 겪을수록, 스토리가 전개됨에 따라 캐릭터도 변화를 보일수록 독자들이 크게 공감할 수 있다. 일관성만 보이는 캐릭터는 문학적 성취로 인정받을 수는 있으나, 독자들의 마음을 얻기는 힘들다. 우리 대부분은 흘러가면서 이리저리 부딪히고 찌그러져 전혀 계획하지 않은 얼굴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소설의 생명은 캐릭터의 일관성이라고 할 때의 그 일관성은 무엇인가? 그것은 결국 작가가 캐릭터를 인간으로 존중하는 일관성 아닐까? 플롯에 따라 자의적으로 캐릭터의 고유한 인간성을 훼손하지 않는 것, 캐릭터의 인간적 흔들림과 모순, 고민과 그 과정의 변화를 존중하는 것. 작가가 캐릭터를 존중할 때 독자들도 그 인물에게 몰입할 수 있다. 캐릭터의 일관된 ‘인간성’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오랫동안 우리 사회에 유통되었던 빈약한 장애인 내러티브들은 일관적이라고도 인간적이라고도 하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도 인간이다’라는 외침은 개별 장애인들의 독특한 내러티브를 가능하게 하는 확고한 기반이다. 우리는 이 명제에 따라 우리의 권리를 ‘발명’하고 ‘창출’해나간다. 책 7부 ‘권리를 발명하다’에서 소개하는 화장실에 갈 권리, 원하는 곳으로 이동할 권리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나치수용소나 남산 고문실 등의 극단적인 인권 유린의 현장에 있어 보지 않았던 비장애인들에게는 너무 당연해서 ‘권리’란 이름조차 얻지 못했던 권리들을 장애인들이 발견하고 발명해나간다.
‘인간다움의 조건’을 충족시키는 데 물리적인 것과 정서적・감정적인 것의 경중을 따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다움의 기본조건’들은 물리적인 동시에 정서적이고 감정적이다. ‘오줌권’이 보장되지 않았을 때, 느껴지는 물리적 고통과 정서적 모멸감을 분리하거나 그 경중을 비교할 수 있을까? 물리적 고통은 모멸감 혹은 수치심으로 이어지며, 그 역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므로 장애인들은 인간이기를 지속하기 위해, 오늘도 새로운 권리를 발견하고 주장한다.
하지만 권리를 발명한다 해도 ‘권리’가 법령집에 묶인 언어가 될 때, 장애인들은 인간의 기본조건에서 여전히 소외된다. 법률로 장애 차별은 금지할 수 있지만, ‘매력 차별’은 결코 금지할 수 없다(249쪽). 법률이 아무리 잘 갖춰져 최대한의 기회의 평등을 실현한다 한들, ‘잘못된 몸’들이 ‘아름다울 기회’까지 나눠가질 수 있을까?
‘아름다울 기회의 평등’에 대해 고민하는 8장 서두에 등장하는 ‘지민’의 이야기는 곧 나의 이야기다. 살아오면서 만난 사람들의 8할 이상은 내게 정중하거나 친절했고, 5~6할 정도는 정치적으로 올발랐다. 나는 욕을 듣지 않아서 욕을 할 수 없었고, 내게 모욕을 준 사람들의 깊은 ‘선의’를 비판하기는 쉽지 않았다. 나는 흔히 ‘기본적인 필요’라 불리는 것보다 많은 지원을 받고 있었고, 내가 품위나 매력의 결핍으로 ‘배부른’ 투정을 한들, 그 결핍을 채워줄 제도가 있을 리도 만무했다. 결국 그건 어떤 방법으로도 사회에 책임을 지울 수 없는 나의 책임 혹은 나의 결핍이었고, 거기에 대해 투정하는 것은 ‘누워서 침 뱉기’하는 꼴밖에 되지 않는 것 같았다. 소독을 마친 병원처럼 깨끗하고 ‘올바른’ 나의 환경에서 나는 행복했고 외로웠다. 혼자 앉아 푸념을 늘어놓다가 만족도 감사도 모른다는 죄책감에 휩싸이는 날들이 많았다. 나의 내러티브는 복잡한 동시에 정적(靜的)이었으므로 언어화되지 못했다.
불리한 판결을 우려해 울며 겨자 먹기로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던, 구제 불능으로 꼬여있는 나의 내러티브에 김원영의 책이 말을 걸어왔다. 그의 글은 허세에 절어 인생의 많은 시간을 퍼포먼스에 소비해버린 것이 나 혼자만은 아니라며, 어깨를 두어 번 툭툭 쳐줬다. 센스 있는 배려보다 껄렁껄렁한 남자의 질 나쁜 추파를 더 기다리던 순간에 대한 수치스러운 기억이 있었다 해도, 내 존재가 실격처리 당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고 내 옆을 스치며 아무도 모르게 귓가에 속삭여주었다.
정말이지 고품격의 감언이설이 아닐 수 없다. 감언이설이 아니라 진실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모욕의 자리에서 분연히 일어나 ‘진리’ 같은 것을 주장하다가도, 이 모든 게 실격당한 나에게 던져진 한낱 연기 같은 감언이설은 아닌지 의심되는 순간을 마주치지 않던가? 정말이지, 진실이면 어떻고 감언이설이면 또 어떤가? 중요한 것은 삶의 어느 고비에서 받은 실격의 표식을 지닌 당신과 나는 그 감언이설과 그 속에 섞인 일말의 진실을 누릴 정도의 가치가 있다는 것, 또 그 모든 감언이설을 실재로 바꾸어내라고 외칠 권리가 있는 ‘존엄’이라는 것 아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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