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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잘못된 삶을 위한 완전한 연민과 불완전한 위로

작성자 2018-07-05 최고관리자

조회 390

 

 

 

[서평]잘못된 삶을 위한 완전한 연민과 불완전한 위로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서평 연재 ⓵
등록일 [ 2018년07월04일 17시54분 ]

여기, 삶으로 써내려간 변론이 있다. 장애가 있는 몸, 질병, 가난, 아름답지 않거나 '정상적'이지 않은 외모에 끊임없이 실격 선고를 내리는, 사회라는 법정에 등장한 변론.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사계절 출판사)'을 쓴 김원영 변호사는 성장기 내내 골형성부전증을 가지고 태어난 자신의 몸, 나아가 그의 존재 자체가 무가치하고 열등한 것이 아닌지 끊임없이 자문했음을 고백한다. 그의 고백에서 출발하는 이 변론은, '우리는 존재 자체로 존엄하고 매력적이다'라는 주장을 향해 묵묵히 나아간다.

 

'실격당한 자'의 경험을 공유하는 이들이 보내온, 김 변호사의 변론에 대한 응답을 세 차례에 걸쳐 싣는다. 각기 다른 세 사람의 글을 통해 이 '변론'이 다양한 방식으로, 그러나 한결같은 위로로 사람들의 삶을 어루만지며 공명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차례

 

⓵ 잘못된 삶을 위한 완전한 연민과 불완전한 위로 / 변재원

 

“만약에 당신이 임신했는데, 우리 아이가 나처럼 척수공동증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떡할 거야?”

 

결혼기념일 2주년을 하루 앞둔 오늘, 나는 갑작스럽게 침대에 누워있는 아내에게 질문했다. 질문을 하기에 앞서, 무슨 이유나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일상적으로 늘 고민해오던 문제를 앞둔 찰나, 또다시 결혼기념일이 돌아왔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우리 부부의 존재를 확인하고자 자연스레 묻게 되었을 뿐이었다.

 

나는 생후 10개월에 발병한 원인불명의 척수공동증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내 병을 거칠고 쉽게 표현하자면, 척수 사이에 큰 홈이 생겼던 것인데, 이 과정 중에 바이러스가 침투했다는 가설도 있고 신경이 눌렸다는 가설도 존재하는 희귀성 질환이다. 나는 척수공동증으로 인해 척추가 휘었고, 왼편 하지가 마비된 지체장애인이 되었다. 우리 가족 중에 나를 제외하고 장애인은 없다. 

 

그러니까 나는 우리 집안에서 1세대 장애인인 셈이다. 발병 후 20년이 지나도록 나의 장애가 세대의 유기적 흐름 속에서 ‘2세대’로 재생될 것인지, 단지 처음이자 마지막 ‘확률적 에러’로써 장애의 계보가 종식되고 말 것인지에 대해 그 어떤 단서도 아직까지 찾지 못했다.

 

아무리 주변에서 나의 장애가 또다시 대를 이어 유전될 가능성은 ‘단 몇 퍼센트’ 정도의 희박한 확률에 수렴한다고 용기와 격려를 건넨들, 그 말이 내게 전혀 위로를 주지는 않는다. 나의 존재는 이미 몇십 혹은 몇백만 분의 일 수준의 ‘확률적인 에러’로서 장애를 안게 되었으며, 내가 장애인으로 존재하고 있는 이상 계량적인 확률상에서의 경우의 수 놀음 따위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지금 나는 그저 내 장애를 1에 수렴하는 필연이었다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지체장애인인 나는 비장애인 여성과 결혼했다. 나의 아내는 우연히도, 어쩌면 다행히도, 출산과 육아에 대한 욕심을 갖고 있지 않았다. 공동체 사회에 대한 부채의식이나 대물림에 대한 기여 의지를 갖고 있기보다는, 차라리 개인으로서 살아가는 방식을 더 지향하는 여성이었다. 나는 결국 앞서 설명한 두 가지 계기, 확률적 에러로써 장애의 선천적 대물림을 걱정하는 어느 만큼의 조바심과 비출산의 가치관을 가진 아내에 대한 존중을 근거로 자발적이고도 비자발적으로 ‘비출산주의자’의 신분으로서 존재하게 되었다.

 

오늘 느닷없이 그녀에게 던진 앞에서의 질문은 내 삶의 지향점과는 다소 무관한 질문이었다. 딱히 고려하고 있지 않은 미래의 자녀에 대한 양육관을 차치하고서,  이 질문을 던진 이유는 순전히 윤리적, 아니 욕망적인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신의 자궁에 잠들 아이가 나와 같은 장애인이라면, 그래도 출산을 하겠냐고.

 

그녀는 내 질문을 듣고서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스스로 눈치를 살피기를, 나에 대한 미안한 눈치를 보느라 쉽게 대답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정말 대답에 있어 신중한 고민을 했었던 것으로 보였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침묵의 상태를 유지하다가 몇 분쯤 지나서 서서히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기 시작했다. 몇 분의 침묵 사이 감정이 북받쳐 오른 것으로 보였다. 이윽고 그녀는 울기 시작했다. 꽤 오랜 침묵 끝에, 상기된 얼굴로 침대에 걸터앉아 그녀는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흐느꼈다. “낳을 거야. 어떡해. 그럼. 내가 어떻게 지우겠어. 네 삶의 증거를. 사랑하는 너를. … 흑흑흑…” 

 

그녀가 울면서, 내 아이를 낳아준다니 기뻤냐고? 아니. 전혀 기쁘지 않았다. 나는 오히려 냉소적으로 그녀의 말을 대꾸했다. “나는 그 아이를 지우라고 너를 설득할 거야. 나는 내 장애가 싫어. 나는 나와 같은 사람을 또 키우고 또 마주할 자신이 없어.” 나는 말을 하는 동안 아무런 표정도 지을 수 없었다. 대답하기 직전에 들이킨 약간의 호흡을 제외하고는, 나에게는 어떠한 망설임도 없었고, 슬픔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아내의 고난도 고뇌도 공감하지 않았다. 단지 내가 하고자 하는 말만 아주 짧게, 그리고 무미건조하게 내뱉었다. 

 

그녀는 나의 대답을 듣고,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크게 울기 시작했다. 엉엉하고 말이다. 우리 부부가 머무는 이 월세 18만 원짜리 주택의 침실 방에서, 밤 11시쯤에, 옆방에 사는 다른 장애인이 들을 수 있을 만큼의 큰 소리로 울었다. 눈앞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통곡을 마주하고 나서야, 배려심이 부족하고 모진 대꾸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에게 다소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냉소적으로 내 진심을 표현한 사실에 대해서는 깊이 후회하지 않았다. 나는 내 자신의 장애가 달갑지 않기 때문이다.

 

1530695912_69158.jpg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김원영 저, 사계절 출판사)' 표지

 

 “나를 태어나게 했으니 그 손해를 배상하시오”. 다운증후군의 자녀를 갖게 된 부모와 그 자녀 스스로가 원고가 되어, 임신 중 다훈증후군 유전자를 면밀하게 관찰하고 진단하지 못해 ‘태어남’을 방치한 의사에게 손해배상을 요구했던 사건이 있다.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에 따르면 이러한 소송을 일컬어 ‘잘못된 삶’ 소송이라고 하는데, 의사가 잘못 판단하여 세상에 ‘낳아진’ 장애인 스스로가 의사에게 책임을 묻는 소송의 경우를 가리킨다. 이처럼 장애아 본인은 ‘잘못된 삶’을 소송하고, 장애인을 낳은 부모는 ‘잘못된 출산’을 소송하는 경우가 슬프게도 존재했다. 자신의 삶을 부정하는 슬픈 소송의 형태이다.

 

우리는 생명이 잉태되는 과정의 미적 숭고함을 신학적으로, 문학적으로 평생에 걸쳐 배우지만, ‘잘못된 삶’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깊게 인식하지 않는다. 초록불의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자동차에 치일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상상하는 정도로, 비장애인 연인 둘이서 사랑을 나누고 출산했을 때 자신의 자녀가 아름답고 당연한 잉태의 신비, 자유의지에 따라 작은 몸이 꼬물거리는 인체의 신비, 를 지녔을 것으로 생각할 뿐이다. 자녀의 21번째 염색체가 남들과는 달라, ’잘못된 삶’의 존재로서 살아갈 것이라고는 거의 상상하지 않는다. 

 

그러나 수많은 ‘잘못된 삶’은 어김없이 탄생한다. 어쩔 수 없게도, 우리 사회의 ‘잘못된 삶’을 지닌 존재들은 확률적 에러로서 반드시 존재한다. 이 글을 쓰는 나도 그렇다. 나도 확률적 에러로서 잘못된 삶을 살고 있다. 나는 비록 출산된 순간과 동시에 선천적인 장애를 갖지는 않았으나, 생후 10개월쯤 지나서 다시 말해 태어나고 머지않아 ‘잘못된 삶’을 분양받았다. 장애를 얻기 이전까지의 유아기 속 온전한 삶의 형태는, 생애의 기억에 남아있지 않다. 나는 죽을 때까지 나의 찬란했던 비장애의 과거를 만지지도, 기억하지도 못할 것이다. 손가락 발가락 각 열 개가 꼬물락거리는 그런 당연한 삶을 말이다.

 

나는 잘못된 삶을 지닌 존재이다. 어느 위로에 힘입어 하루 온종일 ‘그래. 장애는 극복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정체성’이라고 스스로 되뇐들, 나의 불완전한 신체적 삶의 조건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 삶에 대해 지극히 냉소적이다. 장애가 축복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장애로 값진 것을 얻었다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나는 나 자신이 싫고, 부정할 수 있다면, 선택할 수 있다면, 장애를 포기하고 싶고 나의 '잘못된 삶’을 돌이키고 싶다. 때로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말이다.

 

그러던 중 읽게 된 책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은 불가역적이고, 냉소적인, 회의만 남는 내 장애에 대한 무한한 부정을 가로막았다. 노련한 문장 속의 담담한 설득이 내 장애를 향한 극단적인 충동을 방해했다. 이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과 같은 교조적인 과한 희망 속에 포장된 노래 구절과 같은 차원의 설득은 아니었다. 이 책은 ‘잘못된 삶’의 존재를 이유 없는 ‘긍정’으로 결론 내리지 않으면서도, 깊고 예민한 통찰을 통해 ‘잘못된 삶’이 곧 사회에서의 실격은 아니라는 점을 설명한다.

 

 나는 이 책이 싫었다. 중증장애를 가진 저자 김원영이, 심지어 딱히 희망에 가득 찬 충만한 삶을 사는 것 같지도 않은데, 어떻게 자신의 장애를 타인의 문제인 것처럼 거리 두고 사색할 수 있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또 다른 장애인이 실격을 단정하는 것에 대해서 자기 삶처럼 적극적으로 부정하려 하는 것인지, 쉽게 정체성을 파악할 수 없는 김원영의 태도가 다소 얄미웠다. 나는 내 장애에 거리를 두어 분석하고 관찰하지 못한다. 장애로 인해 사는 게 너무 힘들 때면, 차라리 스스로를 재기 불가능한 인생에 놓인 파렴치하고 불쌍한 존재로 남겨두고 만다. 

 

그러나 김원영은 자신의 장애를 냉소로 간단히 종결짓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장애를 거리 두어 관찰하였고, 살아남기 위해, 삶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삶의 가능성을 찾기 위해, 두 가지 주요 장애 정체성을 제시한다. ‘주관적인 미적 정의’로서 노련함과 품격 그리고 ‘객관적인 법적 정의’로서 존엄과 권리를 토대로, 저자 본인을 포함하여 ‘잘못된 삶’을 살아가야 하는 장애인의 실존적 가치를 조망한다.

 

또한 김원영은 노련하고 품격을 갖추어 이 생을 견뎌낸 장애인 동지들의 뜨거운 삶에 대하여 담백하게 서술하였다. 동시에 투쟁을 통해 쟁취한 장애인 ‘이동권’의 헌법적인 가치와 장애 인권의 개념을 뜨겁게 서술했다.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은 책의 시작부터 끝까지 저자의 완전한 ‘장애인’ 정체성과 불완전한 ‘변호사’로서 직업 정체성이 충돌하며 자아내는 문제 제기와 그에 따른 변론의 과정을 끊임없이 스스로 묻고 답하며, 무대 위 고독한 독백을 연기하듯 진행된다.

 

나는 짐작할 수 있다. 치열하고 담담하게 발화된 이 책의 내용에는 장애인 김원영이 지닌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두려움과 이질감을 숨김없이 드러냈다는 사실을 말이다. 저자는 자신의 장애와 고통을 담담하고 호기롭게 거리 두고 관찰할 수 있는 담대한 위인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김원영이 이 책을 무던하게 서술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 또한 장애로 인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 장애로 인한 낙오에 대한 저주를 품은 채로 살아가면서도 삶의 무대, 책의 무대 속 주연으로서 연출하고 있는 생애극의 마지막 막과 장까지 품격을 지키는, 큰 호흡과 발성을 지닌 배우의 역할을 많은 이를 대신해 맡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진솔한 책을 나의 아내에게 권하고 싶다. 나와 닮은 장애아를 갖게 되면 어떡할지 고민하다 울음을 터뜨린 나의 아내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나는 이 책을 나의 새어머니에게 권하고 싶다. 스무 살이 넘어 생긴 장애인 자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어떻게 사랑해야만 상처받지 않는 사랑이 될지 고민하는 그분께 권하고 싶다. 나는 이 책을 나의 동료에게 권하고 싶다. 불가역적인 확률적 에러로서 이번 생의 장애를 연출해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은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권위에 타협하며 문제를 해결하지 않아도, 때로는 하고 싶은 말을 강하게 전달해도 우리의 무대는 흔들리지 않을 것임을 이 책을 통해 얘기해주고 싶다. 

 

나는 이 책을 페미니스트에게 권하고 싶다. 장애 정체성과 집단적 소수자성을 특징으로 이 사회에 요구했던 것, 쟁취할 수 있었던 것, 쟁취하지 못한 것에 대해 선험적인 연구 차원에서 파악하고 여성 인권의 평등이 더 빠르게 더 크게 나아가기를 기원하고자 이 책을 권하고 싶다. 나는 이 책을 비장애인에게 권하고 싶다. 궁극적으로 당신들께 인정받고자 우리가 고민하고 있는 사유의 노력을 보여주고 싶다. 같은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살아가는 우리를 태평양 어느 바다에서 우연히 만나는 ‘흰수염고래’처럼 드물게 생각하지 않아도, 늘 곁에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싶다. ‘잘못된 삶’을 안고 살아가면서, 동시에 사회적 ‘실격’의 낙인을 고민하는 우리의 두려움을 저자의 글을 빌려 이 책을 통하여 고백하고 싶다. 

 

끝으로, 나는 나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장애 정체성에 대한 완전한 연민, 불평등한 삶의 조건에 대한 불완전한 위로로 구성된 그의 담담한 변론을, ’잘못된 삶’을 살아갈 내가 읽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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