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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발로 서서, 제 목소리로,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당당한 시민이 되겠습니다

작성자 2018-06-28 최고관리자

조회 382

 

 

 

제 발로 서서, 제 목소리로,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당당한 시민이 되겠습니다
[전문] 한종선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모임 대표, 제8회 진실의힘 인권상 수상자 연설문
등록일 [ 2018년06월27일 18시23분 ]

1530092027_76346.jpg 한종선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실종자·유가족 모임 대표

 

제8회 진실의힘 인권상을 수상하게 된 저는 부산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실종자, 유가족) 모임의 대표로 활동하고 있는 한종선입니다.


저는 아홉 살이던 1984년 작은 누나와 함께 아버지의 위탁으로 동광파출소를 통해 형제복지원에 들어갔습니다. 국가가 아이들을 맡아주는 것으로만 알고 있던 아버지는 1986년 집에서 순경한테 불려 나왔다가 형제복지원 차량에 실려 강제 수용됐습니다. 지금 아버지와 누나는 정신병원에 입원 중입니다. 형제복지원에 갇혀버린 저희 가족은 매일 매일을 폭력에 굴복하고, 고문과 기합에 복종하며 짐승 같은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흔히 쓰는 말이니 그렇게 말하기는 하지만, 짐승도 그렇게 대우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거기서 나와서는 ‘부랑인’의 낙인이 찍힌 채 사회 밑바닥 인생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런 제가 재단법인 진실의 힘으로부터 인권상을 받다니, 감히 감사의 말조차 드릴 수 없는 영광입니다. 도대체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를 만큼 과분한 상입니다.


진실의 힘은 저희보다 먼저 고통 받으신 어른들이 자신들의 고통과 상처를 밑거름 삼아 만들어낸 재단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다시는 이 땅에 자신들처럼 고문과 국가폭력을 당하는 사람들이 없기를 비는 마음으로 만드신 재단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 자리가 어떠한 자리인지 알고 있는 저로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진실의 힘 인권상을 받아도 되는 것인지 두려움에 떨립니다. 짐작하시겠지만 형제복지원, 마리아 소년의집, 갱생원 등등의 시설을 거쳐 살아온 저는 어떠한 상도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사실 ‘꼴통상’과 ‘청소상’은 받아보았습니다. 하지만 ‘청소상’도 진짜 청소를 잘 해서라기보다, 선생님과 수녀님들의 눈에 말썽장이로만 비친 제가 청소를 도맡아서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형제복지원 출신’ 딱지 붙여 차별하던 사회, 창살 없는 형제복지원


세상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고 하지만, 형제복지원 출신인 저는 시설의 수녀님과 선생님들에게 상종 못할 아이, 무서운 아이, 말 안 듣는 아이로 이미 낙인 찍혀 있었습니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성적이 잘 나오면 컨닝했다는 의심을 샀고, 아니라고 항변하면 매타작을 당하기 일쑤였습니다. 그곳에서 맞는 거는 형제복지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스스로 위로했지만, ‘누가 형제복지원 출신 아니랄까 봐’ 하는 식으로 모든 일을 제 잘못으로만 몰고 가는 데는 정말 화가 났습니다. 저는 억울했고, 아무리 노력해도 어차피 사람들은 제 말을 믿지 않고 존중하지 않을 것이므로 공부해봐야 소용없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사회에 나가 아버지와 누나를 찾는 게 꿈이었습니다. 아버지와 누나가 형제복지원에서 정신이상을 보인 것을 기억했지만, 오랜 시간이 흘렀으니 어디선가 온전한 정신으로 저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수녀님이 저를 갱생원으로 보냈을 때도 그저 감사했고, 그곳에서 용접자격증을 얻어 사회로 나오게 됐습니다.

 

1530092316_19878.jpg 부산 형제복지원 부랑아 단속 차량 운영 모습 (사진출처 : 형제복지원 운영 화보집)


그렇게 원하던 사회로 나왔지만, 저는 ‘사회’라는 곳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런 대책 없이 그냥 던져진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물정도 몰랐고, 돈이라는 것이 뭔지도 몰랐고요. 그저 닥치는 대로 일만 했습니다. 주민등록증이 없어서 사장님 이름으로 적금을 부었습니다. 3년 넘게 일한 다음 아버지와 누나를 찾으러 가겠으니 돈을 돌려 달라 했습니다. 그렇게 잘해주던 사장님이 ‘니 돈이 어딨냐’며, ‘경찰에 신고해서 형제복지원으로 보내기 전에 일이나 하라’며 던져준 10만원 수표 한 장만 들고 도망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회에 나와 열심히 일하면 언제가 아버지와 누나를 찾을 수 있도록 다들 도움을 주겠지 생각했지만 형제복지원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오히려 약점이 잡힌 채 살아야 했습니다.


사회는 가혹한 구타와 기합 없이 저를 안전하게 보호해주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모두가 저를 값싼 노동력으로 이용했고, 합당한 권리를 말하면 이상한 사람으로 몰아가며 따가운 시선으로 손가락질 했습니다. 저는 그들의 일원이 아니었습니다. 거짓말하는 아이, 태생이 불량한 아이였습니다. 그럴수록 저 스스로도 ‘내가 정말 그런 사람인가?’ 의심하게 됐고 제 자존감은 더욱 바닥으로 떨어졌습니다. 형제복지원의 높다란 담을 겨우 넘어, 이제 살게 됐다고 여긴 사회가 사실은 ‘창살 없는 형제복지원’이라는 것을 온 몸으로 느꼈습니다.


당시 IMF가 터져 어디 취직할 곳도 없었습니다. 저를 받아준 건 불량친구들이었습니다. 형제복지원에서 벗어난 지 10년이 넘었음에도 그곳에서 당한 기억은 너무도 생생했고 제 몸의 감각 또한 빳빳하게 긴장돼 있었습니다. 기억하기도 싫은 그 기억들, 잠시라도 안 보이고 안 들리기를 원했습니다. 각종 중독에 빠져 살았습니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 순간 잠시 취했을 뿐, 깨고 나면 더 깊은 죄책감과 두려움에 몸서리치며 하루하루를 견뎌야 했습니다.

 
누구도 제 이야기를 들어주거나 이해해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저를 찾지 않았고, 손을 내미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아버지와 누나도 이 세상에 없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를 찾지 않을 리 없을 테니까요. 세월이 더 흐르고 나서야 아버지와 누나가 저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정신병원이라는 곳에서 말이죠. 하지만 아버지와 누나의 기억 속에 저는 아들도 아니고 동생도 아닙니다. 자신들을 감시하러 온 사람일 뿐입니다. 자신들의 아들과 동생은 아홉 살의 코흘리개일 뿐인데, 지금의 저는 40대 중년이기 때문입니다.


“자네는 지금까지 꿈만 꿨기 때문에 나에게 인질이 되었던 거다.”


2007년 정신병원에서 아버지와 누나를 찾은 후 형제복지원 사건을 어떻게 알릴까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 가족을 찾았을 때는 뭐 이런 세상이 다 있어? 하며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습니다. 그 원망은 아버지에게 향했습니다. 저와 누나를 파출소에 맡긴 형편없는 아버지가 원망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세 아이를 홀로 키우던 젊은 아버지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국가가 관리하며 아이들을 잘 키워주는 좋은 곳이 있다고 종용했다면, 저 역시 그런 선택을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했습니다. 그 뒤로 품고 다니던 칼을 버렸습니다. 문제는 아버지가 아니었습니다. 아버지가 신뢰한 형제복지원이, 그들에게 천문학적인 돈을 지원하며 폭력을 방조한 국가가 문제였습니다. 부랑인 수용소에 버려진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어떻게 죽었는지 단 한 번도 관심을 두지 않은 정부가 문제였습니다.


저는 언제가 누군가가 형제복지원 사건을 해결해주겠지 하며 살았습니다. 사람들은 형제복지원 사건이 박인근 원장의 구속과 복지원 폐쇄로 해결된 것으로 생각했을지 몰라도, 제게 형제복지원 사건의 해결이란 아버지와 누나 그리고 제가 함께 살게 되는 것,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사람들의 손가락질과 멸시 속에 근근이 살아있을 뿐이었고 빼앗긴 가족을 어떻게 찾아야 할지 몰랐습니다. 누나와 아버지를 찾으면서 비로소 저는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됐고 누가 대신 해결해주기를 기다리고만 있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제일 먼저 술을 끊었습니다. 제정신으로 싸워도 내 이야기를 들어줄까 말까인데, 술 취한 사람의 이야기를 누가 들어주겠나 싶었습니다. 진상규명이 이루어질 때까지 절대 술을 입에 대지 않겠다고 각오했습니다. 그렇게 술을 입에 대지 않은 세월이 어느덧 10년이 넘었습니다. (그럼에도 너무 힘이 들고 지칠 때면 가끔 술이 땡기기도 합니다.) 두 번째는 돈이었습니다. 기초생활수급자인 저는 나라에서 주는 얼마간의 돈 외엔 돈을 멀리했습니다. 꼭 필요하지만 저를 해칠 수 있는 것 또한 돈이라는 것을 이 사회에서 경험으로 배웠습니다. 또 하나, 배우지 못한 제가 사람들에게 말을 잘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고민했습니다. 세상은 제게 말할 기회도 주지 않았고, 들어주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사건 자체를 믿어 주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됐습니다. ‘내가 당신들 수준에 들지 못해 내 이야기가 거짓으로 비쳐진다면, 좋다! 당신들 수준에 내가 들어가겠다’ 생각했습니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 과정까지 검정고시로 졸업했습니다.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는 제게 많은 것을 가르쳐줬습니다. 어떻게 해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 억울한 사람이 어떻게 자신의 의견을 드러낼 수 있는지 작은 실마리를 찾은 것 같았습니다.


저는 30년이 지나서 찾은 가족들이 광우병으로 잘못되지나 않을까 불안했습니다. 병원에 있는 아버지와 누나는 주면 주는 대로 먹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미에서 서울로 올라와 집회에 참석하려 했을 뿐이었는데, 전투경찰에 구타당하고 심지어 벌금 300만원으로 기소까지 되었습니다. 저는 정식재판을 받게 해달라 요구했고, 다행히 1심에서 상고심까지 모두 무죄를 받아냈습니다.


그 사건을 계기로 법에 대해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법적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이 무엇이 있는지도 찾아봤습니다. 1인 시위는 불법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마음을 먹었지만 막상 하려고 보니 막연했습니다. 시민단체들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너무 오래된 사건이어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시효가 지났다’는 답을 들었습니다. 정말 뭘 할 수 있나 전전긍긍 고민만 하다가 시간이 또 흘렀습니다.


2012년 5월 어느 날이었습니다. 집에서 어떤 영화를 보다가 어떤 목표도 스스로 행동하지 않으면 공염불이라는, 너무나도 당연한 진실을 깨달았습니다. 제 마음을 움직인 영화 대사는 이랬습니다. “자네는 지금까지 꿈만 꿨기 때문에 나에게 인질이 되었던 거다.”그 말이 저를 움직였습니다. 저는 형제복지원 사건을 어떻게 알리지? 어떤 방법이 있을까? 세상에 알리면 박인근 원장이 나를 죽이러 오지 않을까? 국가기관이 또 다시 아무도 찾지 못하는 곳에 가둬버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갇혀 있었습니다. 형제복지원 출신 피해생존자들에게 함께 싸워보자고 해볼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그 말이 받아들여질까? 형제복지원에 있을 때 폭력을 휘두르던 조장들을 다시 만나면 어떻게 될까? 하는 불안감으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결코 행동하지 못했던 저를 향해 영화가 말했습니다. “이제 행동할 때!”라고요.


날이 새자마자 문구점에 가서 피켓을 샀습니다. “피해자들을 동물 짐승처럼 만들었으면 다시 사람이 될 수 있게 도와주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직접 글씨를 쓰고 돗자리 하나와 얇은 이불 한 장을 든 채 국회 앞에서 1인 시위를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제 억울함으로 시작했지만, 그 앞에 서있는 다른 시위자들을 만나며, 너무나 많은 해결되지 않은 사건들, 또 지금도 만들어지고 있는 사건들의 수많은 억울한 피해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1530092248_90187.jpg 2015년 12월 7일, 형제복지원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국회 앞 단식 농성에 돌입한 한종선 대표와 최승우 씨.


짐승의 시간을 건너다


앞도 안 보이는 터널을 혼자서 걸어가고 있는 듯한 어느 날이었습니다. 어떤 분이 제가 들고 있는 피켓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더니 여러 가지를 묻고 제 이야기를 처음으로 자세히 들어줬습니다. 그 동안 저는 여러 시민단체에 전화를 걸어 이야기 좀 들어달라고 했지만 이뤄지지 않았고, 저는 내 안의 분노에 휩싸여 그들을 설득하지 못하는 제 자신을 원망했습니다. 그 때 그 분이 제 이야기를 처음으로 들어주었습니다. 그 분은 제게 글을 써보라고 했습니다. 있는 그대로 써보라고, ‘한종선씨의 언어를 찾으라’고 했습니다. ‘한종선의 언어’.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지만 분명한 것은, 절벽에 매달려 있는 저에게 그 분이 동아줄을 내려주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분의 말만 믿고 저는 두 번째 행동을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물이 <살아남은 아이>라는 책입니다. 전규찬 한예종 교수님, 제 은사가 돼주신 분입니다.

 
그 뒤로 많은 분들과 단체들이 저와 우리 피해생존자들을 돕기 시작했습니다.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여준민 활동가를 중심으로 강경선, 박경석, 박김영희, 박래군 대표님, 조영선 변호사님과 27개 단체가 모여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대책위원회’를 꾸렸습니다.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와 실종자·유가족 모임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진선미 의원님은 맨 처음, 선두에 서서 ‘형제복지원 사건 특별법’을 추진하셨습니다. 제 인생에서 처음 일어난 일들이었고, 그때마다 곧 진실이 밝혀질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었습니다. 하지만 진실을 밝히는 일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어제는 될 것 같다가, 오늘은 원점으로 돌아간 듯한 나날이 반복됐습니다. 이리저리 될 듯 말 듯, 떠돌기만 했습니다.


일이 잘 풀리지 않으니,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대책위는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들이 모여 단체를 만들라고 제안했습니다. 저는 반대했습니다. 피해생존자들을 위한 상담창구 역할을 하며 회원들을 이끌어갈 리더가 있어야 하는데 제게는 그런 능력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결국은 모임을 만들고 함께 하게 됐습니다. 처음에는 모두가 동등한 입장에서 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언제부턴가 동등한 입장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고, 피해자는 자기 주장을 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마음 속에서 갈등이 시작됐습니다. ‘형제복지원 사건을 해결해주겠다는 사람들에게 네가 뭔데 네 주장을 내세우는 거냐, 어련히 알아서 해주지 않겠냐’고, 제 안에 있는 또 다른 제가 화를 내기도 했습니다. 대책위 분들도 많이 힘들어했고, 피해생존자들 속에서도 저는 고립됐습니다. 가장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진상규명을 위해 일하면서 알게 된 것은 외부의 공격보다 내부의 분열과 갈등이 더욱 아프고 힘들다는 사실입니다. 일을 그르치지 않기 위해 무수히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만, 서로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서로가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오는 불협화음들은 많은 고통을 수반합니다. 돌이켜 보면 그런 불협화음들이 우리를 더욱 연결되게 만들었다는 느낌도 듭니다. 언젠가는 피해생존자들이 서로를 더욱 이해하고 진상규명 활동에 더 열심히 나서지 않겠는가, ‘우리는 모두 같은 고통을 견뎌낸 사람들’이라는 믿음으로 견뎠습니다.


사회는 저희를 배우지 못하고 불안정한 사람들로 보고, 남의 도움 없이는 아무 것도 못하는 사람들로 대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희도 사회의 일원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을 저희 피해생존자들이라고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것을 확인하고 또 확인시켜주기 위해서라도, 저희는 더욱 민주적인 방법으로 해나가기로 했습니다. 아무리 작은 결정이라도 공식 회의를 거치는 방식으로 지금까지 해쳐오고 있습니다. 처음 피해생존자 모임을 시작할 때에는 자기 주장도 없고, 서로 눈치만 보며 말을 하지도 않았지만 지금은 각자의 생각을 허심탄회하게 말하고 안건을 제시하며 토론을 통해 조율해서 함께 할 수 있는 것들을 결정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기까지 너무나 오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비록 다른 사람들보다 몇 배 더 긴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지만 저희들도 배우며 실천하고 있습니다.

 

1530092908_33585.jpg 2017년 9월 27일 청와대로 향하고 있는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들의 국토대장정 행렬.


지난해 저희는 다 같이 국토대장정이라는 것을 해보았습니다. 22일간 486km를 하루도 쉬지 않고 단 한 명의 낙오자도 없이 완주했습니다. 모두가 완주할 것이라고는 누구도, 저희 자신도 믿지 못했지만 해냈습니다. ‘적폐를 청산하겠다’는 문재인 정부에 국가폭력의 피해자인 저희도 함께 하고자 한 것입니다. 피해자들의 고통을 보듬고 눈물을 닦아주는 것으로 적폐청산을 이뤄달라고 외치며, 부산 형제복지원 터에서 청와대까지 걸었습니다. 22일간의 대장정은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뭉치게 했습니다. 그전까지는 피해자로서 자신의 주장만 내세워 왔다면, 22일의 대장정을 거치며 저희들 스스로의 가치와 힘을 이해하게 됐습니다. 자존감을 확인했습니다. 자신만이 아픈 것이 아님을 깨닫고 주변을 돌아보고 동료의 고통을 품에 안게 되었습니다.


형제복지원, 그 짐승의 시간에서 30년이 넘어서 ‘아, 나도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주체구나’라는 것을 깨닫고, 하고 싶은 것을 찾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최승우 형님은, 220여 일 노숙농성 가운데서도 영어를 배우며 연극배우가 되기 위해 하루하루 열심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피해생존자 박순이 누나는 이제부터라도 공부를 해보겠노라며 초등학교 검정고시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함께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신뢰관계 속에서 피해생존자들은 천천히 자존감을 회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자신의 말을 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피해자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상처 받은 치유자’로


저는 너무나 부족한 것이 많습니다. 나이에 맞지 않게 철없는 행동도 합니다. 때로는 동정을 받고 싶기도 합니다. 그러나 동정 받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동정 받는 데 익숙해지면 영원히 피해자로 살아야 할 것 같아 두렵습니다. 피해자로만 산다는 것은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사람임을 자인하는 것과 같습니다. 피해자로 산다는 것은 정신적으로 영원히 형제복지원에 갇혀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저는 증언자로서 제가 겪고 보고 기억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생존자입니다. 여러분이 저를 생존자로 바라봐 주시기를 바랍니다. 형제복지원, 그 ‘죽음의 수용소’의 진실을 밝힘으로써 저희의 고통을 치유하고 나아가 다시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는 사회를 만드는 데 참여하고 싶습니다. 나와 다른 사람들, 생긴 것, 행동하는 것, 가진 것과 배운 것이 없고 부족한 사람들이 차별하고 배제하고 처분해버려도 좋은 대상이 아니라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나와 같은 구성원임을 인정하는 사회를 만들고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희들의 노력을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저희들의 고통과 상처가 박물관에 걸려 있는 박제된 유물이 아니라 지금 현재 살아가는 우리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 앞으로 살아갈 사람들 누구도 차별 받지 않고 배제되지 않고 물건처럼 처분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저희들뿐만 아니라 여러분과 우리 모두를 위해서 형제복지원을 비롯한 강제수용소에서 저질러진 인권유린의 진상을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그 진실을 통해 우리 사회와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고 새롭게 거듭나기 위해 저희들의 증언을 듣고 기록하고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에만 저희도 트라우마에서 벗어나 온전한 생존자, 그리고 ‘상처받은 치유자’로 거듭나 이 사회의 구성원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저와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들은 살아있는 내내 소리쳐 외칠 것입니다. 온전한 사람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작은 누나를 위해서라도 소리쳐 외칠 것입니다. 형제복지원의 강제노역과 폭력에서 살아남은 피해생존자들과 수많은 죽음들의 원한을 조금이라도 풀기 위해 외칠 것입니다.


반드시 기억되어야 할 강제수용소의 역사를 전해줄 피해생존자가 더 이상 허무하게 죽어 나가는 일이 없도록 함께 해주십시오! 우리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들은 “살아있는 것 자체가 진실을 밝히는 활동이다”라는 기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몸이 불편하고 트라우마가 심해 아무것도 못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 그 고통에 무릎 꿇고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계속 외칠 것입니다. 형제복지원에서 저질러진 인권유린의 진실을 밝히라고 말입니다.


존경하는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님, 더불어민주당 원내부대표 진선미 의원님, 그리고 청와대 행전관님들, 이 자리에 와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배운 것도 없고, 말주변도 없는 제가 난생 처음으로 이런 자리에 서서 연설을 하자니 너무나 떨리고 혹시라도 쓸데없는 말로 여러분의 귀한 시간을 빼앗지나 않을까 걱정스러워 조금이라도 빨리 끝내야 할 것 같은 초조감이 듭니다. 2012년 1인시위를 시작한 후 이런저런 자리에서 형제복지원 문제에 관해 말할 기회를 얻었습니다만, 그때마다 제가 들은 것은 짧게 끝내라는 말이었습니다. 


배운 게 없는 제가 중언부언 하다 보면 부족한 시간을 잡아먹을까 저도 염려됩니다. 그래서 저 역시 짧게 끝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9살에 형제복지원에 들어가 끔찍한 폭력을 겪으며 겨우 살아남은 제 이야기, 형제복지원에서 정신이상자가 되어버린 아버지와 누나의 이야기를 어떻게 하면 짧게 끝낼 수 있을까요? 아무리 고민해도 저는 그 방법을 모르겠습니다. 다른 피해생존자들의 처지도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더 떨리기만 합니다.


하지만 진실의힘에서 오늘 이 자리는 저희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들을 위한 자리인 만큼 하고 싶은 말 다 해도 된다고 격려해주셨으니 그 말을 믿고 용기를 내서 몇 가지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1530093101_62151.jpg 2017년 9월 6일 부산 옛 형제복지원 터에서 출발한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국토대장정.


형제복지원, 선감학원 등 강제수용시설 문제를 집중해서 조사할 전문적 기구가 필요합니다


저는 형제복지원 사건과 같은 이른바 시설의 강제수용 문제는 상당 부분 전문가들의 탁상행정에 원인이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 뿐 아닙니다. 문제가 불거지자 느닷없이 형제복지원을 폐쇄하면서 성인 수용자들은 아무 대책 없이 풀어줘 흩어지게 만들고 미성년 수용자들은 전국 각지의 수용소에 뿔뿔이 보내버림으로써 많은 피해자들의 생존 여부와 소재조차 알 수 없게 만들어 버린 것 역시 당사자들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하지도 않은 정책결정자들의 안이한 판단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는 무엇보다도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당사자들이 부딪치고 있는 문제가 무엇이며, 무엇을 원하는지 듣고 그들과 함께 해결책을 모색한다는 자세로 접근하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느덧 30년이 흘렀지만 저희들은 여전히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저희들도 전문가와 정책결정권자들이 알아서 해주기만을 바라며 쳐다보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희들의 요구가 잘못된 것이라면 그 점을 지적해주시고, 불가능한 것이라면 들어주지 않아도 상관 없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먼저 저희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시기 바랍니다. 잘못된 것이 있다면 왜 잘못되었는지, 안 되는 것은 왜 안 되는지,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희들이 알고 싶은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를 왜 잡아 가두었는가 입니다. 우리가 그곳에 갇혀 짐승은커녕 벌레만도 못한 대우를 받은 이유가 무엇인지도 알고 싶습니다. 우리 동료들이 그렇게 죽어야 했던 이유가 무엇인지, 그 긴 시간 동안 정부와 형제복지원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 하겠습니다. 또 한 가지, 저희들이 지금까지 이렇게 사회 밑바닥에서 고통스럽게 살아야 하는 이유도 알고 싶습니다. 그것이 저희가 원하는 진상규명입니다.


2012년 국회 앞에서 1인 시위를 시작한 이래 저는 참으로 많은 아픔들을 보았습니다. 결코 개인의 잘못 때문이라고만은 할 수 없는 고통에 빠진 분들과 함께 하면서 아픔을 나누고 서로의 일이 해결되길 진심으로 바라게 되었습니다. 저희들의 문제가 그 분들의 문제와 전혀 달라 보이기도 하지만 더 깊은 곳에서는 다 연결되어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저희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 그분들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는 길은 없을까 생각하게 됐습니다. 


과거사법의 제정을 위해 저희가 함께 싸우고 농성을 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 입니다. 과거사법은 꼭 필요한 법입니다. 대한민국이 평화로운 나라, 문자 그대로 국민이 주인으로 귀하게 대접받는 나라가 되려면 과거에 국가권력이 힘없는 사람들에게 저지른 범죄를 밝혀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우리는 좋은 나라에 살게 됐으니 미안하지만 너희들의 문제는 참고 잊어달라고 해서는 안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희 형제복지원 사건도 그 와중에서 생겼으므로 과거사법이 통과되면 함께 조사해서 해결하면 된다는 의견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이명박, 박근혜 정권에서는 그것조차 불가능했으니 사실 그렇게만 되더라도 다행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촛불혁명을 거쳐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기도 했지만 시설의 강제수용 문제도 상황이 크게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제가 1인 시위를 시작할 때는 알지도 못했던 선감학원 등 여러 시설의 강제수용 문제가 드러나고 있을 뿐 아니라 지금까지 드러난 것은 어쩌면 빙산의 일각일 수도 있다는 의심이 들 정도입니다.  


공통점이 없지는 않지만, 과거사법으로 처리하기엔 저희 문제가 특수한 점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수많은 과거사 사건을 하나의 기구에서 처리하면서 형제복지원 사건을 비롯한 수용시설의 문제까지 다루자면 시간과 인력도 현저히 부족하게 될 것입니다. 이 문제를 대충 처리해서 마치 사건이 해결되는 듯한 모양만 띠는 것은 되풀이하지 말아야 합니다. 형제복지원은 물론 선감학원을 비롯한 각종 시설의 강제수용과 인권유린에 집중해서 진상을 규명하고 대책을 수립하는 전문적인 기구가 만들어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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