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슈얼리티에 대한 나르키소스적 반체제
푸코가 생명권력(bio-pouvoir)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한 것은 『성의 역사: 앎에의 의지』(1976)이다. 이 책에서 푸코는 성(sexuality)의 억압이 법과 권력의 본질이라고 보는 욕망 이론, 혹은 권력 이론을 비판하면서, 사법 권력과는 다른 종류의 권력, 인간의 생명(life)에 직접 개입하는 생명권력이 근대에 출현하여 현대로 이어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성해방을 부르주아 권력에 대한 저항의 기치로 삼은 68혁명의 젊은 히피들에게 보내는 푸코의 신중한 충고 같은 것이었다. 이 주장에는 권력이 생명의 형식(life style)에 직접 개입한다면 그에 대한 저항 역시 라이프스타일을 둘러싸고 일어날 것이고, 그래야 한다는 함의가 있다. 근대 생명통치 권력이 작동하는 지점인 동시에 그에 대한 반체제, 혹은 대항통치가 발생하는 지점이 어디일까? 바로 ‘섹슈얼리티’의 영역이다.
미셸 푸코, <성의 역사>
생명 통치 권력이 개인의 섹슈얼리티에 개입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시 우리, 통치 받는 자를 양떼로 상상해보자. 통치자, 목자가 아침저녁으로 살피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머리수, ‘인구’(population)이다. 몇 마리가 태어나고 몇 마리가 죽었나? 18세기부터 국가는 영토 내 인구에 대한 통계(statistics)를 내기 시작했다. 부로서의 인구, 노동력으로서의 인구가 정치 경제적(political economy) 문제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인구 관리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짝짓기와 출산이다. 출산율 계산과 관리를 위해 출산은 결혼과 연동되어야 했고, 결혼 관계는 법적으로 등록되어야 했다. 국가는 적절한 결혼 연령, 합법적 출생과 비합법적 출생, 성관계의 조숙함과 빈도, 성관계를 임신 또는 불임으로 이끄는 방법, 독신 생활이나 금욕의 나쁜 효과들, 피임 관행 등을 분석해야 했다. 국가는 시민들의 성과 성생활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알아야 했으며 시민들도 제각기 자신의 성을 이용하는 습관을 통제할 수 있어야 했다. 국가와 개인 사이에서 성은 공공연한 쟁점이 되었으며, 그리하여 담론, 지식, 분석, 명령의 조직망이 성을 둘러쌌다.1) 출산 가능성이 정상적인 성과 비정상적인 성을 나누는 기준이 된 것도 이런 인구정책을 배경으로 해서이다.
신자유주의 안전메커니즘 속에서 출산과 결혼은 개인의 선택 문제가 되었다. 결혼과 출산이 정상적 삶의 구성요소라는 압박에도 불구하고 생명통치의 환경이 나빠지고 개인의 선택 지수가 높아지면서 신자유주의 나르키소스들은 결혼과 출산을 포기하는 쪽으로 선택을 했다. 결혼과 출산의 포기는 신자유주의 안전메커니즘이 야기한 자생적이면서 급진적인 반체제이다. 생명통치권력에 대한 반체제의 주동자인 ‘이갈리아의 딸들’은 오래된 가부장 통치체제에 대한 메디아적 저항으로서 출산 파업을 벌이고 있다.
결혼과 출산뿐 아니라 가부장 통치체제를 지탱해온 성 역할의 분배질서 전면에 걸친 반체제가 발생하고 있다. 실로 2500여 년 이어온 가부장 통치체제의 종언을 알리는 페미니즘 혁명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수천 년 이어온 통치체제인데 어찌 반동이 없을까? 극우 마초와 진보 마초의 연합 전선 속에서 페미니즘 혁명을 진압하라는 반동의 목소리가 시끄럽다. 그러나 그것은 창에 찔려 죽어가는 거친 짐승의 비명소리일 뿐 조만간 역사의 거센 물결에 조용히 쓸려갈 것이다.
그 가부장제 수호의 반동 세력이 동성애 혐오로 결집하는 이유가 뭘까? 2017년 2월 기독교 재단의 한동대가 교내에서 페미니즘 강연을 연 학술 공동체 회원 1명을 무기정학, 3명을 징계 처분했다. 페미니즘 강연 내용 중 성노동과 성소수자에 대한 부분을 문제 삼으면서 “페미니즘을 가면삼아 동성애와 성매매를 합리화 한다.”는 것이 학교 측의 주장이다. 대통령까지 페미니스트라고 자임하는 시대에 페미니즘 강연했다고 학생을 징계 처분한 한동대의 시대착오적 행태에 시민사회단체를 비롯한 비판 여론이 거세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동성애를 빌미로 페미니즘까지 몰아내려는 한동대와 페미니즘을 앞세워 동성애 혐오를 저지하려는 시민사회가 충돌하고 있다는 점이다.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결혼, 출산, 성 관계와 성 역할에 대한 여성들의 자유로운 선택을 불법화하거나 비정상화 할 수는 없다. 결혼하지 않겠다는데, 출산하지 않겠다는데, 성폭행 당하지 않겠다는데, 성추행 당하지 않겠다는데 어쩌겠는가? 더 이상 이런 식의 성적 통치를 받지 않겠다는데 어쩌겠는가? 신자유주의 통치체제에서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에 입각한 여성 나르키소스들의 보이콧과 대항품행(counter-conduct)은 일종의 준법투쟁이다.
하지만 동성애는 다르다. 동성혼 합법화와 동성애자 차별 금지가 세계적인 추세임에도 한국의 군형법은 여전히 동성애 자체를 범죄시 하고 있으며, 동성애를 질병시하거나 비정상으로 보는 사회적 시선도 만만치 않다. 한동대 사태에서 보듯 동성애 혐오는 페미니즘 혁명에 맞서 가부장제 섹슈얼리티 통치체제를 수호하려는 반동 세력의 마지막 보루이다. 그들은 동성애 혐오 전선에서의 승리를 발판으로 페미니즘 혁명을 공격하려고 한다. 이것이 페미니스트 전사들이 동성애 혐오전선에 무관심할 수 없는 이유이고, 또한 동성애자들이 가부장 체제로 포섭될지 페미니즘 혁명에 동참할지 선택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푸코와 동성애
푸코는 동성애자였다. 10대 시절 푸코의 고독하고 공격적인 성향은 청소년기에 폭발한 동성애 성향 때문이다. 비시 정부가 제정한 동성애 처벌법과 사회적 편견 속에서 푸코는 자신의 동성애 성향을 고독과 자책으로 돌돌 말아 타인을 향한 공격성향으로 표출한 것이다. 고등사범 시절 푸코가 보인 광기에서 우리는 자신의 동성애 성향을 받아들일 수 없어 극단적인 행동을 보이는 젊은 게이의 전형을 볼 수 있다. 교실 바닥에 누워 면도칼로 가슴을 그으려는 순간 교사가 보고 제지한 적도 있고, 밤새도록 칼을 들고 한 친구를 쫓아다닌 적도 있었다. 급기야 1948년 그가 자살을 기도했을 때 동급생들은 모두 푸코의 심리상태가 단순히 허약 체질 때문만은 아님을 알았다.
1976년 한 인터뷰에서 푸코는 동성애 성향을 처음 발견했을 때 “세상과 단절하는 일종의 계시 혹은 환희”를 느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기쁨과 함께 자신은 선택받았고, 검은 양이고, 죽는 날까지 그러할 것이라는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고” 한다. 동성애로의 입문에 대해 “스무살 즈음 동성애자인 어른들과 사랑을 나누기 시작했을 때 나보다 열 살, 열다섯 살 혹은 스무 살 더 나이 많은 사람과 사랑을 나눈다는 사실은 벌써 내가 다시 돌아오기 어려운 한걸음을 내디뎠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1978년 한 인터뷰에서 그는 『광기의 역사』의 탄생에 대해 답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 개인사 속에서도 내가 배제되었다는 것, 진정 배척되었다는 것, 사회의 그늘 속에 속하게 되었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것은 나의 성 정체성을 깨달았을 때였다. 성 정체성이 바로 자기 문제일 때 그것은 정말 큰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일종의 정신과적 문제로 변모하는 것이다. 당신이 남들과 같지 않다면 당신은 비정상이라는 의미고, 당신이 비정상이라면 그것은 당신이 환자라는 얘기가 되기 때문이다.2)
『광기의 역사』부터『정신의학의 탄생』,『비정상인들』,『성의 역사』에 이르기까지 푸코의 연구작업은 자신의 동성애에 대한 사법적, 의학적, 사회적 규정의 근거를 해체하는 작업이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68혁명 이후 동성애 합법화 운동이 전투적으로 전개되던 때도 푸코는 소위 ‘커밍아웃’을 하지 않았고, 그 때문에 게이 활동가들의 비난을 받기도 했다. 푸코가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대중들 앞에 ‘고백’하지 않은 까닭은 뭘까? 그것은 비시 정권을 경험한 세대의 ‘정당한 조심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고백’이 갖는 자기 정체성으로의 함몰 효과 때문이다.
1976년 『성의 역사: 앎의 의지』에서 푸코는 ‘고백’의 양식을 통해 성에 대한 진실을 축적해온 근대 성 과학(scientia sexualis)의 역사를 비판한다. 그리고 동성애에 대한 사법적, 도덕적, 의학적 진실의 역사를 상대화하기 위해 고대의 성애 기술(ars erotica)을 탐구하기 시작한다.
또한 그것은 ‘억압 가설’을 근거로 성 해방을 주장하는 게이 운동과는 다른 반체제, 다른 대항통치의 길을 모색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동성애자로서의 정체성을 당당히 밝히는 것은 중요하다. 푸코 정도의 유명세라면 분명 프랑스의 동성애 합법화 운동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동성애 차별법을 폐지하고(1982년), 동성혼 합법화(2013년)를 성취하는 것은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푸코는 동성애 정체성이 법적, 사회적으로 승인받는 것보다 그로 인한 통치성의 변화와 대항통치의 발명을 더 중요하게 보았다. 푸코가 억압 가설을 비판하면서 삶(life)의 통치 맥락에서 성의 역사를 조망한 것에는 동성애자의 시민권을 획득하는 것을 넘어 새로운 방식의 섹슈얼리티 통치, 새로운 쾌락의 통치 기술을 발명하는 것이 게이 운동에서 중요하다는 뜻이 담겨 있다.
지적장애인 시설의 동성애
동성애 문제를 ‘억압’이 아니라 ‘통치’의 관점에서 봐야한다는 푸코의 주장은 어떤 현실과 만날까? 2016년 3월 국가인권위원회가 지적장애인 거주시설 ‘마리스타의 집’에 대해 “시설을 폐쇄하거나 거주인 전원을 다른 시설로 분산 수용할 것”을 권고했다. 이 시설의 거주인들 간에 만성적인 성폭력, 성학대가 이뤄져왔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2012년 처음으로 이 시설의 인권실태를 조사한 마포구청은 “50명의 지적장애 남자로 구성된 거주시설의 특성상 거주자 간의 성추행 부분이 완벽히 해소되기 어려운 점이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대체 이 시설에선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인권위의 조사에 따르면 “상대방의 의사에 반하여 손이나 입으로 자신의 성기를 자극하게 하거나 상대방의 성기를 만지거나 자신의 성기를 상대방의 항문에 삽입하는 등 가해자와 피해자를 구분할 수 있는” 성폭행, 성추행도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런 “행위를 서로 번갈아 가며 가해자와 피해자를 구분하기 어려운” 상호 성행위가 훨씬 더 많았다. 인권위 조사에 따르면 2015년 말 40명의 거주인중 17명이 성적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그 중 가해자이기만 한 경우는 2명, 오로지 피해자인 경우는 5명, 나머지는 시차를 두고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이다. 인권실태 조사에 참여했던 발달장애인 부모회 조사원들에 따르면 거주인들 간의 그런 성행위는 일종의 ‘놀이’ 내지 ‘문화’였다고 한다.
마리스타의 집 거주인 성 관계도. 가해자와 피해자를 구분할 수 있는 경우는 일방향 화살표, 상호 성행위는 양방향 화살표로 표시했다. ⓒ국가인권위원회.
그럼, 마리스타의 집을 폐쇄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가해자와 피해자가 뚜렷이 구분되는 성폭행, 성추행 사건이 분명히 일어났고, 시설은 그것을 방조했다. 그러나 그것이 상호간의 성 행위가 문화나 놀이로 만연한 상황 속에서 일어났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이 둘을 구분하는 것, 즉 강제적인 성폭력과 상호간의 성 행위는 이 경우 구분되어야 할까, 구분할 필요가 없을까?
마리스타의 집은 남자 거주인들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도심과 멀리 떨어진 산 어귀에 있다. 그런 점에서 군부대와 유사하다. 그 점만 보면, 강제적인 성추행과 상호간 성 행위를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한국 사회에서 동성 간 성행위는 자의든 강제든 그 자체로 비정상, 부도덕, 불법으로 간주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군형법 제 92조의 6항은 “항문성교나 그 밖의 추행을 한 사람은 2년 이하의 징역으로 처벌한다.”고 규정하고, 2008년 대법원은 동성애 성행위를 “객관적으로 일반인에게 혐오감을 일으키게 하고 선량한 성적 도덕관념에 반하는 성적 만족 행위”로 판시하고 있다. 실제로 2016년 2월 육군 중앙수사단은 동성애자 군인을 색출하는 수사를 단행하여 총 22명의 군인이 수사를 받았다. 군은 이들이 합의하에 성관계를 했음에도 ‘항문성교나 그 밖의 추행’을 처벌하는 군형법 92조를 적용해 기소했다. 그로 인해 7명의 현역 군인이 군사법원에서 유죄판결(집행유예 4명, 선고유예 3명)을 받았다.
동성 간 성행위 자체를 혐오스러운 성행위로 보는 시선이 공고한 상황에서 시설 “거주인간 성추행, 성폭행이 만연했다”는 것 자체가 “인권 침해” 상황이라 규정지을 때 그런 부도덕한 ‘놀이’를 방조한 부주의함 자체가 시설 폐쇄의 이유라는 논리가 만들어진다. 그 논리는 분명 동성 간 성행위 자체를 혐오스러운 것으로 보는 정상주의(ableism) 논리라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런 비판에 대해 ‘그들은 지적장애인이지 않냐?’ ‘그들의 성행위는 일반적인 동성애가 아니지 않냐?’ 라고 반박할 수 있다. 동성애는 선택이고, 지적장애인은 선택능력이 없다는 또 다른 편견에 입각한 비판이라 아니할 수 없다.
지적장애 여성이 비장애 남성의 위계에 의해 성폭력을 당한 경우 ‘피해’를 밝히기 위해 지적장애를 부각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마리스타의 집 거주 남성들의 상호 간 성행위에서는 지적장애를 근거로 ‘피해자성’을 밝혀야 할 이유가 없다. 마리스타의 집 거주인들은 전반적으로 장애 정도가 낮았다. 2급도 더러 있지만 대부분 3급이다. 조사원들은 “왜 저런 사람이 여기 있을까?” 의아할 정도로 ‘멀쩡한’ 청년들이 많았다고 한다. 조사에 참여한 거주인 중에는 “보육원에 있다가 여기로 올 때 어느 새 장애인 등록이 되어 있었다.”고 한 청년도 있다.
마리스타의 집 거주인들이 동성 간 성행위를 ‘놀이’나 ‘문화’처럼 여기게 된 까닭은 뭘까? 그것은 마리스타의 집이 폐쇄적인 동성 공동체라는 점과 깊이 관계있다. 마리스타의 집이 지적 장애 남성만 받은 이유는 시설 운영 주체의 종교 이념 때문이다. 마리스타의 집은 마리스타 교육수사회에서 운영하는 사목시설이다. 19세기 초 마르첼리노 샴파냐 신부가 창설한 마리스타교육수사회는 ‘마리아의 작은 형제회’라는 이름에 걸맞게 청소년 선교를 위한 수사(Brother) 공동체이다. 청소년, 특히 소외받는 장애 청소년들의 삶을 구원하기 위해 설립된 마리스타의 집에서 장애인 형제들을 돌보는 이들도 마리스타 수사들이다.
이 시설 거주인들은 대부분 아동보호시설에 있다가 10대 초반에 이곳으로 왔다. 새로 입소한 아이들은 곧 20대 형들에 의해 성적 착취를 당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학대는 학습되고, 피해자들의 피해의식은 옅어진다. 시간이 흘러 피해자였던 아이들은 혈기왕성한 청년이 되고, 새로 온 10대의 성을 착취하는 가해자가 된다. 마리스타의 집에서 이런 동성 간 성 착취가 언제부터 누구에 의해(수사에 의해서라는 증언이 있었으나 확인할 수 없었다)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 그것은 카톨릭 교회의 오래된 동성 간 성 착취 사건을 다룬 <스포트라이트>와 동일한 조명(spotlight)을 받아야 한다.
영화 <스포트라이트>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취재 기자의 방문을 받고 자신의 아동 성추행 사실을 변명하는 신부의 인지 부조화 모습이다. 그는 자신의 성추행 사실을 아무렇지 않게 인정하면서 다만 자기는 강간(삽입)하지 않았다고, 왜냐하면 자기는 강간 당해봤기에 그 차이를 안다고 말한다. ‘마리스타의 집’에 사는 지적장애인들도 그랬다. 조사자들에 따르면 2012년 처음 인권실태조사를 할 때 거주인들은 자기가 한 행위를 거리낌 없이 얘기했다. 그게 폐쇄적인 지적장애인 남성 공동체의 오랜 문화였기 때문이다. 마리스타의 집이 폐쇄되어야 할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은 성폭력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에, 인권 침해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 아니다. 그 이유는 지적 장애를 가진 아동, 청소년들이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동성 간 성 착취가 문화로 자리 잡은 폐쇄적인 남성 공동체에 비자의로 편입되었기 때문이다.
인권위의 권고와 장애인 인권단체의 폐쇄 요구가 빗발치자 마리스타교육수도회는 ‘마리스타의 집’ 거주인들을 가족에게 돌려보내거나 다른 시설로 전원 조치했다. 그 중에는 성추행 가해자와 피해자가 같은 시설로 전원 조치된 경우도 있다. 어쨌든 ‘마리스타의 집’ 간판은 내려졌다. 대신 ‘참 좋은 집’이라는 새 간판이 걸렸다. 그리고 거주인 자격을 “1급의 중증장애인으로 뇌병변, 지적장애인(와상)”으로, “지적장애인의 경우 뇌병변 또는 중복장애를 수반”하여 “독립보행이 불가능한 와상 상태”로 제한했다. 왜 그런 조건을 달았을까? “타인에게 위해가 되는 행동이나 전염성 질병이 없어야 함”이라는 조항이 이유를 말해준다. 거주인간 상호 성추행, 성폭행 때문에 시설이 폐쇄됐으니 그런 문제 소지를 아예 없애겠다는 것이다. 꼼짝도 할 수 없는, 누워만 있어서 다른 거주인에게 성적인 행동을 할 수 없는 장애인만 받겠다는 그 저의가 놀랍다. 지적 장애 남성들 간의 성 행위가 문제였으니 장애인들을 아예 탈성화 시키겠다는 것이 아닌가?
'마리스타의 집'이 폐쇄되지 않고 이름과 수용 대상만 바꾼 채 그대로 운영하는 데 대해 장애인단체가 항의 기자회견을 열고 있는 모습.
시설과 위계, 위력에 의한 성폭력
지적 장애 여성의 성폭력 사건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반복된다. 2014년 6월 당시 만 13세 2개월의 지능지수 70 정도인 ‘하은이’(가명)가 가출했다. 가출 후 잘 곳이 없던 하은이는 스마트폰 채팅앱을 통해 “재워주실 분 구한다.”는 채팅방을 만들었고, 방에 들어온 양모(25)씨를 따라 서울 관악구의 한 모텔로 갔다. 양씨는 어두운 방안에서 두려움에 떨던 하은에게 유사성교를 한 뒤 달아났다. 얼마 후 또 다른 20대 남성 김모씨가 같은 방법으로 하은이를 만나 전주의 한 모텔로 데려간 뒤 성관계를 갖고 사라졌다. 버려진 아이는 이때부터 닷새 동안 남자 7명에게 성적 착취를 당했다. 결국 하은이는 인천의 한 공원에서 악취가 진동하고 두 눈이 풀린 상태로 발견됐다. 집으로 돌아온 하은이는 난데없이 사투리를 쓰거나 환청이 들린다고 했고, 흉기로 자해를 시도하기도 했다. 돌아온 지 이틀 만에 하은이는 집 근처 정신병원에 입원했고, 그 정신병원에서 50대 남성 직원에게 또다시 성추행을 당했다.
경찰과 검찰은 하은이를 모텔로 데려간 7명의 남성을 성폭력 혐의나 의제강간 혐의가 아니라 성매매 혐의로 송치하고 기소했다. 형사소송 재판부는 하은이가 ‘스마트폰 앱 채팅방을 직접 개설’하고 ‘숙박이라는 대가’를 받았기 때문에 의사결정 능력을 가진 자발적 성매매로 봐야 한다고 판결했다. 그리고 양씨에게는 벌금 400만원, 김씨는 집행유예 2년형을 선고했다. 하은이 모녀는 서울시복지재단 공익법센터의 도움을 받아 양씨를 상대로 치료비와 정신적 피해보상을 요구했다. 2016년 5월 28일 서울서부지법 민사21단독(신헌석 부장판사)은 해당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기각했다. 재판부는 “하은이가 정신적인 장애로 인해 사물을 변별하거나 의사를 결정할 능력이 미약한 상태에 있다고 인정할 수 없다”고 했다. 이어 “현행 아동·청소년의성보호에관한법률(아청법)에서 대상 청소년은 성매수자에 대한 관계에서 피해자로 평가될 수 없다”며 “자발적으로 성매매를 한 후 성매수자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은 허용될 수 없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하은이 측이 이번에는 김씨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성에서 서울서부지법 민사7단독(하상제 판사)은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하 판사는 판결문에서 “하은이 IQ가 70정도였다는 점 등에 비춰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능력이 부족하다”면서 “더욱이 성적 가치관이 충분히 형성되지 않은 상태”였다고 밝혔다. 2018년 3월 대구지검은 7명 중 한 명이었는데 1차 기소 대상에서 제외되어 잠적했다가 작년 9월 소재가 확인된 남성 A 씨를 또다시 아청법상 성매수 혐의로 기소했다.
하은이 사건에 대한 사법적 판단들 중 유일하게 하은이 모녀의 입장을 대변한 것은 서울서부지법 민사7단독(하상제 판사)의 “하은이가 IQ 70으로,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능력이 부족하다”는 판결이었다. 그 ‘은혜로운’ 판결은 하은이 모녀로 하여금 하은이에게 일어난 끔찍한 사건이 2달만 앞서 일어났더라면, 그래서 하은이를 유린한 7명의 남성이 ‘아청법’ 상 아동청소년 성매수 사건이 아니라 ‘형법’ 제 305조(미성년자에 대한 간음,추행)에 의거 ‘의제강간’ 사건의 피의자로 기소되고, 그래서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제 7조 5항 위계와 위력에 따른 아동 성폭행, 성추행 사건의 처벌규정에 따라 중형에 처해졌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한탄하게 만든다. 겨우 2개월의 차이로 이렇게 다른 판결이 나다니! 시간을 거스를 수 없다면, 하은이의 지능이 조금 더 낮았더라면, 아니, 하은이가 친구를 사귈 수 있게 채팅 앱 깔아주고 사용법 가르쳐 주지만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한탄하게 만든다. 그랬다면, 하은이의 의사결정무능력이 법원에 좀 더 잘 납득되었을 테고, 그랬더라면 그 7명의 남성은 성 매수가 아니라 장애아동에 대한 강제추행으로 엄중하게 형사 처벌을 받았을 테니까.
그 안타까운 가정대로였다면 정말 아무 문제가 없었을까? 그럼, 만 13세 이상 비장애 가출 청소년이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채팅방에 잘 곳을 구한다는 글을 올렸다가가 하은이처럼 성적 착취를 당했다면, 그래서 하은이 사건의 형사재판에서처럼 ‘공적으로 보호받아야할 아동 청소년의 성’을 매수한 피의자들에게 벌금 400만원, 혹은 집행유예, 혹은 기소유예처분이 내려지고 성을 판 청소년에게는 민사상 피해보상은커녕 소년원 입소 처분이 내려졌다면, 그러면 괜찮은 걸까? 그럼, 아무 문제가 없는 걸까?
성폭력 처벌법이 명백히 가해자 편인 것은 성폭력의 강제성을 피해자의 의사결정무능력 입증으로 환원시키는 데서 드러난다. 즉 가해자의 폭행이나 협박에 의해 피해자가 항거불능 상태 내지 자유의지를 발휘할 수 없는 상태였음을 입증해야 강제 성추행, 성폭행으로 인정하겠다는 것이다. 그 결과 만 13세 미만과 장애인의 성적 자기결정은 선험적으로 부정되는 반면에 나머지 피해자의 성적 자기결정권은 다른 결정권과 달리 과대평가된다. 만 13세가 넘은 가출 청소년이 노동 계약을 체결할 권리, 결혼을 결정할 권리, 투표할 권리는 하나도 인정 안하면서 유독 성적 자기결정권은 과대평가하여 폭행이나 협박에 의한 것만 아니면 합의된 성관계로, 잠자리라도 마련해주면 자발적인 성매매로 판결되는 것이다.
이것은 법 권리의 주체를 자유의지의 주체로 보고 자유의지, 자유의사의 억압으로 강제성(폭력)을 정의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권력 효과이다. 이것과 좀 다른 방식으로 강제성을 정의하는 것이 ‘위계 및 위력에 따른 간음’이다.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제10조는 업무, 고용이나 그 밖의 관계로 인하여 자기의 보호, 감독을 받는 사람에 대하여 위계 또는 위력으로 추행한 사람은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여기서 “업무, 고용이나 그 밖의 관계로 인하여 자기의 보호, 감독을 받는 사람에 대하여” 위계(오인, 착각, 부지를 일으켜)나 유형적, 무형적 위력으로 성적 관계를 했을 시 강제 성추행, 강제 성폭행에 준해서 처벌하는 것이다.
이것은 성폭력의 강제성을 행위자 대 행위자, 즉 자유의지를 가진 법 권리 주체들 간의 관계에서 정의하는 게 아니라, “보호와 감독”을 하는 자와 받는 자, 즉 푸코의 언어로 통치하는 자와 통치 받는 자의 관계에서 성폭력을 정의하는 시도로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권력을 사법적 관점이 아니라 통치의 관점에서 보라고 한 푸코의 말은 이럴 때 필요하다. ‘위계와 위력에 의한 간음’ 규정은 통치하는 자가 지적 권력으로, 혹은 지위에 따른 권력으로 피통치자의 성을 착취한 것에 대해 죄를 묻는 것이다. 즉, 이것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사유처럼 통치자가 피통치자와의 ‘안전협정’을 배반하고, 자신의 권력을 사적으로 전용하여 피통치자에게 해악을 입힌 악덕을 처벌하는 법이다.
위계와 위력에 의한 성추행, 성폭행은 그 명칭이 환기하는 바 행위자의 악덕을 부각시킨다. 강제 성추행, 강제 성폭행 등 성폭력을 입증할 때 그 강제성의 수단이 무엇인지, 그것이 얼마나 비열하고 나쁜 것인지 그 악덕을 조명하는 게 법의 정의실현에 부합하는데, 지금까지는 피해자의 자유의지와 자유의사가 어떤 상태였는지, 피해자의 책임성을 조망함으로써 가해자의 편에 서 왔다. ‘위계와 위력에 의한 간음’ 규정은 가해자의 악덕에 초점을 맞춰 성 폭력이 일어나는 권력관계가 무엇이고, 강제성(권력)의 수단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사회가 성찰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위계 및 위력에 의한 간음죄’ 조항 역시 피해자의 심신미약 상태나 항거불능 상태를 기준으로 과소 적용되고 있으며, 형량도 너무 적다. 안희정 사건을 비롯한 최근의 미투 운동이 갖는 의미가 여기에 있다. 그동안 있으나마나 한 ‘위계 및 위력에 의한 간음죄’를 사회적으로 부각시키고 법 권리의 관점을 넘어 통치의 관점에서, 권력관계 속에서 성폭력을 재정의해야 한다. 아울러 성에 대한 자기결정권 역시 성에 대한 자기 통치능력으로 재정의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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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미셀 푸코, 이규현 역, 『성의 역사: 앎의 의지』, 나남, 1996, 45쪽.
2) 디디에 에리봉, 『미셸 푸코, 1926~1984』, 그린비, 2012, 52~53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