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패 <빛, 날개>를 어깨에 걸치고 있는 한종선 대표.
‘엄마야 누나야’. 이 노래는 한종선이 형제복지원에 끌려가기 전 작은 누나가 자장가로 들려주던 노래였다. 87년 형제복지원의 실상이 세상에 처음 알려지고 그가 서울 ‘소년의 집’에 전원조치 된 이후 이 노래를 자주 듣게 되었다. 그 때마다 그는 ‘소년의 집’을 뛰쳐나왔다. 그렇게 매번 뛰쳐나와도 그가 있어야 할 곳, 아버지와 누나의 품을 찾을 수 없었다.
26일 오후 7시, 과거 군부독재의 서슬 퍼런 권력을 상징하던 공간, 안기부장 공관으로 쓰였던 곳인 남산 ‘문학의 집’에서 그는 태어나 처음 상을 받았다. 살면서 상이라고는 ‘꼴통상’, ‘청소상’ 밖에 받아보지 못했다는 그가, 국회의원과 행정안전부 장관을 포함해 130여명의 사람들의 축하를 한 몸에 받으며 제8회 ‘진실의힘 인권상’ 수상자가 되었다. 이 자리에서 축하공연으로 ‘엄마야 누나야’를 듣는 그의 마음은 어땠을까.
비록 아버지와 누나는 형제복지원을 나와서도 여전히 정신병원에 있다며 아쉬움을 떨치지 못했지만, 이 날 만큼은 그 누구보다 환하게 웃었다. 국가폭력이 강요한 ‘복지원 출신’, ‘부랑아’라는 낙인을 떨치고, 2012년 형제복지원 진상규명을 외치며 처음으로 국회 앞 1인시위에 나섰을 때부터 끈질기게 찾고자 했던 그 ‘진실의 힘’으로 우뚝 선 순간이었다.
재단법인 ‘진실의 힘’은 70-80년대 고문으로 간첩 조작된 피해자들과 진실 규명에 함께해 온 인권활동가 등이 만든 재단으로, 2011년부터 유엔 ‘고문생존자 지원의 날’을 기념해 인권상을 수여해 왔다. 1회 수상자는 ‘재일교포학생 학원침투 간첩단 사건’으로 19년간 장기수 생활을 해온 서승 교수, 2회 수상자는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가해진 고문 피해의 상징인 김근태 전 의원 등이다. 그 면면들 모두 민주화운동의 상징적 인물들이고, 시대를 대표하는 지식인들이었다.
수상 소감 연설을 하고 있는 한종선 대표.
그에 비하면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모임 대표 한종선의 이력은 내놓기 민망한 것이었다. 1984년 아버지가 파출소에 자신을 위탁해 형제복지원에 입소했고, 아버지와 누나도 곧 같은 곳에 들어왔다. 그곳에서 그야말로 짐승의 삶을 살아온 그는, 형제복지원을 나와서도 밑바닥 인생을 살아왔다. 그러나 한종선은 A4 용지 9장 분량의 긴 수상자 연설문을 담담히 읽어 내려가며, 그 비루한 인생으로부터 시작된, 그러나 도저히 감출 수 없었던 진실을 향한 역사적인 몸부림을 술회했다.
“그저 닥치는 대로 일만 했습니다. 주민등록증이 없어서 사장님 이름으로 적금을 부었습니다. 3년 넘게 일한 다음 아버지와 누나를 찾으러 가겠으니 돈을 돌려 달라 했습니다. 그렇게 잘해주던 사장님이 ‘니 돈이 어딨냐’며, ‘경찰에 신고해서 형제복지원으로 보내기 전에 일이나 하라’며 던져준 10만원 수표 한 장만 들고 도망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 저는 그들의 일원이 아니었습니다. 거짓말하는 아이, 태생이 불량한 아이였습니다. 그럴수록 저 스스로도 ‘내가 정말 그런 사람인가?’ 의심하게 됐고 제 자존감은 더욱 바닥으로 떨어졌습니다. 형제복지원의 높다란 담을 겨우 넘어, 이제 살게 됐다고 여긴 사회가 사실은 ‘창살 없는 형제복지원’이라는 것을 온 몸으로 느꼈습니다.”
한종선은 2007년 정신병원에 있는 아버지와 누나를 찾은 후로 형제복지원 문제를 세상에 알릴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2012년 5월 어느 날, 집에서 본 영화 속 한 대사 “자네는 지금까지 꿈만 꿨기 때문에 나에게 인질이 되었던 거다”라는 말에 이끌려 “이제는 행동할 때”라는 마음을 먹고, 홀로 1인 시위를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전규찬 한예종 교수를 만나 <살아남은 아이>라는 책을 내고, 27개 시민단체가 모여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대책위원회’를 꾸렸다. 이윽고 다른 피해자들을 만나며 ‘형제복지원 피해자와 실종자·유가족 모임’도 만들었다.
국가의 사과와 진상규명에 진척이 이뤄지진 않았지만, 그와 피해생존자들의 노력으로 형제복지원을 이미 30년 전 다 해결된 사건으로 알고 있던 사람들도 다시 관심을 갖고 진상규명에 마음을 보태기 시작했다. 진선미 의원이 19대 국회에 이어 20대 국회에도 ‘형제복지원 특별법’을 발의했고, 지난 지방선거에서 당선된 오거돈 부산시장도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규명을 내걸었다.
‘진실의 힘’은 이와 같은 한종선의 활동을 평가하며 아래와 같이 수상 결정 이유를 밝혔다.
“놀라울 것도 없이, 거악(巨惡)의 은신처는 어둠이 아니라 빛입니다. 떠들썩한 공공복리이며 위단된 선의(善意)입니다. 그리하여 백주(白晝) 대낮에 캄캄한 어둠 속에 갇혀버린 자들이 도처에서 신음하고 죽어가더라도 진실은 쉽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 한종선 씨는 자신이 겪은 야만적 폭력과 고통스런 삶에 굴하지 않고, ‘살아남은 자’로서 진실을 향한 고단한 싸움에 앞장서 왔습니다. 또한 자신을 단지 개인피해자의 영역에 가두지 않고, 또 다른 국가폭력 피해자들을 향해 손 내밀고 함께하는 연대를 통해 활동가이자 치유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말처럼 그의 활동은 ‘피해자’에 머물지 않고 적극적으로 증언하며 스스로의 고통을 치유하는 ‘피해생존자’로서의 활동이었다. 그 과정 속에 지난해 9월, 22일간 486km를 걸으며 진행했던 국토대장정이 있었다. 한종선은 그 때를 떠올리며 “22일간의 대장정은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뭉치게 했습니다. 자신만이 아픈 것이 아님을 깨닫고 주변을 돌아보고 동료의 고통을 품에 안게 되었습니다”라고 전했다.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그리고 국회 앞 1인 시위, 농성을 하면서 만난 인연들과 함께 한 한종선 대표.
그러면서 그는 ‘정신적으로 영원히 형제복지원에 갇혀’있지 않기 위해, “피해자로만 살지 않겠다”고 하는 다짐을 전했다.
“저는 너무나 부족한 것이 많습니다. 나이에 맞지 않게 철없는 행동도 합니다. 때로는 동정을 받고 싶기도 합니다. 그러나 동정 받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동정 받는데 익숙해지면 영원히 피해자로 살아야 할 것 같아 두렵습니다. 피해자로만 산다는 것은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사람임을 자인하는 것과 같습니다. 피해자로 산다는 것은 정신적으로 영원히 형제복지원에 갇혀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저희들의 고통과 상처가 박물관에 걸려 있는 박제된 유물이 아니라 지금 현재 살아가는 우리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 앞으로 살아갈 사람들 누구도 차별 받지 않고 배제되지 않고 물건처럼 처분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저희들뿐만 아니라 여러분과 우리 모두를 위해서 형제복지원을 비롯한 강제수용소에서 저질러진 인권유린의 진상을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그 진실을 통해 우리 사회와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고 새롭게 거듭나기 위해 저희들의 증언을 듣고 기록하고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에만 저희도 트라우마에서 벗어나 온전한 생존자, 그리고 ‘상처받은 치유자’로 거듭나 이 사회의 구성원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시상식에 참석한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은 그의 다짐에 과거사 진상규명을 이행하겠다는 약속으로 화답했다. 김 장관은 “무엇보다 과거사를 국민이 원하는 눈높이에서 정리해야 한다, 그렇게 억지스럽고 말도 되지 않게 짓밟아도 말 한마디 못하는 시절은 이제 끝내야 한다는 (요청이 많았다)”면서 “그 동안 야당이 반대해서 못 했다는 핑계도 댔는데, 이제는 핑계를 못 대겠다. 이 문제도 하나하나 풀어가겠다는 약속을 드린다”고 전했다.
김부겸 행정안정부 장관(왼쪽)과 한종선 대표(오른쪽).
한종선 대표는 이날 상패로 미술가 임민욱 씨가 제작한 <빛, 날개>를 받았다. 이 상패는 불사조의 빛 날개를 형상화 했다. 상패에는 이런 의미가 담겨 있다. “독재자를 위한 미관과 도시의 침묵 가운데 짓밟혀야 했던 그의 날개를 주워 들고 뒤늦게나마 가슴에 품습니다. (...) 이 모진 도시미관 저 비겁한 야경 아래 갇혀 있던 그들이 자유롭게 날아갈 수 있는 힘을 실어 줄 수 있기를 기도하며 불사조의 빛, 날개를 바칩니다.”
26일 현재,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국회 앞 농성이 벌써 232일째다. 오늘도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들의 날개는 도시미관에 짓밟혀 신음하고 있지만, 이날 그들은 다시 날아오를 소중한 날개 하나를 얻었다. 30여년 전 그날처럼 이 도시가 그들의 날개를 짓밟지 않고, 다시 빛을 내려 날아오를 무대가 되어 줄 수 있을까. 이날 시상식에 참여한 모두가 가슴에 품고 돌아간 숙제와도 같은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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