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13일, 박원순 서울시장의 3선이 결정되던 시각, 환호하는 사람들 사이에 다섯 명의 농인 청년이 있었다. 이 청년들은 박 후보의 당선을 함께 기뻐했고, 수어통역사는 당선 소감을 실시간으로 통역했다. 이들은 5월 31일부터 박 후보 캠프에서 '세대공감본부 다양성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해왔다. 박 후보 공약을 수어로 통역해 영상을 만들고, 투표 독려 캠페인 영상도 만들었다. 박 후보 선거캠프에는 매일 수어통역사가 있었고, 캠프 창단식, 각종 지지선언식 등 캠프 내 행사에서 수어통역이 빠지지 않았다. 박 시장의 '얼굴 이름(수어 이름)'을 만들어준 것도 바로 이들이다.
농청년들은 왜 박 후보 선거캠프에 들어왔을까. 이들이 정치에 참여함으로써 바꾸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한국에서 농‘청년’으로 살아가는 것은 어떤 모습일까. 선거캠프에서 활동했던 김하정, 이진경, 정나라, 진생재 씨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박원순 시장과 함께 '사랑해요'라는 뜻의 수어를 하고 있는 진생재, 이진경, 김하정, 김희민 씨(왼쪽 두번째 부터)
박원순 시장 당선 축하드려요. 선거캠프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셨는데, 감회가 남다를 것 같습니다.
김하정(아래 하정): 당연히 될 줄 알았어서(웃음). 애초에 선거캠프 참여한 것도 당선 지원보다는 '여기에 농인이 있다'는 걸 보여주려고 했던 의도가 더 컸어요.
원래부터 박 시장님을 지지했어요. 따릉이도 그렇고, 성 평등 지하철 광고가 부쩍 늘어난 것도 그렇고, 확실히 이전 시장들과는 다르다는 걸 피부로 느끼고 있었어요. 하지만 주변에서 농인이 개인적으로 특정 인물을 지지하는 걸 많이 보지 못해서 저도 마음속으로만 지지하고 있었죠. 그러던 차에 박원순 캠프의 홍서윤 세대공감 본부장님이 '다양성 위원회 위원으로 활동 해 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게 되었어요.
이진경(아래 진경): 저는 하정 언니가 이거 하자고 불러서...아마 오늘 온 사람들 다 그럴걸? (웃음). 농인이 캠프에 들어가면 박 시장님뿐만 아니라 서울시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농인 관련 정책을 고민하게 될 거고, 다른 농인도 '아, 우리도 정치 참여 할 수 있구나'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되겠다 싶어 들어오게 됐어요. 그래서 한다고 했어요.
정나라(아래 나라): 박원순 시장님이 계셨던 지난 6년간, 시민들과 소통하며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이 시정에 적극적으로 반영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예전에 다니던 회사가 정당 공보물이나 현수막 디자인을 많이 했거든요. 그때 한 정당에서 제 이름만 빌려 갔어요. 장애인 조직을 정당 안에 만들었는데 지체장애인 중심이니까, 농인인 제 이름을 '구색 맞추기'로 끼워 넣은 거였어요. 막상 가도 제 목소리를 내기보다 지시받는 느낌이 강했고요. 그런데 박원순 캠프에서는 장애 유무나 유형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의 이야기가 동등하게 받아들여 지더라구요. 그래서 더 열심히 활동했어요.
농인의 정치참여를 어렵게 만드는 것들은 무엇일까요?
진경: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 하나는 농사회가 굉장히 좁기 때문인 것 같아요. 정치관이 다르면 배척당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있다 보니 드러내길 꺼리게 되는 거죠. 이번에도 캠프에 같이 들어가자고 권유했더니 '그런 거 위험하지 않냐'라며 정치색 드러내는 걸 두려워하는 사람이 많더라고요.
진생재(아래 생재): '협회' 차원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정치 활동을 하려고 하면 우선 의사소통부터 막히잖아요. 예를 들어 어느 정당에 입당하더라도 막상 가면 수어통역이 없으니 활동은 못 하고 당적에 이름만 올리고 끝나는 거예요. 정당 활동가지 안 가더라도, 기본적으로 정치 관련 정보 자체가 농인이 접근하기 너무 어려워요. 관심을 가지려야 가질 수가 없는 거죠.
하정: 맞아, 그러고 보니 나 저번에 당내경선에서 투표 못 했어. 투표를 전화로 하라고 문자가 왔더라고요. ‘나 청각장애인이라 전화로 투표 못 한다’고 문의 문자 다시 했는데 답이 안 왔어요. 이게 ‘부정투표’를 막기 위해 목소리 녹음을 해야 해서라던데...이런 제도도 바뀌어야 할 것 같아요.
그렇다면 농인의 정치 참여 확대를 위해 어떤 사회적 환경이 구축되어야 한다고 보시나요?
하정: 제 경우를 보면, 제일 적극적으로 정치 활동을 하는 건 인터넷, SNS상에서예요. 의사소통 구애가 없으니까, 제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하게 되는 거죠. 의사소통이 정치참여의 핵심이자 가장 기본적인 요소일 것 같아요.
나라: 지난 6월 8일, 박원순 시장님이 대학로에서 ‘청년과의 대화’ 행사를 했어요. 그때 제 친구는 대학로 놀러 갔다가 우연히 봤대요. 직접 참여해서 얘기하진 못했는데, 그날 수어통역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내용을 파악할 수 있었고, 재밌었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이런 식으로 농인이 정치에 관심을 가지게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하정: 그날 저 아는 오빠는 대화에 직접 참여했어요. 제가 ‘행사에서 수어통역 제공되니까, 가서 하고 싶은 말 하라’고 하니까 정말 갔더라고요. 그 오빠 성격에 밤새 잠도 못 자고 '무슨 말 하지' 엄청 고민했을 거야 (웃음). 그날 가서 ‘서울시에 운영하는 미술관이나 박물관에서 도슨트(관객에게 전시물을 설명하는 안내인-편집자 주)가 설명을 할 때 수어나 문자 통역을 제공해달라’고 했대요. 박 시장님이 그 자리에서 ‘그 부분은 긴급행정명령으로 빨리 조치하도록 하겠다’고 답변을 했고요. 이렇게 자기 의견이 받아들여 지고 실현되는 경험이 더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난 8일, 대학로에서 한 농청년의 이야기를 수어통역사(맨 왼쪽)를 통해 듣고 있는 박원순 시장.
생재: 저는 선거권 가졌을 때부터 지역 정치에 관심을 가졌지만, 통역이 없어 소외될까 봐 선뜻 참여하지를 못했어요. 의사소통을 위한 환경이 잘 구축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진경: 맞아요. 그냥 입 다물고 듣고만 오는 건 의미 없잖아요. 내 의사를 말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어야죠. 수어통역사나 속기사를 거치게 되면 다른 사람들보다 시간이 좀 더 걸릴 수밖에 없잖아요? 그 시간을 기다리고 경청하는 분위기도 중요할 것 같아요.
농'청년'을 위한 정책 제안이 있다면?
진경: 저는 올해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 준비를 하고 있어요. 그런데 입사 원서를 넣으려고 찾다 보면, ‘전화 업무’가 들어간 경우가 대부분이예요. 그러니까 거기부터 아예 지원 자체가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 농청년들 중에서는 아예 사무직은 포기하고 공장에서 일하는 경우도 많고요. 이건 엄연한 차별이죠. 이런 부분들이 시정됐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취업한 다른 친구들 이야기 들어보니까, 전화도 전화지만 회의할 때 정말 힘들다고 하더라고요. 구화(입으로 말하는 것-편집자 주)를 하는 친구인데, 회의 때 문자통역조차 없다 보니 여러 사람 입 모양을 정신없이 따라가야 한 대요. 회의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파악하기가 너무 어렵다는 거죠. 농인이 취업할 때 통역 지원이 꼭 필요해요.
나라: 제가 지금 다니는 회사는 대표님이 장애인과 함께 일하는 것에 굉장히 관심이 많으세요. 그래서 수어통역사를 채용하고, 회의 때는 문자통역을 지원해요. 이런 지원들이 사업체 차원이 아니라 국가 차원에서 됐으면 좋겠어요.
하정: 퇴근하고 나서 여가생활 하기가 너무 힘들어요. 배우고 싶은 것도 많고, 즐기고 싶은 것도 많은데. 퇴근하면 보통 저녁 여섯 시 이후인데, 이때는 수화통역센터도 다 퇴근한 시각이에요. 수화통역센터는 오전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서비스를 제공하는데, 학교에 다니거나 일하는 청년들은? 거의 이용을 못 하는 거죠. 몇몇 구에서 ‘야간 수어통역 서비스’가 생겼어요. 이게 서울시 전역으로 확대되면 좋겠어요.
얼마 전에 컴퓨터 배우려고 학원 갔다가 퇴짜맞았어요. ‘청각장애인이라 수업 따라오기 힘들 거다’라면서 수강을 못 하게 하는 거예요. 제가 ‘알아서 수어통역사나 문자통역사 모셔올 테니 그냥 자리만 내달라’고 했는데도, ‘다른 수강생들에게 방해될 것 같다’고 끝까지 못 오게 했어요. 농청년은 스펙을 쌓으려야 쌓을 수가 없어요.
생재: 저는 문화에 관심이 많거든요. 영화, 연극, 뮤지컬, 스포츠 관람에 더 나아가 스포츠 관련 강좌 등 다양한 영역에서의 문화생활을 다른 사람들처럼 즐기고 싶은데, 문자나 수어통역이 없으니까. 너무 아쉬워요. 적어도 시립, 구립 등 공립인 곳에서부터라도 신경을 좀 썼으면 좋겠어요.
하정: 세종문화회관으로 공연을 보러 간 적이 있는데, 외국인이 나와서 노래하기에 앞서 곡 소개를 하는데, 제 앞 좌석 등받이에 달린 모니터에서 한국어 자막이 나오는 거예요! 그거 보고 좀 충격받았어요. 그렇다면 한국인이 나와서 노래하거나 이야기할 때 한국어 자막도 얼마든지 띄울 수 있다는 거잖아요?
이진경, 정나라, 김하정, 진생재(왼쪽부터) 씨가 '박원순 캠프의 농아인 청년'이라는 문구를 수어로 표현하고 있다.
네 사람은 여전히 할 말이 많다. 할 일도 많다. 다른 사람이 대변하는 게 아니라 내가 직접, 내 ‘목소리’로 계속 이야기할 거라고, 네 사람은 입을 모았다. 원하는 직업을 갖고, 여가생활을 즐기는 삶. 네 사람은 더 이상 ‘어쩔 수 없지’라며 이 삶을 포기하지 말자고 제안한다. 우리도 이 사회의 일원이라고, 우리의 목소리에 응답할 것을 사회에 요구하자고. “더 많은 농인이 사회를 향해 이야기할 때, 우리의 삶은 정말로 변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