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종선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모임 대표
‘당사자운동’이라는 말이 있다. 언제부터 쓰였는지 확실치는 않으나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닌 것 같다. 1991년 8월 동성동본금혼 폐지운동 때 피해 ‘당사자’들이 직접 나섰다는 것을 강조한 신문기사가 있고 2000년대 들어 1987년 말부터 전개된 산재노동자 운동을 ‘당사자운동’이라고 표현한 보고가 있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운동은 당사자운동이다. 노동운동은 노동자들의 경제·사회적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한 운동, 여성운동은 여성들의 권익향상을 위한 운동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사자운동이라는 말이 따로 사용되고 있고 그것도 비교적 최근에 와서야 등장하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우선, 1980년대 변혁운동의 영향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당시의 운동은 연대를 통한 사회변혁에 초점을 맞추면서 운동 당사자의 권익은 도외시한 역사가 있다. 다음으로는 노동운동이나 여성운동을 당사자운동이라고 부르지는 않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당사자운동이라는 말에는 소수자 또는 사회적 약자가 스스로의 힘으로 운동한다는 의미가 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거꾸로 소수자 또는 사회적 약자는 이전까지 자력으로 자신의 권리를 찾지 못했다는 말도 된다. 이 같은 이유에서 현재 전개되고 있는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들의 특별법 제정 운동은 지식인들의 허를 깨는, 당사자운동 중의 당사자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형제복지원이 어떤 곳인가. 가난하고 못 배우고, 그래서 정상의 사람들에게 혐오를 주고 사회에 위협이 된다 해서, 비정상으로 간주된 사람들을 격리시킨 곳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이 형제복지원으로 끌려갈 때 정상의 사람들은 안전하고 쾌적해질 삶을 기대하며 환호하고 박수를 보냈다.
형제복지원 수용자들은 소수자이거나 약자 축에도 들지 못했다. 그들은 사람이 아니었다. 나와 같은 사람이 아니었기에 그들에게 가해진 차별과 혐오, 폭력과 불법에도 눈감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스스로 권리를 찾기 시작했다. 의식 있고 깬 자만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한 ‘운동’이라는 것을 하게 된 것이다.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은 어떻게 권리를 자각할 수 있었으며 또 어떻게 타인의 도움 없이 스스로 나설 수 있었을까.
형제복지원 사건을 세상에 다시 알린 피해생존자모임 대표 한종선의 기억을 따라 가보자. 1984년 아홉 살의 나이에 누나와 함께 형제복지원에 감금된 한종선은 1987년 풀려난 뒤 구두 가공 노동자, 배달원, 뱃일 등을 했다. 착취와 배신이 이어졌지만 버림받았다는 절망감만 있었지 제대로 된 항의는 할 줄 몰랐다. 그러나 서른 살 즈음해 공사장에서 다치고 ‘산재’라는 말을 우연히 알게 되면서 최초의 변화가 왔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산재가 산업재해의 준말이고 공사장 팀장이 산재 얘기에 다짜고짜 욕을 했던 이유가 뭔지 알게 되면서 그는 처음으로 정당한 분노를 느끼게 된다. 이전의 분노가 버려진 자신을 향한 것이고 절망으로 이어지는 것이었다면 새로운 분노는 사회를 향한 것이고 희망으로 연결되는 것이었다. 그는 인터넷 신문고에 사연을 올렸고 결국 동사무소에서 연락이 와 기초수급자 신청을 할 수 있었다. 수급자 지정 과정에서 잃어버린 아버지와 누나의 소재도 알 수 있게 됐다. 아버지는 울산, 작은누나는 부산의 정신병원에 각각 입원하고 있었다.
2007년 아버지와 누나를 찾은 한종선은 이때부터 인터넷에 형제복지원 사건의 진실 규명을 촉구하는 글을 올리기 시작했고 2008년에는 광화문에서 열린 미국소 수입 반대 집회에도 참여했다. 수입소로 인한 아버지와 누나의 건강이 염려됐기에 누구 얘기가 맞는지 정확히 알아야 했기 때문이다.
형제복지원 일로 1인 시위에 나서게 된 계기는 톰 크루즈 주연의 영화 ‘콜래트럴(Collateral)’을 보면서였다. “꿈을 이루려면 빚을 내서라도 리무진 택시를 먼저 구입했어야 했다.”는 주인공의 말을 듣고 다음 날 피켓을 만들어 국회의사당 앞으로 달려갔다. 2012년 여름이었다.
한종선의 1인 시위로 촉발된 형제복지원사건 진실규명운동은 지난해 부산 형제복지원 터에서 서울 청와대까지 500킬로미터에 달하는 대장정으로 이어졌고 2018년 6월 22일 현재 국회 앞에서 형제복지원사건 진상규명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노숙농성을 228일째 이어가고 있다. 그 가운데 여러 사회운동단체나 지식인들의 지원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처음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행동과 방향은 당사자들의 숙의를 통해 결정된 것이었다.
지난해 9월, 부산에서부터 서울까지 총 500여km를 걸은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모임의 국토대장정 대열.
"처음에는 이런다고 세상이 바뀌겠냐 싶었습니다. 그런데 세상보다 내가 먼저 바뀌더군요.”
한종선과 함께 국회 앞 노숙농성을 하고 있는 최승우의 말이다. 10여 년 전 한종선이 우연히 들은 ‘산재’라는 말에서 비롯된 분노가 한종선을 바꾸고 그 한종선이 다시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바꾼 것이다.
한나 아렌트는 『폭력의 세기』에서 “오직 정의감에 어긋날 때만 분노로 반응”한다고 했다. 폭력이 있다고 해서 모두 분노를 느끼는 것은 아니라 폭력의 고의성과 부당함을 알아챘을 경우에만 분노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못 배운 사람들은 지식인의 교육을 통해서만 분노를 깨달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게 과거의 운동이었다면 한종선은 스스로의 경험을 통해 분노를 자각하고 자신과 주변을 변화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들의 운동은 스스로의 변화와 권리찾기에 그치지 않고 있다. 여의도 농성텐트는 군 의문사 피해유가족, 상명대 연구비 비리 내부제보자, 대학강사노조 등의 쉼터이자 연대기지가 되고 있다. 가장 큰 분노와 슬픔으로 가장 치열하게 싸우는 사람들이 자신의 분노와 슬픔을 넘어 다른 이의 그것에 공감으로써 연대하고 있는 것이다.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모임은 지난해 국토대장정 일정 중 선감학원 피해생존자들과 만나 서로의 아픔을 공감하고 어루만졌다.
한종선 씨가 제8회 진실의힘 인권상 수상자로 결정됐다. 역대 수상자는 서승(재일교포유학생간첩단 사건 피해자), 김근태(고문 피해자 민주화운동가), 강기훈(김기설 유서대필조작사건 피해자) 등이 있다. 한눈에도 한종선 씨와의 차이가 명확하다. 역대 수상자 모두는 소위 운동가였고 지식인이었다.
진실의힘은 한종선 씨를 선정한 이유로 그가 ‘상처 입은 치유자’라는 점을 들었다. 피해 당사자이지만 자신은 물론 다른 이들까지 치유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일찍이 이런 일은 없었다. 소수자와 약자는 스스로의 힘으로 상처를 치유할 수 없는 존재였고 더욱이 형제복지원 같은 시설 수용자들은 같은 인간으로조차 여겨지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그들이 스스로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은 물론 다른 이들의 상처까지 보듬으려 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들의 운동은 지금까지의 사회운동에 대한 전복이다. 지식인들의 오만을 깨부수는 것은 물론 연대의 또 다른 해법도 제시하고 있다. 연대는 깨우친 자가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내어주는 시혜가 아니라, 추상적인 하나의 목표를 향해 수많은 당사자들을 동원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자리에서 경험한 분노와 슬픔을 다른 이들과 공유하는 것이라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다.
큰 깨달음과 반성을 준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들에게 감사와 존경을 보내며 한종선 대표에게 수상의 영광을 안겨준 진실의힘의 혜안에도 공감의 박수를 보낸다. |